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오력의 투수-40화 (40/325)

[40]

"연패 끊는 거에 신경 쓰지 마. 동팔아. 넌 그냥 네가 잘 할 수 있는 것만 하면 돼. 야구는 혼자 하는 게 아냐."

"네. 감독님."

"연습에 무리하지 말고 컨디션만 조절하면 된다. 어차피 초반에 강속구를 뿌릴 것도 아니잖아. 그렇지?"

"네. 알고 있습니다. 페이스 조절에 신경 쓰겠습니다."

"그거면 충분해. 혹시 부탁할 거라도 있어? 첫 선발인데 가족분들 다 오시겠네?"

당연히 그랬다.

오성에서 방출된 이후, 동팔이 마음 고생하는 것을 바로 옆에서 본 사람이 그의 가족이다. 그러니 그가 첫 선발 등판하는 것을 직접 보고 싶어 했다.

이건 동팔을 5선발로 한 작은 이유이자 배려였다.

집이 서울인 이상, 가족들이 오기 편한 곳에서 동팔을 선발 등판시킨 것이다.

"네.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더 힘내야겠다. 표는 구하셨고?"

"그건 확인 못 했습니다."

"그래? 그렇지 않아도 구단에서 네 가족 분들에게 시즌권 발급되었거든. 혹시 표를 구하셨으면 환불하시고 시즌권 받으시라고 전해 드려. 구장에 있는 사무실에 들르시면 바로 발급될 거야."

시즌권 하나의 가격은 좌석마다 다르지만 적어도 45에서 60만 원이다. 부모님과 누나까지 적어도 135만 원 이상의 선물을 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동팔이 받는 연봉에 비하면 많은 돈은 아니다. 하지만 일반 가정에서 쉽게 지출할 수 없는 규모인 것도 사실이다.

동팔에게 있어서 돈의 규모는 중요하지 않았다. 구단에서 자신을 세심하게 배려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마음을 더욱 RG를 향하게 만들고 있었다.

한편, 오성에서는 동팔에 대한 자료를 모아 분석하고 있었다.

"이전 자료는 완전히 쓸모없습니다. 고교 때의 기록은 6년 전이고 재활했을 때의 기록이 남아 있지만… 완전히 재기한 이상 의미가 없어요."

"가능한 건 로데전에서 던진 15개의 공이 전부인데… 까마득하네……."

분석하고 싶어도 알려진 것이 없으니 한계가 있었다.

그 와중에 김진수 코치는 그제 있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작년에도 마주치는 것이 껄끄러웠던 동팔이었지만 지금은 더욱 껄끄러웠다.

'내가 그때 동팔이 말을 받아들이기만 했어도…….'

당시에는 궁지에 몰린 동팔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니 구단에서 동팔을 지목하기 시작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김진수 코치는 가슴이 철렁거렸다.

'설마 정말로 회복한 건가?'

하지만 그때는 확인되기 전의 일.

구단에서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던 때였다. 오히려 동팔의 의료 기록을 가지고 있었기에 더욱 다가갈 수 없었다.

의학적으로 완벽하게 재기할 수 없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당시의 오성은 리그 성적이 좋지 않아 절치부심으로 칼을 갈고 있었다.

그러니 확신할 수 없는 선수에 돈을 쓰기보다 이미 완성되어가는 선수를 영입하는 데 자금을 투입했다.

자연스럽게 동팔에 대한 영입도 무산되었다.

그런데 웬걸. 그 강동팔이 회복을 하고 재기한 것도 모자라 160킬로의 강속구를 뿌리고 있었다. 그것도 폭투가 아니라 깔끔하게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는 강속구였다. 거기다 강타자로 인정받는 임아섭을 삼구삼진으로 돌려세웠다.

뛰어난 투수가 아군이라면 무엇보다 듬직하지만 상대팀에 있다면 그만큼 성가신 존재도 없었다.

투수의 단점을 파악하고 공략하기 위해 분석하는 것이 코치의 역할 중 하나다.

하지만 김진수 코치가 걱정하는 것은 동팔의 분석이 아니었다.

'작년의 일을 발설하면 난… 완전히 끝…….'

동팔이 자신을 만나러 왔다는 것은 두 사람만 알고 있었다. 특히 구단에서 둘이 만났다는 것을 아는 건 본인 이외에 없었다.

좋은 기회를 선입견으로 날린 건 구단도 예외는 아니지만 동팔을 놓친 모든 책임을 그가 질 수도 있었다.

'다시는 선입견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아야지…….'

이런 경우가 아주 희귀하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후회는 늦었다.

이번 RG와 오성의 첫 경기 때, 두 팀의 선수와 코치들이 마주치는 것은 필연.

동팔이 원한을 품고 그때 만났던 것을 말하는 순간 김진수 코치의 야구 인생은 끝날 수 있었다. 하지만 동팔과 마주쳤을 때, 그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5년만이네요. 잘 지내시죠?"

작년에 틀림없이 거부로 인해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동팔은 그 일을 꺼내지 않았다. 김진수 코치는 그런 동팔이 너무 고마웠다. 동시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나이도 어린 녀석이 날 이렇게 배려해주는데 나란 놈은 정말…….'

그때 김진수 코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럼… 잘 지내지. 너도 잘 돼서 정말 다행이다. 이거 끝나면 내가 단단히 한 턱 쏠게. 그리고… 고맙다."

말 한마디에 자신을 묻을 수 있음에도 용서한 동팔이야말로 생명의, 인생의 은인이 아니고 누구일까.

하지만 김진수 코치는 몰랐다. 동팔이 작년 일을 눈감아준 진짜 이유를.

김진수 코치와 만나던 그날 아침에 동팔은 민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오빠. 오늘 오성이랑 경기 있잖아요. 그럼 그때 김진수 코치님도 만나죠?

"그렇지."

―그럼 오빠, 작년에 있던 일은 모르는 척하고 넘어가주세요. 그러는 게 오빠한테 더 좋을 거예요.

솔직히 말해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무시한 사람에게 무시로 대응하는 것도 좋지만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주는 쾌감도 나쁘지 않으니까.

민희가 말했다.

―물론 오빠의 말을 듣지 않고 거부한 건 저도 화가 나요. 오빠는 오죽하겠어요? 하지만 그러면 나중에 오빠한테 좋을 것이 없어요. 기분을 풀면 뭐 해요? 잠시 좋은 걸로 끝나지만 그 코치는 직장에서 잘릴지도 모르는데요. 잘못하면 원한을 얻게 될 수 있으니까 가능한 덮고 가는 것이 좋아요. 이참에 빚을 만들어두면 나중에 오빠한테 좋을 일이 있지 않겠어요?

듣고 보니 그랬다.

동팔은 솔직히 오늘 그날의 일을 말하려고 했다. 난감해 하는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하긴… 내 기분 좋자고 일자리를 잃게 할 수는 없으니… 실수 한 번 한 것에 실직하면 그것도 많이 과하지?'

이미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거절한 것에 후회하고 있을 것이 뻔했다.

그 생각을 하던 때, 민희가 이어서 말했다.

―결정은 오빠가 하세요. 어차피 이 일의 결정권은 오빠한테 있으니까요. 그래도… 웬만하면 좋은 쪽으로 갔으면 좋겠지만…….

민희의 부드러운 설득에 동팔은 마음을 돌렸다.

"알았어. 충고 고마워."

그리고 동팔은 민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공을 던지는 걸 알려주는 코치님은 많은데 인간관계의 코치님은 너밖에 없다. 앞으로 종종 이런 일이 생기면 부탁할게."

같이 회사 생활을 할 때도 느낀 점이다. 한 살 어리지만 인간관계에 있어선 자신보다 뛰어나고 부드럽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자신의 주장을 확실하게 말하면서 사람들의 기분을 나쁘게 하지 않는다. 덕분에 RG와 계약 때, 능숙하게 하지 않았던가.

동팔의 칭찬에 민희는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뭐, 이 정도 가지고 코치라뇨… 그리고… 오빠도 뛰어난 점이 있어요. 사람들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는 거요. 사실 그거 할 수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거든요. 조언이나 충고를 들으면 오히려 화를 내는 사람이 더 많아요.

서로에 대한 덕담과 칭찬을 이어가다가 민희가 출근 준비로 바빠지자 통화는 마무리되었다.

그 결과가 바로 김진수 코치와의 올해 첫 만남에 나타난 것이다.

시간이 지나 저녁 6시.

RG와 오성의 주중 마지막 경기.

스윕이 되느냐 아니면 1승이라도 챙기느냐가 달렸다.

하지만 지금 잠실 구장에 오는 RG의 팬들은 다른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오늘 강동팔이 처음으로 선발 등판하는 날이지?"

"얼마나 잘 던질지 모르지만… 적어도 연패를 끊어주지 않을까?"

모두 로데전에서 동팔이 보여준 위력적인 공을 기억하고 있었다. 연패 중이지만 RG의 팬들의 걸음은 생각보다 가벼웠다. 그래도 걱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프로 첫 선발이라 긴장해서 실수하지 않겠지?"

"사실 그것만 빼면 거의 승리 확정인데. 그래도 요즘 RG타선에선 개막부터 어떻게든 점수는 내고 있잖아. 그럼 강동팔이 어떻게든 틀어막으면 되겠지."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입장하는 RG의 팬들.

그들 중에는 커다란 현수막과 푯말을 든 사람들도 있었다. 바로 동팔과 같이 야구를 했던 아마 야구팀 스틸러스와 우랑우탄의 선수들이었다.

그들은 가져온 현수막과 푯말을 보면서 말했다.

"이 정도면 잘 보이겠지?"

"하모예. 당연히 잘 보일 겁니더. 카메라가 딱 하니 비춰주지 않겠습니꺼?"

"아니, 카메라 말고 동팔이 눈에. 더그아웃에서 잘 보여야 하는데. RG가 앉는 쪽에서 반대편에 앉아야 하니까 어디가 좋으려나……."

"보통 홈팀이 1루쪽 더그아웃을 쓰니 좌익수 있는 곳으로 가는 게 맞겠네요."

그들은 관중석 중 제일 싼 외야 쪽의 티켓을 구입했다.

그들과 달리 이미 동팔에게 연락을 받은 부모님과 누나는 사무실에서 시즌권을 받았다.

그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시즌권을 주면서 직원이 말했다.

"이번에 강동팔 선수가 처음으로 선발 등판하니 종종 카메라가 비춰질 수 있습니다. 괜찮으시겠어요?"

강동팔의 이야기는 야구를 좋아하지 않은 일반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 그의 인간극장 같은 재기 스토리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다.

그런 와중에 가족들의 모습이 보인다면 그 효과는 극대화될 것이다.

시즌권을 공짜로 받아서 기분이 좋아졌는데(그 전에 동팔이 선발로 등판했다는 것 자체만으로 좋았다) 역시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것을 알자 조금은 가라앉았다.

'역시나 세상은 만만치 않아.'

'얼굴 조금 팔리는 걸로 이 정도면 나쁘지 않지만…….'

'그래도 뭔가 속은 느낌이…….'

그래도 시즌권조차 받지 못하고 방송국 카메라에 찍히는 것보다 나았다.

다만 엄마와 누나는 걱정이 생겼다.

"이럴 줄 알았으면 화장을 제대로 하고 나올 걸 그랬다."

"그러게. 엄마. 대충하고 나왔는데 전국에 얼굴이 방송되면 어떡해?"

두 모녀(母女)의 말에 아버지는 절로 몸이 떨려왔다.

'화장에만 몇 시간을 쏟아부은 사람들이 무슨!!'

하지만 그 말을 내뱉을 용기는 없었다. 특히나 동팔의 누나가 조퇴까지 하며 화장에 심혈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았으니 말이다.

그들의 모습에 직원은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오늘은 특별히 VIP석으로 준비했습니다. 그 자리는 보통 선발투수 가족 분들이 앉는 자리거든요. 그러니 부담 가지지 마시고 편하게 앉아서 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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