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오력의 투수-41화 (41/325)

[41]

동팔이 선발 등판하는 날 온 사람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얼마만에 야구장이야. 몇 년 된 것 같다."

"저는 아내랑 데이트하러 온 이후로 처음입니다."

그들은 동팔이 일했던 회사 사람들이었다.

그와 얼굴을 직접 본 과장님을 포함하여 모든 직원들이 잠실구장을 찾아왔다. 동팔이 나간 후 새로 들어온 신입사원도 같이 있었다.

'선배님들한테 동팔 선수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지만… 설마 정말로 아는 사이?'

유명인과 잘 안다며 허풍을 떨어도 선배이자 상사였기에 믿는 척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동팔이 선발로 처음 올라오는 경기를 보러 오게 되자 이젠 허풍으로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연히 그들 중엔 민희도 있었다.

신입사원은 민희가 동팔과 애인 사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허풍이 심하다고 생각했다.

민희가 미인인 건 맞지만 그래도 젊고 유명한 야구 선수와 사귀기엔 모자라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로 야구장에 오게 되니 생각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한편, 기뻐하면서 일부는 혼란스러워 하는 그들을 보며 민희는 한 가지 비밀을 숨겼다.

'이미 시즌권을 오빠한테 받았는데… 말하면 좀 그렇지?'

일반적인 시즌권이라면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민희가 받은 시즌권의 좌석은 테이블석이라 불리는 두 번째로 비싸고 좋은 자리였다.

다만 같이 올 사람이 없어 한 테이블에 혼자 앉는다는 단점이 있지만.

민희는 테이블석의 시즌권을 받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자신의 말로 인해 그들이 고민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미 시즌권을 받았는데 굳이 일반석을 구매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그렇다고 동료들에게 테이블 석을 구매하라 하는 건 더 말이 안 되었다.

그러던 때 기적이 일어났다.

"오늘은 잘 보이는 테이블 석으로 가자고. 절반은 나랑 김 대리가 부담할 테니까."

"엑?"

나름 재력이 있는 과장과 회사에 있을 때 구박을 많이 했던 김 대리의 나름대로 사과의 표시였다.

김 대리의 경우, 동팔이 회사를 나오기 전에 앙금을 풀었고 그가 프로에 입단할 준비를 방법도 알려줬기에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마음이 완전히 풀리지 않아 동팔이 처음으로 선발 등판하는 이 날을 기다렸다.

그 두 사람이 냉큼 매표소로 가려고 하자 민희는 다급해졌다.

"저, 저기 저 테이블 석 시즌권 있어요! 오빠한테 받았어요!!"

이렇게 된 이상 굳이 자신의 좌석을 구매할 이유가 사라졌다. 그들이 괜한 표를 사기 전에 미리 말해서 불상사를 막았다.

모든 사람이 좋아하고 즐거워하며 경기장에 들어갈 때.

민희는 눈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자신보다 더 예쁜 그녀를 보고 민희는 설마 했다.

'응? 혹시…….'

하지만 사람들이 우르르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자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그들과 같이 갔다. 민희는 방금 전 스치면서 본 혜진에 마음이 격동되어 쉽게 안정을 찾을 수 없었다.

한편, 혜진은 자신이 구입한 좌석표를 보았다.

1루 쪽에 있는 좌석이었다. 홈팀인 RG의 더그아웃에선 잘 보이지 않는 곳이지만 어웨이팀인 오성에선 잘 보이는 자리였다.

들어갈까 말까 고민하던 혜진. 경기가 시작할 때까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던 그녀는 무언가 작게 중얼거리며 표를 찢곤 몸을 돌려 잠실구장을 떠났다.

동팔은 불펜에서 가볍게 공을 던지며 몸을 풀었다.

이미 구장 안에선 시구를 포함해 각종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잠실구장은 2만 7천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어 사직구장 못지않았다. RG와 우산 구단이 공동으로 홈구장으로 쓰는 곳이라 많은 관중들이 찾았다.

거기에 한국의 수도이자, 인구가 1,000만 명에 달하는 서울에 위치하고 교통이 편리한 잠실에 있었다.

오기가 편해 수용인원이 많음에도 자리를 충실하게 채우는 알짜배기 구장이었다.

동팔은 앞선 두 경기에 출전하지 않았지만 같이 있었기에 많은 관중에 익숙해졌다.

불펜에서 자신이 공을 던지는 것에 사람들이 집중해도 이제는 흔들리지 않았다.

변함에 놀란 사람은 동팔 자신이었다.

'사람은 적응의 생물이라더니…….'

사직구장에서 만원 관중의 시선을 받았기에 이 정도는 별 느낌이 오지 않았다. 다만 관중들이 너무 가까이 있었기에 얼굴이 잘 보인다는 점이 약간은 부담스러웠다.

공을 던지는 자신을 향해 사진을 찍는 건 아무렇지 않았다.

그러던 중 동팔은 익숙한 목소리에 저절로 고개를 돌렸다.

"동팔 오빠~ 우리 왔어요."

민희의 목소리. 수많은 목소리 사이에서 들렸지만 동팔의 귀에는 선명하게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민희를 포함한 전 회사 사람들이 어색하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테이블 석은 불펜이 바로 보이는 곳에 지나서 있었다.

테이블 석으로 가는 길에 그들은 동팔이 불펜에서 공을 던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일부러 돌아서 들어왔다.

동팔이 손을 흔들어 답하자 그들은 좋아하면서 가까이 왔다. 사람들도 동팔이 아는 사람들이 다가오자 길을 비켜주었다. 그들의 배려로 가까이 오게 되자 민희를 포함한 회사 사람들과 더욱 가까이 볼 수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동팔 씨."

"동팔 씨가 뭐야, 동팔 씨가. 이젠 강동팔 선수지. 안 그래?"

회사 사람들의 말에 동팔은 밝게 웃으며 말했다.

"편하게 부르세요. 이야기는 들었는데…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우리가 해야지. 이렇게 잘된 모습을 보고 우리가 얼마나 좋아했는데. 여기 김 대리는 더 좋아했어."

과장님의 말에 옆에 있던 김 대리는 애써 아닌 것처럼 했다. 하지만 얼굴이 민망함에 붉게 달아 오른 것은 숨길 수 없었다. 그들이 편하게 대화하자 신입사원은 확실하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로 아는 사이였어? 그리고 이 두 사람이 연인 사이?'

분명히 민희가 동팔을 부르자 그는 수많은 관중 사이에서 그녀를 바로 찾아냈다.

사랑의 힘이 아니고선 불가능한 일. 신입사원이 놀라는 사이에 그들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크흠… 과장님. 괜한 말은 삼가셨으면 합니다."

후배였다면 한 소리 했겠지만 상관이었기에 큰소리 칠 수 없었다. 아니꼬우면 먼저 입사해서 진급해야 했다.

"동팔 선수! 이번에 완봉! 파이팅!!"

시합을 준비해야 했기에 많은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가자 공을 받아주고 있던 불펜 포수 이진웅이 물었다.

"누구세요? 잘 아시는 분들이신가 봐요."

"응. 전에 있던 회사에서 같이 일했던 분들이야."

동팔의 말에 진웅은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동팔이 형, 정말로 재기한 것 맞구나…….'

동팔에 대한 이야기는 고교시절부터 귀가 따갑게 많이 들어왔다. 재기하여 돌아왔다는 말을 들었을 땐, 그냥 그런가 싶었다.

그 노력이 대단하다 생각했지만 그뿐이었다.

하지만 동팔이 재기하는 사이 회사에 다녔다는 것을 듣자 느낌이 새로웠다.

그동안 야구와 공부 그리고 집안일을 가끔 돕는 걸 빼면 다른 일을 해본 적이 없는 진웅.

그 외에 대부분의 프로야구 선수들도 그랬다.

가끔 사회인 야구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들어온 경우를 제외하면 동팔처럼 일반적인 직장생활을 한 사람은 코치들 중에서도 거의 없었다.

"동팔이 형. 정말 완봉하실 거예요? 완봉하면 우리로서도 좋지만."

선발투수의 완봉은 그때 쓰일 셋업맨과 마무리 투수의 투입을 없게 했다.

즉, 투수 자원을 아껴서 다음 경기에 부담 없이 쓸 수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지난 2연패로 인해 과부하가 걸린 RG의 투수 운용에 파란불이 켜지게 할 수 있었다.

전부 아슬아슬한 승부였기에 필승조까지 투입했지만 결과를 뒤집지 못해 타격이 더욱 컸다.

"완봉? 할 수 있으면 해야지. 그만큼 페이스 조절에 신경 써야 하겠지만."

2연패의 힘겨운 상황이지만 동팔의 존재만으로 RG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반면 오성에서는 동팔이 몸을 푸는 모습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살피고 있었다.

"불펜이라 그런지 전력으로 던지지 않네."

"구종도 다양하고 구속도 빠르니 대처하긴 쉽지 않지만… 그래도 안 뚜드려 맞는 건 아니지."

아무리 강속구를 뿌려도, 절묘한 제구의 변화구를 던져도 그 공을 때리는 타자들이 나온다.

메이저리그만이 아니라, 일본이나 한국 프로리그만 봐도 날고 기는 투수가 무너지는 일이 나왔다.

메이저리그에서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인 LA의 거쇼도 한 게임에서 3실점 이상 하는 일이 있었다.

처음에는 칠 가망성이 없어 보이는 동팔의 공이지만 그 정도에 겁을 먹으면 프로1군리그에서 뛸 자격이 없었다.

지금 당장은 공략법이 보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승리할 수 없는 건 아니다. 투수를 이길 수 없어도 상대팀을 이길 방법은 있었다.

"최대한 컨택한다는 생각으로 물고 늘어져. 그리고 투구 수를 늘리면 투수 교체를 안 할 수 없겠지."

야구는 혼자 하는 스포츠가 아니다. 투수의 비중이 크지만 엄연히 팀으로 하는 스포츠다.

오성에서도 평상시처럼 시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선발투수가 아니라 편하게 있던 남궁지완에게 한 사람이 다가왔다. 그는 국민타자로 인정받는 이승협이었다.

"지완아. 너 동팔이랑 이야기해봤나? 니랑 같이 고교에서 라이벌로 통했잖아."

지완과 비교하면 까마득한 대선배님이지만 평상시에도 항상 후배들을 잘 챙겼고 그도 예외가 아니었기에 세심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서 승협은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미 두 번의 시합을 했지만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을 보지 못했기에 한 말이었다.

그러자 지완이 말했다.

"그거야 과거 이야기죠. 이미 6년이 지났는데……."

지완이 동팔에게 먼저 다가갈 일도, 그가 먼저 다가올 일은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지완이 동팔의 애인이었던 혜진을 데려간 장본인이니까.

서로가 껄끄러운 관계였다. 다른 사람에게 알릴 수 없는 지극히 사적인 일이었다.

"라이벌이었지만 동팔이가 다쳐서 많이 안타까웠는데 잘 됐죠. 나중에 서로 맞붙을 날이 기대되는데요."

지완의 말에 다가온 사람이 말했다.

"그렇지. 전에는 지완이가 한 끗 차이로 졌지. 그래서 프로에서 실력을 길러 정정당당하게 꺾을 준비를 했는데 부상으로 나가떨어졌으니 얼마나 허탈했겠나."

절대로 악의로 한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실이었다.

라이벌이라고 했지만 그건 순위에 의한 라이벌이었을 뿐, 당시 두 사람은 인지도와 실력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그러나 승협의 그 말이 지완의 신경을 건드렸다.

하지만 상대가 엄청난 대선배님이라 어떻게 하지 못하고 그냥 농담으로 받아 넘겼다.

"네. 그렇죠. 이제 확실히 꺾겠다 싶었는데 혹사로 인해 나가떨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이젠 아니죠. 다시 동등한 선발로 붙을 수 있으니 좋습니다. 기대되는데요."

"그래. 그 마음이다. 니도 알다시피 프로에선 구위만 좋다고 다 승리하는 게 아이다. 동팔이에게 없는 프로 경험을 넌 6년 동안 쌓아 왔으니 그건 절대로 무시 못 하지. 이전과 확실히 다르다는 걸, 언젠가 붙으면 확실히 보이면 그만이다."

그리고 이승협은 다른 선수들에게 찾아가 조언하며 도움을 주었다.

프로이자 대선배이면서 여전히 기량을 유지하고 있는 그의 말은 선수들은 물론 코치들도 좋아한다.

남궁지완도 그랬다. 방금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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