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오력의 투수-28화 (28/325)

[28]

"차라리… 계약을 하지 않았으면…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지도……."

야구를 하지 못하는 현실을 원망했다. 다른 사람의 실수로 인해 자신의 재능이 짓밟히고 꺾였다는 현실이 너무 괴로웠다.

투수로서 성공했을 자신의 모습과 회사에서 구박받는 모습을 비교하면 절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혜진이 헤어지자고 했을 땐, 세상이 무너졌고 모든 것을 잃었다 생각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족들이 있었고 당시에는 사귀지 않았지만 든든하게 지원해 주는 민희가 있었다.

언제나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더라도 소소하게 살아가며 행복을 거두었을지 모른다.

당시에는 몰라도 결국엔 민희와 이어져 생각보다 빠르게 결혼에 골인하고 함께 돈을 모아 카페를 같이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과거에 선택할 수 있는 이야기.

지금은 철저히 조건적인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었다. 그리고 과거의 그가 원하던 대로 투수로서 재기하고 있었다.

동팔은 고개를 흔들며 생각을 정리했다.

'됐어. 후회해서 뭐해? 그냥 돌이갈 길이 없다는 것뿐이잖아. 도망칠 길이 없다는 것뿐이잖아?'

철저한 배수진이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죽는다. 그러니 나아가야만 한다. 제한된 시간 이내에 자신을 위해서. 자신과 함께하는 사람들이 슬퍼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동팔은 각오를 다지며 두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한 달 후.

동팔은 구단에서 말한 대로 준비했다.

그리고 스프링캠프에 가기 전, 동팔은 1군 선수들과 처음으로 만났다.

2군과 달리 1군에 있는 선수들은 강동팔보다 선배이며, 나이도 많은 사람이 많았다. 동팔은 깍듯이 고개와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입단한 강동팔입니다."

그의 등장에 1군 선수들이 그를 반기며 말했다.

"우리 모두 동팔이 이야기는 기사로 봤어."

"여, 재기의 인간 극장."

"말로만 들었는데 정말이었네. 이제 정말 다 나은 거야?"

"재기해서 다행이다."

같은 구단의 선수이기도 했지만 5년 전의 일은 그들도 그냥 있지 않게 만들었다. 동팔이 겪은 일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 아주 끔찍한 일이란 건 같은 선수인 그들이 더 잘 알았다.

이렇게 보란 듯이 재기하고 돌아오니 안 좋을 수가 없었다. 물론 투수들 입장에선 뛰어난 투수가 들어오면 경쟁에서 밀리기에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동팔이 없더라도 그들끼리 경쟁은 항상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뛰어난 투수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리그 중간에 자신이 감당해야 할 부담이 있느냐 없느냐로 갈라진다.

몸의 부담의 차이는 곧 부상 확률과 이어진다.

지친 상태에서는 공이 예상치 못한 곳으로 날아왔을 때 피할 확률이 줄어든다. 피곤한 상태에서 맞으면 부상은 더 심하다.

경쟁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같은 부담을 공유하는 동지가 뛰어나면 자신들에게도 큰 도움이 된다는 걸 그들도 잘 안다.

투수 중에서 나이와 경력이 제일 많은 강중근이 나와서 동팔을 챙겼다.

"캠프는 처음이지? 짐이랑 여권 잘 챙겼어?"

"네. 코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미 다 처리했습니다."

"잘했다. 어차피 같은 비행기로 가니까 다 같이 가면 돼. 짐은 어떻게 하는지 알아? 혹시 공항이 처음?"

"국제선은 처음입니다."

"그럼 됐어. 짐은 국내선이나, 국제선이나 처리하는 건 같으니까. 나머진 우리들이랑 같이 가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

그러다 한 선수가 물었다.

"동팔아. 그런데 너 국제선이 처음이라 그랬지? 그럼 LA에 가는 것도 처음이겠네?"

"네. 그렇습니다."

동팔의 대답에 그가 말했다.

"그럼 각오 단단히 해라. 11시간 동안 비행기 타고 가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으니까."

12시간 후.

단순 비행에만 11시간이었고, 수속을 밟으며 기다리는 시간이 1시간 걸렸다.

LA에 도착한 동팔은 이미 기진맥진하고 있었다.

'가만히 있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물론 11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 있던 건 아니었다. 이륙하고 안정적인 고도에 들어간 다음은 자리에 일어나 기내를 살짝 돌아다녔다.

아무리 넓은 비행기라도 넓이에 한계가 있어 갈 수 있는 곳은 제한적이다. 좀이 쑤시다고 계속 움직일 수도 없었다. 이미 선배들 중에는 시차 적응을 위해 안대를 하고 자는 사람도 있었다.

모든 것이 처음이라 어색한 동팔은 기내에서 보여주는 영화를 보다가, 멍하니 앉아 있다가, 잠시 일어나 몸을 움직인 후 다시 앉았다.

지루함을 뒤로하고 싶어도 다시 앞에 있는 지루함에 지쳐갈 무렵에 겨우 잠에 들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LA에 도착했다.

결국 지루함과 여독, 졸음에 지친 상태로 비행기에 내렸다.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기에 숙소까지는 편히 도착할 수 있었다.

각자 지정된 방에 도착한 선수들은 바로 훈련에 들어가지 않았다.

"오느라 지쳤으니 오늘은 쉰다. 사고 치지 말고 도박 금지."

코치는 그 이후로 주의해야 할 사항에 대해 선수들에게 말한 다음, 각자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이게 했다. 갑자기 생긴 휴식과 자유 시간에 동팔은 뭐를 해야 할지 몰랐다.

최고참 선수들은 각자 숙소에 들어가서 쉬든가 아니면 간만에 온 이곳에서 미리 계획한 대로 움직였다.

동팔을 포함하여 처음 온 신인 선수 세 명은 그와 같은 상황.

그러던 중에 고참 중 다섯 명이 와서 말했다.

"너희들 뭐 해야 할지 모르는 구나? 하긴. 여기 온 건 처음이니 어쩔 수 없지만."

"혹시 영어 잘해? 그러면 모처럼 미국에 왔으니 좀 돌아다녀 봐. 사람 사는 곳이 다 똑같으니까 어려워할 이유는 없어."

주전 유격수인 임지환, 포수 김강수와 최병진, 외야수 황치선과 김용진이었다.

어색한 분위기지만 그들은 처음 온 신인과 같이 갔다.

처음 온 신인들이라 고참과 함께하는 것에 어색했지만 미국이라는 외지가 더 어색했기에 떨어질 수 없었다.

그 와중에 동팔은 미국에 빨리 적응하고 있었다.

그가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다른 선수들에게 없는 단 하나의 능력 때문이다.

"우와~ 동팔아. 너 진짜 영어 잘한다."

"거의 현지인 수순인데?"

외국에서 말이 통한다는 것은 주변에 있는 모든 정보를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 그러니 길을 잃어도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거나, 표지판을 이용하여 찾을 수 있었다.

범죄에 갑자기 연루되면 방법이 없지만 이건 현지에 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라 비교가 무의미하다.

처음에는 다섯 고참이 주도했지만 그들도 처음 가는 곳에선 동팔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그러다 그들은 우연히 한 곳을 보게 되었다.

"와~ 저기 다저스 스타디움이다."

한 사람의 말에 나머지 사람들도 전부 커다란 야구장을 보았다.

"이야~ 진짜 크다. 언제 봐도 질리지가 않네."

"우리도 언젠가 저기서 야구하는 날이 올까?"

"글쎄. 그게 가능한 쪽은 투수랑 타자가 전부잖아. 걔네들도 용병 쓰는 곳은 우리랑 똑같지 뭐."

그 말에 다른 사람도 고개를 끄덕였다.

야구에서 중요한 전력은 공을 던지는 투수 그리고 공을 치는 타자다.

수비능력도 중요하지만 그 정도는 국내 출신의 선수들만으로, 또 팀의 훈련으로 수급이 가능하다.

한국 야구리그에서 실책이 나오긴 하지만 그건 메이저리그도 마찬가지다. 실책은 훈련은 물론 운의 요소가 강하게 작용하는 쪽이라 불규칙적이다.

하지만 투수와 타자는 아니다.

운도 있어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순수한 실력이다. 실력은 타고난 재능과 노력으로 결정된다.

노력은 어떻게 해서든 할 수 있지만 재능은 타고나야만 했다.

그러니 외국 선수라도 실력이 중요한 투수와 타자에 재능 있는 선수를 영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원하지만 자신의 포지션으로 인해 갈 수 없는 선수들은 애초에 기대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동팔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생각이었다.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동팔은 숙소에 돌아가기 전 다저스 스타디움을 보며 생각했다.

'꼭 저 팀일 순 없겠지만 반드시 저곳에서…….'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동팔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단순히 살아남는다는 것을 넘어 그가 이전부터 바라던 열망과 갈망으로.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칼을 갈아라

스프링캠프에서 기본적으로 키우는 것은 체력이다.

한 시즌 동안 진행되는 경기는 144경기. 한 팀은 다른 팀과 각각 16번의 시합을 가지게 된다. 월요일은 쉬고 올스타 브레이크 때 한 번 쉰다.

그 이외에는 항상 경기가 있었다. 그러니 틈틈이 계속 훈련하며 몸을 더 향상시키거나 유지해야 했다.

아무리 야구가 체력을 많이 쓰지 않는 운동이라 하더라도 막상 시즌이 진행되면 그렇지 않다. 야구만이 아니라 이동하는 데 생각보다 많은 체력이 소모된다.

당연히 체력이 점점 떨어지게 되면 실책이나 부상이 일어날 확률이 올라간다. 그리고 슬럼프가 찾아오게 된다.

슬럼프의 주기가 오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유일한 방법은 슬럼프에 빠지거나 체력이 떨어졌다는 것을 알고 2군에 보내 체력을 회복시키는 것. 그러면 정교한 코치와 훈련으로 슬럼프를 빠져나온다.

선수가 할 수 있는 것은 활동하는 주기를 최대한 길게 가면서 슬럼프에 빠진 기간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 전부다.

기본에 체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

감독의 입장에선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체력이 떨어지는 선수는 기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체력을 제대로 기를 수 있는 시간이 바로 지금 하고 있는 스프링캠프였다.

"빨리 뛰어 이것들아. 시간 이내로 커트 못하면 다시 한국으로 돌려보낸다."

처음에는 체력 측정을 위한 오래달리기였다.

트랙을 8바퀴 돌게 하면서 심폐기능을 향상시킨다. 오기 전에 진행한 체력 테스트를 통과한 선수들만 여기에 올 수 있었다.

오래달리기를 다시 하는 것은 그사이에 긴장을 풀었을 마음을 다시 바짝 조이기 위해서다. 또한 실제적으로 체력을 기르기 위한 것이다.

"하아… 하아……."

동팔은 달리기에 숨이 차오른다. 그래도 젊은 나이에 군살도 없었고 이미 극한의 훈련으로 힘은 물론 체력까지 올라온 상태.

덕분에 동팔은 팀에서 세 손가락 안으로 골인할 수 있었다.

이후에 숨을 돌리며 몸을 다시 풀고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갔다.

휙~ 퍽!!

동팔이 던진 공이 정확히 포수 미트로 들어갔다. 동팔의 구속이 스피드건을 통해 표시되었다.

[158km/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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