[52]
그러던 중, 지완은 어떤 한 존재와 만나게 되었다.
"언제까지 불공평한 대결을 준비할 생각이지? 이미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과 다른 존재가 되었는데?"
그는 스스로 악마라 말하는 존재.
바로 악마 장관 스크레이치였다.
그는 동팔의 계약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제안했다.
"그러니 무엇을 원하는가? 그것을 주지."
"공짜로?"
"당연히 공짜는 아닐세. 내가 받아내야 할 것은 너의 영혼의 권리. 물론 무조건 받아내겠다는 건 아니야. 어느 조건을 달성하면 능력은 능력대로 유지하고, 자네는 영혼을 나에게 주지 않아도 된다네."
처음에 그 말을 들었을 때 지완은 지극히 상식적인 반응을 보였다.
"지랄하지 마. 새꺄. 내가 왜 내 영혼을 너한테 줘야 하는데?"
상대가 진짜 악마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게 사실이라도 자신의 영혼을 줘야 할 이유는 없었다.
이미 자신은 오성의 에이스로서 자리를 잡았고, 아직도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투수였다.
가지고 있는 것이 있고, 가족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고작 능력 하나 얻자고 죽음과 다름없는 조건을 받아들이겠는가?
그의 강한 거부에도 스크레이치는 화내지 않고,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지금은 그저 이런 길도 있다는 걸 알려주러 왔네. 그러니 언젠가 생각이 나면 나의 이름, 스크레이치를 부르도록. 그러면 언제라도 자네의 앞에 나타나 계약을 하지."
악마는 그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처음에는 환상이나 헛것을 봤는가 싶었다.
그러나 그의 말에 지완은 한 가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동팔이 자식… 갑자기 재기할 수 있었던 이유가… 설마……."
이미 의학적으로 완전히 끝난 동팔이 다시 부활할 수 있었던 이유가 그것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지완은 더욱 결심을 다졌다.
"악마와 계약을 해서 어떤 능력을 얻었는지 몰라. 하지만 비겁한 수로 다른 사람을 농락하는 건 내가 반드시 막겠어. 반드시."
하지만 지완은 몰랐다.
눈에 보이지 않아서 사라졌다 생각한 스크레이치가 여전히 그의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한 번 발버둥질해보도록. 그리고 절망을 느끼도록 하게. 그 절망이… 나를 다시 찾게 만들어줄 테니까…….'
긴박 속의 여유
우산과 RG의 주말 3연전 중 마지막 경기가 있는 날.
예상외로 RG가 우산을 상대로 2연승에 성공했다.
이젠 스윕을 달성하느냐 아니면 오늘 패해서 위닝 시리즈로 마무리하느냐가 갈리는 상태였다.
그리고 이번에 맞붙는 양팀의 선발 투수는 3선발 투수.
RG는 외국인 용병 투수인 소르스가 선발로 나섰고, 우산은 호우덴이 선발로 등판했다.
특히나 오늘은 일요일이기에 많은 관중이 예상되는 날.
덕분에 민희는 일요일 아침부터 늦잠도 자지 못하고 엄청나게 바빠졌다.
"아, 왜 인터넷 서버가 날아가고 지랄이야! 예매해야 하는데!!"
민희가 화를 내자 지켜보고 있던 그녀의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동팔이 오늘 등판 안 한다면서? 그럼 경기 끝나고 가면 되지 않니? 어차피 오늘 경기 시작은 오후 5시라 여유가 있잖아."
하지만 민희의 반격은 만만치 않았다.
"경기가 언제 끝날 지 알아요? 5시에 시작해도 늘어지면 11시 넘어서 끝나는 거 아시잖아요. 그럼 데이트 시간이 부족할지도 모르는데… 얼굴이라도 더 봐야죠."
당당한 민희의 말에 아빠가 졌다는 듯이 답했다.
"딸자식 키워봐야 소용없다더니… 야구장 티켓 값이 얼만데 아빠랑 엄마 선물은 주지도 않고!"
아빠의 푸념에 민희는 팩트 폭탄을 투하했다.
"매달 용돈 드리잖아요. 티켓 값보다 그게 더 많이 나가는데 무슨 소리하시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오해하겠네."
"크흠. 듣기는 누가 듣는다고. 근데 동팔이한테 시즌권 받았다면서? 잠실에서 하는데 왜 티켓을 구하는 건데?"
"그건 RG가 잠실을 홈에서 사용할 때 이야기잖아요. 지금은 우산이 홈이라서 어쩔 수 없어요."
민희의 말에 아빠는 혀를 끌끌 차며 이야기하셨다.
"거참…구장을 하나 더 짓든가, 다른 하나가 나가든가 해야지. 한 집에 두 집 살림이면 어떻게 하나……."
"연고지를 쉽게 옮기겠어요? 그리고 구장 짓는 것도 손발이 맞아야 하죠. 물론 새로 짓는다면 돔구장이 낫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팬들의 바람이었다.
적어도 날씨 때문에 경기가 지연되거나 취소되는 것은 싫었다. 비가 내려 옷이 젖는 것도 마찬가지.
하지만 일반 구장을 짓는 데 드는 돈도 만만치 않았는데, 지붕까지 얹으려면 건축비가 확 늘어날 것이다.
그것도 일반 집의 지붕이 아니라 야구장을 전부 덮을 지붕이라면 안전을 생각해 튼튼하게 지어야 함은 물론이고, 외관까지 고려해야 했다.
구장에 대해서 팬들이 아무리 말을 많이 해도 직접 짓지 않으면 의미가 없었다.
민희는 투덜거리면서 표를 예매하는 데 성공했다.
"됐다!"
표를 예매했다고 민희의 일이 끝나지 않았다.
이것은 준비 작업 중 하나에 불과했다.
민희는 바로 화장대로 가서 열심히 화장에 집중했다.
그 모습을 보던 아빠가 넌지시 물으셨다.
"오늘 언제 만나?"
"11시."
민희의 대답에 아빠는 시계를 보았다.
지금 시각은 9시를 조금 지나 있었다.
남자의 입장에서 시간이 한참 많이 남는 시간. 하지만 여자에게는 빠듯한 시간이었다.
시간이 맞지 않아 남들과 다른 데이트를 해야 했다.
그러니 평범하게 있을 수 있는 오늘과 같은 날은 특히 더 신경 쓰기 마련.
고도의 집중력으로 화장을 마친 민희는 마침 동팔에게 전화가 오자 바로 받았다.
"네. 오빠. 저예요."
―응. 다른 게 아니라 지금 너희 집 근처라서. 혹시 준비 다 됐어?
"마침 다 끝났어요. 잠시 만요."
민희는 입고 있는 추리닝을 벗고 재빨리 준비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가족이기에 잘 알지만 여전히 딸의 변신한 모습이 적응되지 않은 아빠.
그렇다고 초를 칠 생각은 없었기에 배웅을 해주셨다.
두 사람은 만나기로 약속했던 장소에서 만났다.
민희는 동팔이 새로 뽑은 차종과 색, 번호를 알고 있었기에 차를 발견하자 바로 손을 흔들었다.
이내 차가 멈추자 그녀가 능숙하게 문을 열고 탔다.
"죄송해요! 제가 좀 늦었죠?"
"아냐. 나도 방금 왔어."
민희가 타자 동팔의 표정이 밝아졌다.
민희를 볼 때마다 밝아지는 그의 얼굴이었지만 정작 민희는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없을 때의 동팔의 얼굴을 보지 못해 비교를 할 수 없었다.
민희가 볼 수 있는 동팔의 얼굴은 지금과 같은 표정. 그리고 마운드에 섰을 때의 얼굴이 전부였다.
"11시니까… 점심은 내가 예약해놓은 곳으로 가자."
"네. 어디로 갈 건데요?"
"전에 민희가 가고 싶어 하던 곳."
전과 달리 돈에 여유가 있으니 조금 비싼 곳이라도 부담이 없었다.
민희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
"차가 있으니 편하네요. 주차하는 것만 빼면."
"그건 서울에 사는 이상 어쩔 수 없지 않을까?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도 없고."
"갑자기 인기인이 되는 것도 좋지 않네요. 그때 엄청 고생했잖아요. 연예인도 아닌데 사람들이 오빠 얼굴을 알아봐서 아수라장이 되고……."
동팔이 부산으로 원정을 갔을 때는 출퇴근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구단의 버스로 이동했고, 숙소도 부산의 호텔이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마운드에 올라와 160의 강속구를 뿌린 여파는 생각보다 컸다.
야구선수의 휴일인 월요일 이후, 화요일에 오성과의 홈경기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
당시 선배들과 코치들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자신의 자동차로 집까지 태워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폐를 끼칠 수 없다는 생각과 집까지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기에 지하철을 이용하려고 했다.
거기에 민희와 함께였기에 더욱 신세를 질 수 없었다.
그 선택으로 인해 동팔과 민희는 큰 난관에 부딪혔다.
동팔이 자신을 알아보고 사인을 해 달라고 온 팬들에게 둘러싸인 것이다.
당시 민희도 있었지만, 팬들에게 튕겨 나와 동팔과 오붓하게 집에 갈 수 있는 기회도 튕겨 나가고 말았다.
그 다음 날.
결국 동팔은 일찍 일어남과 동시에 차를 구매했다.
이미 면허를 이전에 땄고, 이후에는 아버지의 차를 운전했다.
다만 아버지의 차는 가족 차와 다름없어 동팔이 출퇴근할 때마다 사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과감히 새 차를 산 것이다.
차가 쇼핑하듯이 주문하자마자 바로 오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최대한 빠르게 받을 수 있게 했고, 바로 어제 차를 받았다.
오늘은 처음 그 차를 타고 민희와 데이트를 하는 날이었다.
"회사 분들은 잘 지내고 계셔?"
"네. 대리님은 저한테 오빠 기사 좀 스크랩하라면서 신문까지 던졌어요."
"그건 대리님답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그때 처음 보는 사람도 있던데? 신입사원?"
"네. 지금 오빠를 대신해서 대리님께 엄청 야단맞고 있는 신입이예요."
민희의 말에 동팔은 이전, 자신이 김 대리에게 야단맞던 때가 떠올랐다.
이제 그 자리에 자신을 대신해서 그때 본 신입사원이 있다는 생각에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 눈에 선하네. 그땐 정말 대리님이 무서웠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지. 사실 내가 회사 나오려 할 때 제일 많이 지지해주시고, 지원해주셨어."
"그건 저도 몰랐어요. 항상 엄한 분이시라 차갑고 무서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따듯한 분이시더라구요. 업무 중에 실수하면 호랑이보다 무서운 건 바뀌지 않았지만."
회사 얘기로 한참이 지나고,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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