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이제 경기 시작이야. 벌써부터 160의 강속구를 던질 리가 없어. 나중을 생각하면 더욱더…….'
초반부터 빠른 공을 던지면 타자들의 눈에 익어 동팔이 던질 수 있는 구종이 더 빠르게 줄어든다.
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 없기에 신해민은 잘 하지 않는 자세를 취했다.
[번트를 준비하는 신해민.]
[지금은 투 스트라이크 상황입니다. 번트를 해서 파울이 되면 쓰리 번트 규정에 따라 아웃이죠.]
[그만큼 절박하거나 자신이 있다는 말이겠죠? 신해민 선수의 번트 성공률도 꽤 높습니다. 세이프티 번트 성공도 몇 번 했고 희생 번트의 성공률도 높습니다. 3루 주자를 홈으로 불러들이는 스퀴즈 번트도 가능한 선수예요.]
[어떻게든 진루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신해민 선수!]
신해민의 번트 자세에 고민하는 동팔. 그러다 번뜩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설마… 그건가?'
번트는 생각보다 어려운 기술이다. 어떻게든 배트에 공을 대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만으로 번트에 성공할 수 없었다.
둥근 배트에 둥근 공을 맞춰야 하기에 제대로 맞지 않으면 위로 떠버린다.
빠르게 날아오는 공을 단순히 맞추는 것만이 아니라 느리게 굴러가도록 속도를 늦추는 작업을 동시에 해야 한다.
페어 안으로 공이 굴러가도 너무 빠르게 굴러가면 내야수나 투수의 글러브에 들어가는 시간이 줄어든다.
그리고 줄어든 시간만큼 주자가 살아남을 확률은 빠르게 줄어든다.
신해민이 번트를 준비하자 동팔도 원래 예상한 볼 배합을 수정했다. 포수를 하고 있는 김강수도 같은 생각이었다.
동팔은 마운드 위에 있는 로진백(송진가루)을 들었다.
그리고 손가락에 가루를 살짝 묻힌 후, 원하는 공의 그립을 잡았다.
"후우……."
동팔은 번트 자세를 취하고 있는 해민의 앞을 향해 공을 던졌다.
그러자 해민은 번트 자세를 풀고 자신이 예상한 빠른 공이 오자 과감하게 배트를 휘둘렀다.
'기다렸다! 번트에 쉽지 않은 패스트 볼!!'
자신이 예상한 대로 그리고 의도한 대로 동팔이 빠른 공을 던지자 아직 프로 경험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비록 동팔이 프로에서 경험은 없다지만 포수인 김강수가 있음은 잠시 잊었다.
김강수도 동팔이 던지려는 공을 알자 수긍하고 받아들였다는 사실도.
동팔이 던진 공은 포심 패스트 볼처럼 거의 직선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뭔가 달랐다.
'높지 않다? 설마!!'
포심은 낙차가 크지 않아 상대적으로 떠오르는 것처럼 보이는 볼이다. 하지만 지금 동팔이 공은 떠오른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볼이 아래쪽을 향해 떨어졌다.
딱!!
어찌 어찌 커트하기 위해 배트를 제어했다.
하지만 제대로 맞지 않은 공은 높이 날아가지 못하고 땅에 튕겨 1루를 향해 갔다.
턱.
신해민의 타구는 1루수인 정성민이 쉽게 잡은 후, 1루를 밟아 첫 아웃카운트를 올렸다.
[공 3개 만에 아웃카운트 하나를 잡았습니다.]
[첫 선발 첫 아웃카운트를 강동팔 선수가 쉽게 잡았습니다. 신인이 처음부터 잘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아웃 카운트 하나 잡는 것도 어렵지 않나요?]
[맞습니다. 많은 투수가 프로 무대에 발을 밟지만 그 중에 승리 투수가 되지 못하고 나가는 투수는 정말 많습니다. 심지어 몇 년 만에 첫 승을 신고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방금 전의 공은 노렸습니다. 번트 대는 것을 보고 속구를 유인하려는 걸 알아차렸어요. 오히려 그걸 역이용해서 투심으로 완전히 속였습니다.]
[어쨌든 첫 아웃카운트를 잘 잡은 강동팔 선수. 다음은 오성의 중심타선을 계속해서 상대합니다.]
다른 관중들과 달리 마음을 졸이며 동팔의 투구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가 신해민을 더그아웃으로 보내자 보고 있던 회사 사람들과 외야석에 있는 스틸러스와 우랑우탄 선수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우와~!!"
"잘했다!! 동팔아!!"
그들의 환호에 일부 관중들이 투덜거렸다.
"뭐야. 언제부터 강동팔이랑 친했다고."
"너무 편하게 부르면 실례인 거 모르나?"
그건 동팔과 그들의 사이를 모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사람들의 반응이 어찌하든지간에, 팀 스틸러스와 우랑우탄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고 가지고 온 현수막을 크게 흔들며 기뻐했다.
그러던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이거 K자 가져왔는데 쓸 수 있겠죠?"
투수에게 K는 킬마크.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운다는 뜻이다.
잠실구장에선 전광판으로 표시되기에 굳이 따로 준비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동팔이 승승장구하길 바라며 전지(全紙)에 크게 적은 'K'를 걸 준비를 마쳤다.
"이거 10장이면 충분하겠지?"
"그거 다 쓰면 좋겠다."
"모자라면 더 좋고. 하하하."
당시의 그들은 알지 못했다.
웃자고 한 말이 현실이 될 줄은.
시간은 흘러 8회 초 오성의 공격.
오성의 선수들은 의욕적이지 못했다.
그들이 보는 것은 동팔이 아닌, 전광판에 적힌 그의 기록이었다.
"투수 수가 겨우 70개인데… 벌써 8회라……."
일반적으로 선발투수가 던지는 투구 숫자는 120 안쪽이다.
숫자에 연연하기보다 투수가 전력으로 던진 공이 몇 개인지를 일일이 세어 파악한 후 구위가 저하된다 싶으면 교체한다.
운의 영향을 받지만 선발투수가 120개의 공을 던질 때 즈음은 6회에서 7회 사이.
운이 따르고 페이스가 잘 유지되면 8회나 9회까지 갈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동팔은 오성 타자들이 말처럼 7회까지 70개의 공으로 틀어막았다.
실점하지 않은 것도 대단하지만 한 이닝에 평균적으로 10개의 투구만으로 막은 것이다.
중계석에서도 동팔의 위력적인 투구에 고무되어 있었다.
[대단한 페이스입니다. 초반에 150 위주의 강속구였지만 중반을 넘어가자 160의 강속구를 뿌리고 있습니다. 전혀 힘이 떨어지지 않고 있어요. 오히려 구위가 올라가고 있습니다.]
[오성의 타자들이 공에 적응해도, 더 빠르고 날카롭게 파고드니 소용없죠. 더 놀라운 건 70개의 투구 중에 스트라이크가 67개. 볼이 3개라는 겁니다. 일단 공이 스트라이크로 올 확률이 95%를 넘어 버리니 안 칠 수도 없어요. 가만히 있으면 삼구삼진이니 오성의 타자들이 더 조급해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하지만 위험도 여전히 많습니다. 스트라이크 존에 거의 들어오기에 노리고 치면 불가능하지는 않거든요. 또한 오성에는 힘 있는 타자들이 많아서 강속구를 제대로 때리면 홈런도 가능합니다. 언제 깨져도 이상하지 않을 균형입니다만 강동팔 선수는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잘 이끌어 나가고 있어요.]
[이미 삼진이 12개입니다. 12개. 총 21개의 아웃카운트의 3분의 2가 삼진. 남은 3분의 1은 범타로 처리했습니다. 그런데… 저기 뭔가요? 아까부터 비춰주고 있었는데… 강동팔 선수가 삼진 시킬 때마다 비춰주는 것 같은데요.]
중계 카메라 중 하나가 스틸러스와 우랑우탄팀의 현수막을 비춰주고 있었다.
현수막의 내용은 짧게 보여주고 그 앞에 걸어놓은 'K'가 적힌 전지를 비춰주고 있었다.
처음에는 흰 종이에 검은 글자가 나왔지만 10번째를 넘어 11번째가 되자 중계석에 있는 사람들의 웃음이 터졌다.
[푸흡! 지금 몸으로 알파벳을 만들었습니다. 종이가 부족했나 봐요.]
[그러네요. 종이가 딱 10장이라 두 사람이 서서 케이(K)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분들이시기에 이렇게 열심히 응원하는 건가요?]
[현수막을 보니까 아마야구팀 같습니다. 강동팔 선수가 재기를 준비할 때 같이한 분들 같아요.]
[아, 그러네요. 칼럼을 보니 그때 같이했던 팀이 스틸러스 그리고 우랑우탄이라고 했죠. 이제 기억납니다.]
그러다 캐스터는 해설위원에게 물었다.
[강동팔 선수가 정말 좋은 사람들과 만나서 행복하게 야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서 좋군요. 지금 막 떠오른 질문인데 프로야구에서 데뷔전에 완봉승을 한 전례가 얼마나 있죠?]
그의 물음에 이구연 해설위원이 바로 답했다.
[생각보다 꽤 있습니다. 한… 6번의 데뷔전 완봉승이 있었어요. 가장 최근에는 CT의 윤권 투수가 데뷔전에서 완봉승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5번은 89년 이전의 기록이 전부입니다. 아. 그리고 윤권 투수가 세운 기록에는 무사사구로 완봉을 했기에 이 부분에 있어선 한국 프로리그 최초 기록입니다.]
[그러면 강동팔 선수가 여전히 무사사구를 기록 중이니 이 부분에서 두 번째가 되겠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금 페이스를 보면 그 정도가 아니에요. 지금 노히트노런을 넘어 퍼펙트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프로 데뷔 첫 승을 무사사구 완봉승을 넘어 퍼펙트로 기록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죠.]
[그리고 아직 한국 프로야구에서 퍼펙트게임이 없습니다. 가장 근접했던 경기가 8과 3분의 1이닝까지가 전부였죠.]
이구연 해설위원의 말에 다른 두 사람도, 중계를 보고 있던 모든 시청자들도 덩달아 어떤 상황인지 알았다.
특히나 직접 관람하면서 스마트폰으로 중계를 보는 관중들은 더욱 흥분했다.
"야, 이거 잘 하면 한국 야구 역사상 데뷔전 첫 퍼펙트 완봉승이래!!"
"정말?"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퍼펙트게임 자체가 대단한 거 아냐? 나 아직 한국 리그에서 퍼펙트게임 했다는 거 못 들었어."
믿기 어려운지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스스로 인터넷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었는 장소라 통신량이 폭주하여 인터넷이 제대로 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오성의 4번 타자인 김현우가 타석에 서서 동팔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 다음 타석은 국민타자 이승협.
이승협은 배트에 배트링을 끼우고 다음 타석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다음 타석이 아닌, 동팔의 위력적인 공에 눌려 무기력하게 변한 선수들이었다.
이승협은 배트를 휘두르는 것을 멈추고 그들에게 다가가 말했다.
"니들 겨우 이 정도에 포기했냐? 그러고도 니들이 프로야?"
그의 말에 선수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러자 이승협이 말했다.
"고개 들어."
그의 말에 오성의 타자들은 고개를 들었다.
그들은 이승협이 엄하고 화난 눈으로 자신을 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들을 보는 이승협의 눈동자는 날카롭지 않았다. 오히려 따듯하게 그들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지고 있어도, 상대가 아무리 강해도 우리는 포기할 자격이 없다. 그것이 우리를 응원해주는 팬들에게 해야 할 마땅한 의무다. 안 그러나?"
부드럽게 다그치는 승협의 말에 오성의 선수들은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그들의 마음을 아는지 승협이 이어서 말했다.
"가만히 있지 말고 나와서 최선을 다해라. 이 경기를 이기지 못해도 퍼펙트로 끝내는 건 막아야 하지 않겠나?"
이승협은 그 말을 하고 이전에 준비하던 자리로 가서 묵묵히 배트를 휘둘렀다.
그의 말과 행동에 오성의 타자들은 잠시 멍하니 있었다. 하지만 이내 변화가 찾아왔다.
가만히 있던 타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가 휘두를 배트를 들고 손에 쥐었다. 연습할 수 있는 공간에 한계가 있어 모든 타자들이 연습할 수 없었다. 그래도 타자들은 순서대로 다음 타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은 중계석에서도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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