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오력의 투수-46화 (46/325)

[46]

회사에 출근한 민희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신문의 기사를 가위로 오렸다.

한 장에 양면으로 인쇄되기에 신문 두 개를 사서 동팔의 기사를 스크랩하는 민희의 콧노래는 사라지지 않았다.

김 대리가 출근하면서 즐거워하는 민희의 머리를 신문으로 툭 치며 말했다.

"도장 찍기 전까지 안심하면 안 된다. 그리고 출근하면 일을 해야지. 예비낭군님 기사를 스크랩하고 있었어?"

김 대리의 말에 민희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그래서 빨리 왔잖아요. 대리님. 아직 15분이나 남았거든요. 그런데 대리님도 신문 사오셨네요."

민희의 말에 김 대리는 자신이 사온, 같은 신문 두 부를 주며 말했다.

"응. 말 잘했다. 시간 줄 테니까 이것도 스크랩해."

"네?"

"두 개 중에 잘된 거를 회사에 보관할 거니까 열심히 하고."

"네?"

민희가 김 대리의 말에 혼란스러워 하는 사이 그는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가 한 말을 뒤늦게 이해한 민희는 김 대리가 있는 방향을 쏘아 보았다.

'교활해. 치사해. 회사 거라면 내가 대충할 것을 알고……!!'

그렇다고 해서 그가 보는 앞에서 당당히 노려볼 자신은 없었다. 그런 와중에 김 대리가 말했다.

"대신 회사 일로 간주할 테니까 시간에 너무 쫓기진 마."

너무 쫓기지 말라는 건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업무 시작 시간을 넘어도 된다는 허락. 하지만 너무 넘어서 민희 본인의 업무에 지장이 생기면 안 된다는 경고.

"네… 알겠습니다."

결국 민희는 졸지에 두 개의 스크랩을 하는 데 전력을 다 해야 했다.

민희는 투덜거리면서 기사를 읽어 나갔다.

'음… 다음 등판은 다음 주 수요일이고… 상대는 강한 타선으로 유명한 엑센이네. 고척돔구장이 잠실구장보다 작아서 타자에 유리하다고 하지만… 오빠 공의 위력이라면 괜찮겠지?'

두 팀 다 서울이 연고지라 홈과 원정의 차이가 거의 없었다. 그러니 이동에 의한 컨디션 난조를 고려하지 않아도 되었다.

동팔의 기사를 스크랩하던 민희는 나중의 일보다 지금 당장의 일이 궁금했다.

'그런데 지금 오빠는 뭐 하고 있을까? 평상시처럼 훈련하고 있으려나?'

민희의 예상은 절반만 맞아 떨어졌다.

선발인 동팔은 등판하지 않는 날엔 컨디션 회복과 훈련에 힘썼다.

어제 열심히 던졌기에 몸을 푸는 정도로 훈련은 마무리된다.

새벽이 끝나고 아침이 되자 완전히 회복한 동팔이다.

하지만 말해 봐야 믿지 않을 것이 뻔하니 묵묵히 훈련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진.

"오랜만이에요. 어제 호투 잘 봤어요. 혹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신지예 기자였다.

이미 동팔과의 인터뷰 및 취재를 위해 줄서 있는 기자들이 많았다.

많은 기자들을 뒤로하고 먼저 올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쓴 독점 칼럼 때문이다.

동팔이 재기하는 과정을 1년 동안 취재한 유일한 기자.

그 덕을 지금 톡톡히 보고 있었다.

"네. 그런데 무슨 질문하실 거예요?"

"그거요? 그건 이야기하면서 할게요. 여러 질문이 있었지만 지금은 별로 생각나지 않네요. 감독님께 물어보니까 오늘은 시간이 좀 남을 거라고 하셨으니 느긋하게 해요."

이야기하면서 취재하는 건 그녀의 독특한 방법이다. 그걸 알기에 동팔은 편하게 이야기를 해 나갔다.

"기분이 어때요? 어제 처음으로 선발 등판했을 때. 많이 떨리지 않았나요?"

"떨리기야 했죠. 인정을 받고 기회를 얻었으니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 기회를 어이없이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

"그랬군요. 지난번 중간 계투로 나왔을 때와 비교하면 어떤가요? 긴장이라든가 부담?"

"처음으로 마운드에 올라왔을 땐… 솔직히 너무 긴장했습니다. 주변에 사람들의 시선이 저에게 집중되니 더욱 그랬던 것 같아요."

"정말 그럴 것 같아요. 프로 첫 무대인 것도 긴장되는 순간인데 마운드에 올라와 있었으니 더욱 그랬겠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첫 피안타가 그때 한 번뿐인 거 알고 계시죠?"

이후로 그녀가 묻는 건 어제 있었던 경기에 관한 일이었다.

마운드에 서기 전에 어떤 느낌이었는지 그리고 던지는 중에 든 생각은 무엇이었는지. 실책으로 인해 출루를 허용했을 때 마음, 경기가 끝났을 때의 기분 등을 물었다.

"경기가 끝났을 땐 좀 멍했습니다. '이제 정말 첫 승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땐 아무런 느낌도 안 들었죠. 하지만 집에 돌아가고 눕는 순간 확 다가오더라구요. 그때 많이 울었습니다. '진짜… 내가 프로에서 첫 승을 했구나…'하는 생각에요."

"몇 년에 걸쳐서 재기하셨고 그토록 바라던 첫 승을 거두셨으니 감회가 새로웠겠네요."

신지예 기자는 내심 기다리고 있던 진짜 질문을 던졌다.

"데뷔전에서 완봉승은 역대 7번째. 그중에 노히트노런은 처음이라고 하던데 알고 있었나요?"

"아뇨. 경기 끝난 다음 감독님께서 말씀해주셔서 알았습니다. 그 이전에는 경기에 집중하느라 전혀 몰랐어요."

"그럼 지금 기분은 어때요? 좋지 않나요?"

신지예 기자는 그 말을 하면서 다음 발언을 준비했다.

'자기 잘난 것처럼 말하면 단단히 뭐라고 해야지. 어린 나이에 벌써 자만하면 안 되니까.'

솔직히 잘난 척을 하길 바랐다.

그래야만 자신이 득의양양하게 말할 수 있으니. 그런데 동팔의 말은 생각과 달랐다.

"당연히 좋죠. 하지만 노히트노런은 저 혼자 한 것이 아니라 같이한 팀 선수들 덕분인 걸요."

"음… 그래요? 그래도 강동팔 선수가 삼진을 16개나 잡아서 거의 혼자서 한 거나 다름없지 않을까요?"

"아뇨.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다른 아웃 카운트는 다른 분들께서 잡으신 거니까요."

"그래요……."

예상과 달리 겸손한 반응에 신지예 기자는 김이 샜다.

동팔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어젯밤에 많은 얼굴이 떠올랐어요. 공을 던질 수 있게 해주신 레슨장의 사장님 그리고 함께 야구한 스틸러스와 우랑우탄의 선수들. 또 세심하게 코치해 주신 윤승완 코치님. 갑자기 회사를 나와야 했지만 지원해지고 응원해주신 회사 사람들까지……."

"그리고 가족과 민희 씨도 있죠?"

"네… 그분들이 아니었으면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없으니까요."

"아~ 그럼 어제 첫 승의 감사와 영광은 방금 말씀한 모든 분들께 돌리겠다는 말씀이군요."

"네. 수없이 감사해도 부족하죠."

동팔의 말에 신지예 기자의 표정이 깨졌다.

"쳇, 정말 재미없네. 어린애가 혈기도 없어? 이참에 잘난 척이나 좀 하지."

"네?"

침을 뱉을 것만 같은 그녀의 말과 행동에 동팔은 당황했다. 신지예 기자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민철 씨 말대로 정말 순둥이는 순둥이야. 어제 마운드에선 타자를 씹어 먹을 것처럼 유린하더니."

"네?"

"좌우지간 기사는 적당히 써 줄 테니까 그렇게 알고. 너 민철 씨랑 잘 아니?"

신지예 기자가 존댓말을 하다가 갑자기 반말로 바꾸자 동팔은 적응하지 못하고 휘둘렸다.

그는 자신이 아는 그대로 순순히 대답했다.

"네? 네. 근래에 자주 못 보고 있긴 하지만……."

"그럼 됐어. 혹시 민철 씨 어때? 사귀는 사람 있어?"

"아직 제가 알기론 없는데요."

"그렇구나. 그럼 좋아하는 사람은?"

"특별히 좋아하는 연예인은 없지만 아이돌 그룹은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그 말에 신지예 기자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음~ 그래. 좋은 정보네. 어떤 아이돌 그룹이야? 그중에서 특별히 더 좋아하는 사람은?"

"그것까진 잘 모르겠어요. 매년 바뀌는 것 같아서요. 지금 쯤이면 또 바뀌지 않았을까요?"

동팔의 말에 날카롭게 변한 신지예 기자의 눈빛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러니? 그렇구나. 혹시 직장은 어느 쪽이야? 혹시 디자인? 아니면 기술 쪽?"

"그건… 기술 개발 쪽으로 알고 있어요. 결혼하고 싶어도 여자를 만날 수 없다고 투덜거리는 걸 많이 봤거든요."

동팔의 말에 신지예 기자의 표정은 완전히 풀어졌다.

"오~ 그래. 잘됐다."

이렇게 되니 둔감한 동팔도 모를 수 없었다.

"저기… 제가 소개시켜 드릴까요? 민철이 형도 좋아하실 거예요."

확신할 수는 없지만 신지예 기자도 미인이니 노총각인 민철이 거부할 것 같진 않았다.

동팔의 말에 신지예 기자는 호호 웃으며 말했다.

"아냐. 내 밥그릇은 내가 챙길 거니까 굳이 그럴 필요 없어. 마지막 확인 작업을 해야 했거든."

그녀는 기자다. 상대의 정보를 얻는 것에서 경찰 못지않은 능력을 가졌다. 굳이 동팔을 통해서 모든 정보를 얻을 필요는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 민철에 대한 모든 정보의 파악이 끝났고 마지막 확인은 동팔을 통해 한 것이다.

"아, 네… 그런데 민철이 형은 언제부터 아신 거예요? 취재하실 땐 우랑우탄팀만 만나셨잖아요."

"그거? 별거 아니야. 우랑우탄에서의 이야기도 좋지만 그 전에 이야기도 알고 싶어서 찾아가 봤거든. 그런데 생각보다 사람이 좋은 것 같고 잘생겨서 눈이 가더라."

신지예 기자의 말에 동팔은 진심으로 놀랐다.

'뭐? 잘생겨? 민철이 형이? 우랑우탄이나 고릴라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는 그 사람이?'

솔직히 말해 민철은 잘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추남에 가까운 얼굴이었다. 몸도 포수답게 굵직하고 단단했다. 하지만 동팔은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사람마다 취향은 다르니까…….'

짚신도 짝이 있다는 사실을 의외의 사람을 통해 알게 되었다. 동팔은 신지예 기자에게 민철의 세세한 취향에 대해서 취조 같은 취재를 당한 후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신지예 기자와 헤어지기 전, 동팔이 물었다.

"저기… 형수님이라 불러야 하나요?"

동팔의 말에 신지예 기자는 화색이 만연한 상태로 말했다.

"아니. 벌써 그 정도는 아니지. 호호호……."

하지만 거부하지 않는 그녀.

동팔을 취재해서가 아니라 의외의 것에서 기쁨을 얻은 그녀의 돌아가는 발걸음은 너무나 가벼워 보였다.

인터뷰 같지 않은 인터뷰를 하고 나서 동팔은 겨우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다음에 마주친 사람은 RG의 임상훈 감독이었다.

"동팔아. 몸은 어때. 괜찮아."

"네. 괜찮습니다. 오늘도 선발 등판할 수 있습니다."

동팔의 말은 사실이지만 오늘 그를 선발로 내세울 리가 없었다.

"괜찮은가 보구나. 오늘은 무리하지 말고 컨디션 조절에만 신경 써. 혹시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말하고."

이전에는 아프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없었다. 프로 선수가 승부욕도 없이 뺀다는 인식이 있었던 시절이었다.

130개가 넘는 공을 던져도 팀을 위해 마운드에서 공을 던지는 것이 미덕이던 시절.

사람의 몸에는 한계가 있었다.

온몸을 불살라 희생한 선수는 결국 혹사와 부상으로 인해 선수 생활이 줄어들게 된다.

이는 결국 선수 본인만이 아니라 구단의 손해가 된다는 경험이 쌓였다.

이젠 과거와 달리 선수의 몸 상태에 항상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아플 때 아프다고 말하지 않으면 오히려 죄인이 되는 세상이다.

"네. 알겠습니다. 경험이 있으니 무리할 생각 없습니다."

"잘 생각했다. 혹시 뭐 필요한 거 있니?"

프로에 온 이상, 선수와 제일 잘 맞는 물품을 구비하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일 중 하나다.

작은 차이로, 찰나의 순간 모든 것이 결정되는 프로의 세계이니 아무리 비싼 물품이라도 그들에게는 사치가 아닌 투자였다.

동팔이 쓰는 투수 글러브는 상당히 비싼 글러브였다.

하지만 프로 선수가 쓰기엔 떨어졌다.

동팔이 특별히 요청한 것이 없기에 그대로 두고 있지만 이왕이면 전력을 조금이라도 더 높이기 위해서 신경을 써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동팔이 글러브 후원하겠다는 회사가 줄을 섰으니 잘 이용해야지.'

특정 선수를 위한 특별 주문 글러브로 지금 당장 가능한 상황이다.

동팔이 선발로 나오기도 전에 모든 야구팬들과 야구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까지 그를 주목하고 있었다.

스포츠 용품 업계에서 그리고 특히 야구 용품 업계에서 이렇게 좋은 광고 모델이 있을 수 없었다.

그가 선발로 나오면 굳이 TV광고를 넣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전국으로 자신의 상품을 보여줄 수 있었다.

이미 KBO에 등록되어 선수와 구단, 협회에 후원하고 있는 모든 회사가 동팔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동팔은 글러브에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감독의 말에 동팔은 잠시 잊고 있던 것이 생각났다.

"아, 맞다. 감독님. 부탁드릴 것이 있었는데 감사합니다. 마침 기억났습니다."

"그래? 뭔데?"

그의 물음에 동팔은 조금 주저하며 말했다.

"그게…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수 있는데 괜찮으실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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