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오력의 투수-21화 (21/325)

[21]

"아, 저기… 오랜만입니다…만 성함이 어떻게 되셨죠?"

그때는 사랑했던 연인과 헤어진 충격과 취해 있던 터라 경황이 없었다. 당시에는 꿈인 줄 알았지만, 지금은 분명히 현실임을 알았다.

그런데 그 악마가 사람들이 많은 한복판에 나타날 줄은 몰랐다. 하기야 악마가 사람들이 많은 곳을 피한다는 것도 잘못된 인식일 수도 있었다.

"스크레이치라고 하네. 내가 누구인지 자네가 잘 알고 있으니 더 설명할 필요 없겠지?"

"네……."

모를 수 없었다.

적어도 그가 악마라는 것. 5년 후, 자신의 영혼을 가져갈 존재라는 것. 그리고 지금의 자신을 있게 만들어준 존재라는 것도.

"이야기를 하자고 하셨죠?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오신 겁니까?"

"별다른 이야기는 아니야. 지금 좋은 기회가 있는데… 왜 잡지 않고 의리를 선택했는지 묻고 싶어서 그래."

다른 사람 그리고 존재였지만 같은 질문만 세 번을 받았다. 이제는 살짝 지겨워질 질문.

하지만 이번에는 전과 달리 속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가 악마임에도 불구하고.

"약속을 저버리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몸값이든 뭐든 상관없이……."

어머니께 그리고 사장님과 다른 사람에게는 조금만 더 기다려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겠다고 말했다. 그래야 그들이 동팔의 기다림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악마는 그의 본심을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런가? 하지만 지금 자네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아. 그걸 알면서도?"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둘만이 아는 비밀. 제약이었다.

그러자 동팔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원래대로 돌아왔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제일 빠른 길이란 것도 알고 있죠. 제일 중요할 그때에 발목 잡히지 않으려면 지금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것을."

자신의 상황이 좋지 않음에도 맑은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동팔을 보자 악마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이번 나의 선택은 꽤 좋군. 이렇게 팔딱거리며 신선한 영혼을 둘이나 계약할 수 있다니… 올해는 꽤나 운이 좋아."

악마의 말에 동팔은 한 단어가 걸렸다.

'둘? 그럼 나 말고 다른 사람도……?'

동팔이 그 생각을 할 때, 악마가 말했다.

"과연 언제까지 그리고 어디까지 상황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을 지켜 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건투를 빌지. 다른 무엇도 아닌, 나의 즐거움을 위해서 열심히 발버둥 쳐 보게. 그런데. 혹시 궁금한 것 있나?"

그의 말에 마침 동팔은 꼭 물어보고 싶은 것이 떠올라서 말했다.

"전에 회복의 부작용이 있다고 하셨죠? 그럼 그 부작용은 회복이 되는 양만큼 고통스러운 겁니까?"

그의 물음에 악마가 답했다.

"설마 회복하는 데 아무런 고통도 없이 자는 사이에 나아질 거라 생각했나?"

"솔직히 그런 거라 생각했습니다."

동팔의 말에 악마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어쩔 수 없네. 거저 얻는 것은 없는 법이야. 철저한 등가교환이 있어야 해. 회복하는 만큼 고통이 있다. 이것은 회복하는 과정에 일어나는 거라 어쩔 수 없어. 하지만 다른 사람의 경우, 아프기만 할 뿐. 낫지 않지. 그것보다 훨씬 나을 텐데?"

솔직히 악마의 말을 듣고 속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나쁠 것은 없었다. 만약 자신이 덜 훈련을 하게 되면 그만큼 회복의 양이 줄어들고, 자연스럽게 고통도 줄어든다.

즉,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처음 그 회복은 어떻게 된 거죠? 그 부상이라면 분명히 회복하는 데 엄청난 고통이 뒤따랐을 텐데."

자신의 어깨와 등 근육은 혹사로 인해 망가졌다.

인대가 회복하는 데 느껴진 고통이 인두로 지지는 것과 같은 고통이었고, 고된 훈련을 하고 난 다음 느낀 고통은 근육에 경련이 일어난다.

그럼 당연히 끊어진 근육이 회복하는데 느끼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할 터.

그러자 악마가 답했다.

"그래서 그때, 자네의 의식을 끊었지. 이미 술에 취해 있으니 더 쉬웠고.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자네는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고 쇼크로 죽었어."

악마의 말에 동팔은 그때, 일요일이 사라진 이유를 알았다.

의식이 멀쩡한 상태에서 배를 가르고 수술을 하면 환자는 죽는다. 하지만 같은 수술이라도 마취를 하고 하면 결과는 정반대가 된다.

의식을 완전히 잃은 그 사이, 동팔의 몸이 완전히 회복하는데 고통스럽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악마는 또 하나의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그리고 원래라면 무릎이 회복되었을 때에도 하루 만에 나아야 해. 그것이 내가 준 회복의 위력이니까. 하지만 자네는 너무 아픈 나머지 그것을 거부했고, 결국엔 사흘 동안 나눠서 회복이 되었지."

악마의 말에 동팔이 설마하며 물었다.

"그럼… 회복력을 제가 조절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그렇다네. 단, 어느 정도에 한해서야. 완전히 멈출 수 없어. 회복의 최소 비율이 정해져 있으니 알아두게."

악마가 몸을 돌리면서 동팔에게 말했다.

"그럼 자신이 받은 능력에 대해서도 알았으니… 최대한 잘 사용해 보게나."

그리고 악마는 그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자 동팔은 그제야 현실의 감각을 느꼈다.

자동차가 도로 위를 달리는 소리, 사람들이 지나가는 느낌. 그리고 차가워진 밤공기가 피부로 다가왔다.

방금 전, 악마와의 만남으로 동팔은 자신의 능력을 알았다. 그리고 또 다른 것도 알게 되었다.

'둘…이라. 올해에 둘이라면 작년이나 재작년에도 계약을 한 사람이 있다는 거겠지? 숫자는 몰라도…….'

자신만 악마와 계약을 해서 능력을 얻었다면 생각보다 수월하게 목적을 이룰지도 모른다.

하지만 경쟁자가 있다는 건 그만큼 어려워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동지가 되면 좋겠지만… 그게 안 된다면… 성가시겠어. 나와 같은 능력을 받았다는 보장도 없으니,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도 모르겠고…….'

그 걱정에 절로 머리가 복잡해졌다.

하지만 동팔은 단순하게 생각했다.

"지금은 그 생각하지 말자. 지금 생각해봐야 무용지물. 나중에 만나게 되면 그때 생각하면 되겠지. 지금 중요한 것은… 첫 단추를 잘 꿰는 것뿐이니까."

한편, 지아 구단의 2군에서는 젊은 선수가 타격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의 눈은 매와 같이 빛났고, 자신의 앞에 있는 피칭머신을 보고 있었다.

2군이라도 프로에서 쓰는 머신이었기에 시속 160킬로 이상의 속도가 가능했다.

그는 자세를 잡고 공이 튀어 나오는 구멍에 집중했다. 그리고 기다리던 대로 공이 튀어 나왔다.

쉭~!!

타자는 날아오는 공의 속도를 이미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160 이상의 강속구를 쏘도록 설정했으니 모를 수 없었다. 공은 입력된 대로 공을 쏘아 보냈다.

만약 공이 잘못 날아가 머리에 맞는다면 뇌진탕으로 인해 기절할 것. 당연히 부상의 위험이 아주 높았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빠른 속도 그 자체.

프로 1군에서도 시속 160의 공을 던지는 투수가 많지 않다. 있다면 제구력을 떠나 그 자체로 집중을 받을 것.

150의 구속도 빨랐지만 160의 경우, 느낌이 다르다.

투수의 손을 떠났을 때, 이미 코스를 예상하고 방망이를 휘둘러야 겨우 맞출 수 있는 속도.

하지만 지금 타석에서 연습하는 타자에게는 아니었다.

구속이 160인 공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공이 어느 방향으로 회전하는지 파악했다.

동시에 어디로 공이 향하는지 파악도 끝났다.

남은 것은 뇌에서 신호를 보내어 방망이를 휘두르는 것.

만약 그가 평범한 타자였다면 아무리 뛰어난 1군의 타자라도 공을 칠 수 없다.

공의 궤적을 아는 순간, 이미 늦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으로 파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방망이는 빠르게 공으로 향했다.

쾅!!

방망이에 맞은 공은 큰 소리를 내며 넘어갔다.

그 모습을 보던 타격 코치가 박수를 치며 다가왔다.

"우와. 한동욱이… 대단하네. 160인데 그걸 쳐? 아무리 피칭머신이라도?"

피칭머신이라고 항상 같은 코스로 던지는 것이 아니었다. 공의 회전 방향을 다르게 해서 날아오는 궤적을 다르게 했다.

물론 160 이상의 속도는 어디로 갈지 몰라 위험하기에 잘하지 않는 훈련.

하더라도 안전한 코스로 날아가도록 자리를 잡고 훈련한다.

타격 코치의 말에 한동욱이 말했다.

"아직 멀었습니다. 방금 전에 타격점이 조금 어긋났어요. 잘 맞았으면 안타가 아니라 홈런일 겁니다. 그리고 배트 스피드도 더 끌어올려야 하고."

그의 말에 타격 코치가 그의 등을 시원하게 치면서 말했다.

"자식아. 이미 지금도 훌륭해. 1군에 바로 올라가도 된다니까? 넌 강속구의 대처도 좋지만 변화구의 대처도 잘 하잖아. 그리고 모자란 점이 느껴지면 계속 훈련하면 되는 거고."

그러면서 그는 아주 중요한 소식을 그에게 전했다.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만… 조만간 1군에 올라갈 것 같아. 사실 내 생각으론 지금 당장이라도 보내고 싶은데, 그게 맘대로 안 되잖아. 1군에 슬럼프에 있는 타자가 언제 회복할지 모르고, 이왕이면 이전부터 보증된 선수를 쓰고 싶어 하는 건 감독들의 병이야 병.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팀이 계속 어려우면 결국에 감독님도 생각을 바꾸시겠지."

"말씀 감사합니다. 특별히 답답하던가 하는 생각이나 감정은 없어요. 언젠가 때가 오면 그 기회를 잡을 실력을 키워야죠."

"그렇지. 말 잘했다. 넌 이미 1군에서 잡을 실력은 되니까 괜히 무리해서 부상이나 당하지 마. 알겠지? 안 그러면 시작도 하지 못하고 끝난다. 그 강동팔이처럼. 그럼 어머니 호강시키는 것도 물 건너가."

타격 코치의 말에 한동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그건 항상 주의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위험하면 안 치고 피할 거거든요. 1군에서도 그럴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해야죠."

"그래? 그럼 계속 그렇게 해서 훈련해. 그리고 횟수 넘어가면 쉬고, 몸 풀어. 나중에 마무리하면 웨이트 트레이닝도 하고. 내가 봐줄 테니까. 그때 되면 와라. 알겠지?"

"네."

타격 코치는 다른 선수들을 봐주기 위해 떠났다.

잠시 쉬는 동안 한동욱은 한 사람을 떠올린다.

'엄마… 나 이제 1군이래. 당장은 아니지만…….'

그의 가정은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다.

없는 살림에 야구를 한다는 것은 사치였다. 기구가 비싸고 그에 따라 각자 부담해야 할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그의 홀어머니는 아들인 동욱이 하고 싶다는 야구를 하게 해주기 위해 쉬지 않고 일을 하셨다.

그 모습에 동욱은 죄송스러웠고, 누나와 여동생의 원망과 질타와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집안도 어려운데 무슨 야구를 하냐는 것은 기본으로, 집안이 어려우니 도와야 한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그러나 야구에 대한 열정과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자 더 멈출 수 없었다.

군대에 빨리 갔지만 그곳에서도 타격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신병 때는 눈치와 온갖 구박을 당하면서 보이지 않게 훈련했고, 상병이 되고 병장이 되어서는 간단한 기구를 만들어 몸을 만들었다.

그리고 늦깎이지만 23살에 2군에 들어왔고, 이젠 1군 무대를 노릴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무엇보다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해준 어머니를 떠올리며 각오를 세웠다.

'조금만 기다려줘. 엄마가 그렇게 바라던… 엄마 아들이 TV에 나와서 잘하는 모습을 보게 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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