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왜 하필 그 말을 꺼내선…….'
그동안 누구도 건드리지 않은 자신의 역린을 이승협이 건드렸다.
지완은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천재 투수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동팔이 나오자 끝났다.
고교 때는 동팔의 그림자에 가려 만년 2인자로, 부상으로 방출되기 전까지 언론은 지완이 아닌 동팔에게만 시선을 집중했다.
자신이 받아야 할 모든 환호와 관심을 동팔이 독점했다. 처음에는 긍정적인 질투와 투쟁심이 들었다.
어떻게든 실력으로 동팔을 눌러 자신이 제일 높은 자리에 있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승협의 말대로 고교 때, 지완은 단 한 번도 동팔을 이기지 못했다. 자신보다 한 이닝 더 던지고, 더 빠른 속도와 구위로 팀을 청룡기 우승까지 일구어 놓았다.
그건 지완이 생각해도 당시의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완패.
이것이 지완의 동팔에 대한 자신의 느낌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연예인보다 더 예쁜 여자 친구까지 있었다. 지완은 결국 동팔에 밀려 신인 투수 중 2순위로 프로에 입단했다.
프로에서는 고교 때처럼 지고 싶지 않아 절치부심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들려온 것은 혹사에 의한 동팔의 부상과 방출 소식이었다.
허무했다. 그리고 허탈했다.
이대로 동팔에게 영원히 이기지 못하고 끝나는 건가 싶었다. 물론 사람들은 끝까지 남은 쪽이 이기는 거라 말하지만 그건 지완의 승부욕을 몰라서 하는 이야기였다.
그 말은 지완에게 전혀 위로가 되지 못했다.
동팔이 방출되고 나서 지완의 기량이 올라가자 그제야 언론과 팬들은 그에게 주목했다.
하지만 지완은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동팔이에게 진 상태로 끝낼 수 없어…….'
승협의 말대로 동팔이 다시 돌아오는 날을 기다린 건 맞다. 그래야 그를 완전히 찍어 누르고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팔의 재활은 실패했고, 더 이상 프로에 들어올 수 없게 되자 타깃을 바꾸었다.
동팔의 애인인 혜진을 공략하는 것.
결국 2년 전부터 그녀와 비밀리에 연인이 되었고 그녀의 몸을 취하는 데 성공했다.
혜진의 몸을 취할 때마다 동팔에게 이겼다는 승리감과 고양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혜진을 동팔과 헤어지게 만들고 나서야 그는 자신에 대해 알게 되었다.
'결국… 널 야구로 이기지 않는 이상… 이 응어리를 풀리지 않아.'
혜진이 싫다는 건 아니다. 그녀는 착했다.
비록 헤어졌지만 동팔과 몇 년 동안 버틴 인내심도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예쁘다.
이전에 혜진이 야구장에 갔다가 카메라에 들어왔을 때가 있었다. 그때 잠깐이지만 그녀에 대한 센세이션이 일었다.
그때는 비밀리에 연애하던 중이라 노출되는 것을 꺼려 혜진은 더 이상 야구장에 오지 않았다.
이젠 거의 사라진 길거리 캐스팅을 받을 정도였다.
점점 아름다워지는 혜진을 지완이 싫어할 이유는 없었다. 처음에는 동팔에 대한 열등감에 노렸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어도 옆에 두는 게 좋은 여인이었다.
그러했기에 지완은 불안했다.
'설마… 마음이 흔들리는 건 아니겠지?'
첫사랑인 사람이 다시 재기해서 돌아왔다.
과연 자신이라면 안 흔들릴 자신이 있을까?
지완은 마음을 다졌다.
'이전처럼 쉽게 올라설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동팔아. 그 사람이 말한 대로 프로는 만만한 곳이 아니거든.'
그 생각을 하면서 지완은 관중석을 훑어봤다. 서울에서 하기에 어쩌면 혜진이 와 있을 수 있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이미 집으로 돌아간 혜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국 야구 최초의 기록
시구가 끝나고 본격적인 시합이 시작되자 중계석도 바빠졌다.
[RG의 많은 팬들이 기다리시던 강동팔 투수가 선발 등판 날입니다. 이구연 해설위원께선 오늘 강동팔 선수가 어느 정도까지 던질 거라 예상하십니까?]
[자료가 많지 않아 직감으로밖에 말씀드릴 수가 없네요. 지난 로데전에서 보여준 구위라면 완봉에, 잘하면 노히트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만 아직 신인이고, 경험이 없기에 몇 이닝까지 던질지는 잘 예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최악의 상황도 가능하겠죠.]
[직감이라 말씀하시면서 이미 분석을 다 하셨군요.]
[그러네요. 하지만 편차가 너무 커서 의미가 없는 분석이라 시청자 여러분께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럼 이상현 해설위원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투수 출신이시니 더 체감적으로 잘 아실 것 같은데요.]
캐스터의 말에 아직 해설위원으로 오래하지 않아 어눌한 말로 중년의 남자가 답했다.
[저도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강동팔 선수의 구위가 뛰어나지만 이구연 해설위원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경험이 많지 않습니다. 동시에 강동팔 선수에 대한 타팀의 분석도 잘 안 되었기에 상황은 동등하다고 볼 수 있겠죠. 아마 이번 경기에선 강동팔 선수가 구위의 평균 이상은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번이라… 그럼 다음에는 상황이 바뀔 수 있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이미 모든 구단이 강동팔 선수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모든 행동에 분석이 들어가 있죠. 이번이 첫 선발 등판이기에 많은 데이터를 뽑을 수 있습니다. 그럼 상대팀의 분석이 더 빠른지 아니면 강동팔 선수의 적응이 더 빠른지가 관건입니다. 강동팔 선수의 프로 레이스는 이제 시작한 겁니다. 안주하는 순간 무너질 겁니다.]
이상현 해설위원의 말에 캐스터가 가볍게 농담을 던졌다.
[그건 경험담이신 겁니까? 이상현 해설위원께서도 신인이셨을 때 대단하신 투수셨잖아요.]
[네. 뭐… 그랬습니다. 처음에 프로선수들이 제 공을 치지 못해서 기고만장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뒤, 저에 대한 분석이 끝나자 상황이 역전되어버렸어요. 제가 어떤 공을 던질 줄 아니까 아주 신이 나서 딱딱 치지 뭡니까. 그때 느낀 무력감과 절망을 넘지 못했다면 지금의 제가 없었을 겁니다.]
[네. 언젠가 이상현 해설위원의 충고가 강동팔 선수에게도 닿아 힘이 되길 바랍니다. 그러고 보니 같은 RG 출신이네요. 이상현 해설위원이 계시던 RG와 지금 RG의 차이점이 있나요?]
[그것은 말이죠…….]
그 이후로 무거운 분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가벼운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러다 강동팔이 마운드에 오르자 관중들의 환호가 더 커졌다.
[이게 160의 강속구의 위력인가요? 마운드에 오르기만 했는데 관중들 대부분이 일어나 응원합니다.]
[강속구만 아니라 순수 토종 신인이라는 것. 그리고 방출되었지만 재기하여 다시 일어난 선수라는 것이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강동팔 선수의 재기 스토리를 들으면 절망에 빠진 사람들도 희망을 가지게 만들어요.]
[그런 상황에서 강동팔 선수가 위력적인 구위로 압도적인 경기를 펼치면… 오늘 경기 관람하시는 분들은 티켓 값이 전혀 아깝지 않을 겁니다.]
중계석에서 그 말을 하는 사이, 동팔은 마운드에 올라서 가볍게 공을 던졌다.
가볍게 던지는 공이 최소 130대의 속도를 찍었다.
이어서 오성의 1번 타자 신해민이 타석에 올라오자 중계석이 바빠졌다.
[테이블세터답게 타율과 출루율이 좋은 타자입니다. 타율은 3할, 출루율은 4할이 넘습니다. 선구안이 좋고 특히나 도루 능력도 좋기에 출루하면 투수와 포수로 하여금 신경 쓰이게 만드는 타자죠.]
[작년 기록을 봐도 그렇지만 올 시즌 시작하면서 작년의 기량을 그대로 선보이고 있습니다. 스프링캠프에서 열심히 훈련해 본인의 능력을 더 극대화하는 데 성공한 것 같네요. 쉽지 않은 타자가 될 겁니다.]
[하지만 강속구에 약한 점이 있습니다. 그래도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거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건 아닙니다.]
이미 타자에 대한 자료가 있기에 분석은 간단하게 끝났다. 곧 그들의 초점은 동팔을 향했다.
[동팔 선수가 빠른 공을 초반부터 던질 것이냐 아니면 변화구로 승부를 볼 것이냐가 관건입니다. 이건 동팔 선수의 체력과 연관된 문제예요.]
[로데 전에선 15개의 투구만 했기에 동팔 선수의 체력에 대해선 파악할 자료가 많지 않습니다. 이상현 해설위원께선 혹시 RG쪽에서 들은 정보가 있나요?]
캐스터의 물음에 그가 답했다.
[다행히 들은 게 하나 있습니다. 마침 김정현 캐스터께서 말씀하신 체력에 관한 것이었는데요.]
[정말인가요? 그 중요한 정보를 지금 말씀해주시는 겁니까?]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하하. 좌우지간 들은 바로는 RG의 모든 선수들 중에서 체력이 제일 좋다고 합니다. 160의 강속구를 얼마나 던질 수 있을지 몰라도 체력 저하로 인한 구위 저하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지금 오성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절망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희가 오성은 아니니 그냥 재미만 있네요. 그래도 중계는 공정하게 해야겠죠.]
[그럼요. 공중파인데 그 값을 해야죠.]
동팔과 신해민의 첫 대결이 시작되었다.
초구는 몸쪽으로 향하는 빠른 직구.
신해민은 자신의 약점인 속구가 안쪽으로 들어오자 치지 못하고 지켜봐야만 했다.
[신해민 타자의 약점을 RG가 모를 리 없습니다. 당연히 공략하겠죠. 벌써 150의 강속구를 뿌리는 강동팔 선수.]
[거기에 공을 낮게 던져서 치더라도 범타를 유도하고 있습니다. 신해민 선수의 장타율이 낮기 때문에 어떻게든 출루만 막겠다는 거죠. 하지만 계속 몸쪽 빠른 공을 던지면 신해민 선수도 알아차리고 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체인지업을 노리고 있을 수 있어요.]
동팔이 이어서 던진 공은 빠른 포심 패스트 볼이었다.
거기에 완전히 같은 코스라 치려면 한 번 쳐보라는 도발도 겸하고 있었다.
상대하는 신해민이 그걸 모를 수 없었다.
이제 남은 건 포수의 리드 그리고 강동팔의 성격이었다.
그나마 동팔과 제일 많이 마주친 남궁지완이 해준 조언이 있었다.
"동팔이 성격? 자신의 실력을 알기 때문에 꼼수를 전혀 쓰지 않아. 그렇다고 전부 정면승부만 하는 것도 아니지. 예를 들면… 그래. 사냥꾼. 그게 맞을 거야. 상대에 대해 맞춰 공략하는 스타일? 상대가 만만치 않으면 않을수록 즐기는 녀석이거든."
그 조언은 없는 것보다 나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확실히 동팔은 한가운데로 던지지 않고 해민의 약점인 몸쪽 방향에 빠른 공을 던졌다.
'이대로 같은 공을? 아니면 유인구?'
상대가 강속구를 던질 수 있다는 압박감은 타자를 조급하게 만든다.
투수가 손도 쓰지 못할 강속구를 스트라이크 존에 통과시키면 타자는 멍하니 당하기만 한다.
미리 알고 휘둘러야 하지만 그걸 노리고 변화구를 던져 헛스윙을 유도할 수도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