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오력의 투수-9화 (9/325)

[9]

하나의 절망과 또 다른 하나의 희망을 마주한 동팔은 오늘도 레슨장에서 공을 던지러 왔다.

"당장 프로에 들어가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그래도 길이 있으니 다행이잖아. 1부 리그 우승하고, 강동팔의 부활이 알려지면 각 구단에서도 움직이겠지."

"그렇겠죠."

"그렇고말고. 그냥저냥 다른 투수들이라면 묻히겠지만 너라면 아직 20대 중반이고, 이전에 경력이 있으니까 더 집중을 받기 쉬워. 그러니까 더 노력하면 된다. 반드시."

사장님의 격려에 동팔은 다시 힘을 내서 마운드에 올라가 공을 던졌다.

일주일간의 노력 덕분인지 이젠 시속 130킬로의 직구의 제구력이 월등히 좋아졌다.

그리고 바뀐 점이 또 하나 있었다.

"저기 민희 씨."

동팔이 그렇게 부르자 민희는 대놓고 도끼눈으로 째려보았다. 그러자 동팔은 말을 수정했다.

"아니, 민희야."

그러자 민희의 눈빛이 단번에 풀어졌다.

"굳이 이렇게까지 안 도와줘도 되는데……."

지금 민희는 동팔이 던진 공을 바구니에 담고 있었다.

이전에는 혼자서 담던 공이었지만 둘이서 담으니 시간이 더 줄어서 좋았다.

그래도 민희가 여기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다.

"그냥 하고 싶어서 왔어요. 그리고… 오빠가… 점점 더 좋아지는 모습도 보고 싶고……."

"그래. 도와줘서 고맙긴 한데… 괜히 더 미안해서."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나중에 프로 입단하면 모르는 척하지 마시고 맛있는 거 사주시면 돼요."

"응……."

별말이 없이 공만 줍는 두 사람.

그 두 사람을 보는 사장님의 눈빛은 복잡했다.

'거 참. 순진한 건지, 눈치가 없는 건지…….'

누가 봐도 민희가 달려들고 있는 것이 뻔히 보이는데, 정작 동팔은 그걸 모르고 있으니.

그러던 중 동팔이 민희의 마음에 직구를 날렸다.

"그런데 민희야. 너 공 줍는 거 보니까 예뻐 보인다."

동팔의 말에 이미 마음이 넘어간 민희는 직격을 받아서 크게 흔들렸다.

"저, 그게… 그 말 들으려고 도와드리는 거 아니에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민희의 공 줍는 손은 방금 전보다 두 배는 더 빨라졌다.

보는 사람 마음을 흐뭇하게 하는 장면을 보면서 사장님이 생각했다.

'좋을 때다. 내 딸이 10살만 더 많았어도 소개시켜주는 건데.'

그때, 그의 딸이 학원을 마치고 들어왔다.

"아빠. 저 왔어요."

방금 들어온 사장님의 딸은 10살. 즉,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당연히 두 사람이 지금 사귄다면 범죄 그 자체였다.

그날 밤.

동팔은 오늘도 마음껏 던질 수 있는 레슨장에서 200번의 전력투구를 했다.

보통 5게임 중 한 번 선발로 나서는 투수들도 한 게임에 120개 이상을 던지지 않았다.

이에 대한 규정은 없었고 지금도 없었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문제가 된 투수 혹사와 수명 단축으로 인해 프로리그에선 투수 보호를 위해 구단 자체적인 방식으로 제한하고 있었다.

또한 동팔을 포함하여 그 이전의 몇 몇 선수의 혹사한 경우로 인해, 이젠 고교 야구에서도 투구 수는 130개로 제한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동팔은 200개를 던졌다.

이전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혹사이자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동팔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았다.

기회가 있을 때 잡아야 했다.

당연히 지켜보던 민희와 사장님도 걱정을 했다.

하지만 동팔은 오히려 이를 악물며 던졌다. 지금 동팔이 이렇게까지 던지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 악마의 말대로라면… 나에게 남은 시간은 고작해야 5년. 그리고 아무리 혹사시켜도 하룻밤만 지나면 다시 회복할 수 있는 회복력……!!'

그것이 아니었다면 50번을 이상 던지지 않고 또 부상을 당하지 않게 조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껏, 한계 이상으로 던지고 또 던졌다.

이후에 집에 와서 간단히 씻고 뻗어버린 건 당연한 일.

피곤에 지쳐 깊이 잠든 그때, 동팔은 잠에서 깼다.

"끄으응……."

동팔은 온몸을 옥죄는 느낌에 잠에서 깼다. 하지만 그건 빙산의 일각이었다.

몽롱하던 의식이 선명해지자 어깨와 등, 가슴과 배는 물론 다리까지 격통을 느꼈다.

"끄으으으읍……."

너무 뛰어서 다리에 쥐가 나면 근육이 알아서 강하게 당겨졌다. 그리고 제대로 풀어주지 않으면 고통이 너무 심해서 비명이 절로 튀어 나왔다.

그런데 지금 동팔은 등과 가슴, 배와 다리까지 근육이 경련하고 있었다.

힘을 풀려고 했지만 근육들은 동팔의 의지와 달리 절로 강하게 힘을 주며 수축하고 있었다.

모든 근육이 강하게 당기고 있었기에 뼈가 바스라질 것만 같았다.

"으으으……."

너무 아파서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리고 오른손에 있는 손가락도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으득거리며 꺾이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끈에 묶여 고문을 받듯이 강제로 몸이 뒤틀리고 있었다.

처음에 나왔던 비명도 이젠 나오지 않았다.

"후우. 후우. 후후……."

그나마 동팔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은 심호흡을 하는 것이 전부.

동팔의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은 아침 해가 밝을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규정과 경쟁

다음 날 아침.

동팔은 지난밤만 해도 죽을 것 같던 몸이 너무도 멀쩡하자 정신이 멍했다.

'어떻게 된 거야……?'

분명히 온몸을 뒤틀던 고통은 아침이 되자 안개처럼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놀라운 일이 있었다.

"분명히 몸이 쑤셔야 하는데……."

어제 전력으로 200번에 달하는 투구를 했다. 선수 때처럼 이후에 안마를 받아 근육을 풀어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피로가 풀린 것처럼 개운했고, 오히려 상태가 전보다 더 좋아진 느낌이 들었다.

"설마… 꿈? 그럼 악몽도 이런 악몽이 또 없네……."

동팔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을 갠 다음, 달력을 봤다.

토요일이 지났으니 오늘은 일요일.

그리고 오늘은 동팔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날이었다.

'설마 큰일이 있겠어? 아마 1부 리그에서 나 정도 투수면 귀한데.'

동팔도 자신이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자각은 하고 있었다. 120을 넘지 못하고 변화구만 주로 던지는 때도 1부 리그에서 가끔 콜이 왔다.

에이스는 아니었지만 평균 이상의 투수인 건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은 130을 종종 넘는 구속(球速)을 가지게 되었다. 그럼 1부 리그에서도 에이스급에 해당하는 실력.

그러니 자신은 물론 소개를 해문 민철도 1부 리그에 쉽게 들어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상황은 예상외로 흘러갔다.

"미안하지만 안 되겠다. 나중에 연락이 왔는데 다른 투수를 구했거든. 정말로 미안해."

민철이 연락한 1부 리그의 광진 우랑우탄팀의 감독을 맡고 있는 이태성이 동팔과 민철에게 말했다.

그러자 민철이 따졌다.

"야. 선약이 먼저지. 갑자기 말을 바꾸면 어떻게 하냐? 그리고 그런 사실이 있었으면 우리가 오기 전에 미리 말을 해줘야지. 아무 말도 없다가 우리가 온 다음에 이야기하면 우리가 뭐가 돼?"

"그게… 정말 미안해. 사실 네가 소개한 동팔이란 친구도 엄청 탐이 나는 친구이긴 한데… 같은 팀원 소개로 온 분의 이름을 듣자마자 그냥 받아들이고 말았거든. 그리고……."

태성은 그 말을 하면서 민철과 동팔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주변에서 연습하는 같은 팀원들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나야 그렇다 쳐도, 다른 애들도 전부 그분이 오길 바라고 있어. 이 친구가 아무리 제구력이 좋아도 120 이상은 못 던지잖아. 하지만 그분은 130 중후반대를 던질 수 있고, 제구력도 좋아. 그러니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겠냐? 이건 나 혼자 독단으로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냐."

그의 말에 동팔은 물론 민철도 어느 정도 동의를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잘못된 선입견을 용인하겠다는 건 아니었다.

"거기까진 이해할게. 그런데 너, 잘못 알고 있는 게 하나 있다. 누가 우리 동팔이가 120 이상 못 던진다고 그래?"

민철의 말에 태성이 답했다.

"그야… 서울 남부 리그에 있는 선수들이라면 다 알고 있는 거잖아. 그리고 너도 평상시에 그렇게 말하고 다녔으면서. 왜 갑자기 말을 바꾸는데?"

"그야 전에는 그랬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동팔이가 괜히 1부 리그로 가겠다고 했겠냐? 지금 다시 회복해서 130대도 던질 수 있어. 그리고 더 연습하면 그 이상도 가능할거야. 아니, 반드시 가능해."

민철의 말에 태성의 눈빛이 흔들렸다.

"뭐? 정말?! 120 겨우 던지던 사람이 갑자기 130 이상을…?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는 거야?"

"못 믿을 건 또 뭔데? 그리고 내가 바로 들통 날 거짓말을 해서 뭐 하냐? 여기서 던져보면 바로 알 수 있는 걸 왜?"

너무나 당당한 민철의 말과 행동에 태성도 고민을 했다.

"이거 어떻게 하나… 그분께 이미 다 말씀드렸는데……."

그러자 민철이 물었다.

"그게 누구이기에 네가 그렇게 고민하는 거야? 그리고 둘 다 받아들이면 안 돼?"

민철의 물음에 태성이 답했다.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하면 내가 고민을 왜 하겠어? 리그 규정 때문에 그렇지. 그리고 저 친구 말고 받아들이기로 한 분은 너도 잘 아는 분이야. 2년 전에 은퇴하신 윤승완 투수."

태성의 답에 민철은 물론 동팔도 놀랐다.

"뭐?! 윤승완 선수? 거의 레전드급이신 분이……?"

"정말이에요? 그분이요? 이후에 코치를 하신다고 들었는데……."

그들의 반응에 이해를 하면서도 태성은 이어서 말했다.

"분명히 1년 전에는 그랬지. 하지만 로데 구단과 약간 사소한 일이 생기는 바람에 나오셨대. 그래도 야구는 하고 싶으셔서 알아보던 중에 우리와 연락이 닿았던 거고. 두 명의 든든한 투수가 있다는 건 좋지만… 우리가 있는 서울 동부 리그에선 1부 리그는 선수 출신을 3명만 등록할 수 있어. 출전은 한 게임에 두 명이 한계고."

태성의 말에 민철도 고민이 깊어졌다.

"여기 선수 출신이 포수인 너랑, 유격수인 김지환이 있지? 하긴 규정이 그러니 어쩔 수 없다만… 그래도 어떻게 안 되겠냐? 적어도 여기까지 왔는데 최소한의 기회는 줘야지."

민철이 태성에게 귓속말로 작게 말했다.

"그리고 네가 우리한테 미리 말 안 한 이유가 그거잖아.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해서 어떻게든 동팔이 공을 쟤네한테 보여주려고. 안 그래?"

괜히 오랜 친구가 아니었는지 민철은 태성이 한 행동의 이유를 알아차렸다 민철의 말에 태성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역시 눈치는 빠르다.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마."

"말해 봤자 손해인데, 내가 왜 말해?"

두 사람 사이에 은밀한 약속이 이루어지자 태성이 자리를 벗어나 연습하고 있는 같은 팀원들을 불러 모았다.

무언가 계속 이야기하던 그들이 민철과 동팔을 힐끗 힐끗 훔쳐보았다. 적어도 그들의 눈빛이 좋지는 않았다.

괜한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 동팔이 안절부절못하자 민철이 말했다.

"동팔아. 어깨 펴. 당당하게 행동해. 네가 꿀릴 게 뭐가 있어? 테스트를 해서 합격하면 여기에 있는 거고 아니면 다른 팀 알아보면 그만이야. 마운드에 올라오면 투사가 되는 녀석이… 이럴 땐 꼭 쑥맥이 되더라?"

"네. 알겠어요. 형……."

동팔은 민철의 말에 어깨를 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태성이 다가와서 말했다.

"테스트 방법을 정했어. 우리 타자들이 전부 상대해서 투표하기로 했다. 그리고 마침 그분도 여기 도착하셨다니까, 내가 먼저 잘 말씀드려 볼게. 사람도 좋으시고, 정정당당한 것을 즐기시는 분이시니 오히려 좋아하실 지도 몰라. 그러니 지금 몸 풀고 있어. 아마도 시간상 동팔… 선수가 먼저 던져야 할 것 같거든."

태성이 이내 핸드폰을 꺼내 통화를 하며 어디론가 갔다.

그가 떠나자 동팔은 그의 말대로 몸을 풀기 시작했다.

그가 몸을 푸는 사이, 다시 연습을 하는 우랑우탄팀원들은 여전히 동팔을 좋지 않은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그냥 알아서 갈 것이지. 괜히 테스트 받겠다고……."

"어차피 결과는 뻔한데."

그리고 그들의 분위기와 말은 동팔로 하여금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오기가 치솟아 올랐다.

지금 자신을 향한 저들의 평가가 잘못되었음을. 그리고 자신의 실력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싶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