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헤어졌어. 예전에."
공식적으로 헤어진 건 일주일 남짓. 하지만 동팔은 그녀의 톡의 프로필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 알았다.
헤어짐의 말은 마침표에 불과했을 뿐, 이미 이전부터 그녀의 마음은 오래전에 떠났다는 것을.
"아, 죄송해요… 제가 괜히……."
"아냐. 좋은 말을 해주려고 그런 건데… 뭘……."
동팔은 오히려 미안해하고 있는 민희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러자 민희가 말했다.
"이건 그때처럼 그대로네요."
"그때?"
동팔의 물음에 민희가 답했다.
"그때가 있어요. 오빠가 모르는 그때가."
민희는 그때가 언제였는지 끝까지 말해주지 않았다.
토요일에 프로야구는 오후 5시부터 시합이 있었다.
그 사이, 대구가 연고지인 오성 구단의 선수들은 서울에 잡아 놓은 호텔에서 각자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선수들마다 시간을 보내는 방법은 달랐다.
계속 잠을 자며 체력을 회복하는 선수도 있었고, 물건을 치우고 타격 연습을 하는 선수도 있었다. 찜질방이나 스포츠 마사지를 받으며 몸을 관리하기도 했다.
만약 홈에서 경기를 한다면 경기장에 나와 훈련을 하겠지만 원정을 왔으니 다른 구장을 빌리지 않으면 무리였다.
포스트 시즌과 같이 단기전에 토너먼트 형식이라면 그렇게라도 하겠지만 리그가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기에 장기전을 생각해야 했다.
굳이 체력을 깎아가며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었다.
선수들이야 그렇게 보낸다지만 감독과 코치들은 선수들을 봐주거나 회의 및 상대팀 분석에 들어가 있었다.
코치 중 투수 쪽을 하고 있는 김진수 코치.
그는 코치들 중에서 막내였기에 간단한 심부름을 위해 호텔 밖으로 나왔다.
"아, 그냥 배달 시키지. 왜 굳이 날 보내는 거야……."
그가 투덜거리며 로비를 가로지르던 그때, 눈에 익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 사람이 김진수 코치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저 기억하시죠? 강동팔입니다."
"아, 그럼… 기억하고 말고……."
솔직히 제일 피하고 싶은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런데 여기서 마주치게 되자 도망칠 수도 없었고, 괜찮은 척 말했다.
"그런데… 미안. 내가 지금 급한 용무가 있어서……."
그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시답지 않은 심부름의 위치를 격상시켰다.
그러자 인생이 걸린 동팔도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잠시면 됩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5분만 시간을 주세요. 네?"
"저기… 그게… 알았어. 일단 저기 가서 이야기하자."
그는 동팔의 말에 주변을 살피다가 로비에 있는 의자에 갔다. 그리고 동팔도 같이 가서 앉아 말했다.
"그동안 연락을 드렸는데… 그사이 핸드폰 바꾸셨나 봐요."
"아, 뭐… 그렇지. 그런데 그게 네 번호였구나? 몰랐다, 야."
바꾸긴 했다. 다만 바꾸면서 연락처도 같이 옮겼기에 그가 하는 변명은 말 그대로 변명이었다.
"나는 그냥 스팸이나 이상한 곳에서 오는 전화인 줄 알았지. 그런데 좀 자주 와서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그게 동팔이 너였을 줄은 몰랐네. 그런데 왜 전화했어? 요즘 어떻게 지내?"
김진수 코치는 동팔이 무슨 말을 할까 걱정했다.
'설마… 순진해서 다단계에 빠진 건 아니겠지? 그리고 나한테 와서 물건 팔아달라는 거 아냐? 그것도 아니면… 돈 빌리러 왔나? 4년 동안 연락도 안 하던 나한테 올 정도면 정말 힘든가?'
그러면서 김진수 코치는 동팔의 복장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동팔의 복장은 무언가 팔러 온 것처럼 반듯하게 입고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빈궁함이 느껴질 정도로 허름하지도 않았다. 그냥 평범하게 깔끔한 옷을 입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제 어깨가 다시 회복한 것 같아서요. 그래서 다시 입단할 길이 있는지 부탁드리려고 왔어요."
"뭐?!"
동팔의 말에 김진수 코치는 자신의 귀가 의심스러웠다.
"회복이 돼? 그게? 어떻게? 집중적인 재활을 해도 전혀 회복하지 않았잖아? 구속이 120도 안 나와서 완전히 포기했는데… 그게 가능하냐?"
동팔이 오성 구단에 들어왔을 때부터 봐 왔다. 그리고 그가 재활하는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동팔이 당한 혹사로 인한 부상이 얼마나 심각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건 현대의학으로 회복이 안 되는 거 몰라?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거야?"
김진수 코치가 이어서 말했다.
"차라리 물건을 팔러 왔으면 빨리 사고 보내려 했는데… 그건 정말 안 되겠다."
"네?"
"지금 구단 상황이 말이 아니야. 그렇지 않아도 지난 시즌에 완전히 물 먹어서 대대적인 전력을 보강했어. 그 중에 투수에 투자한 돈만 해도 200억이 넘어. 200억이. 그중에 남궁지완을 잡는다고 거의 절반을 썼다."
남궁지완이라는 이름을 듣자 동팔은 순간 이미 헤어진 혜진이 떠올랐다.
동팔의 가슴이 쓰린 사이, 김진수 코치는 자신이 할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거기에 폼 떨어진 선수들도 싹 다 2군으로 보내거나, 트레이드 하거나. 내버린 거 모르지?"
그건 스포츠 뉴스에도 종종 나오던 이야기였다.
다만 동팔의 경우, 프로야구 소식을 들을 때마다 박탈감이 들어 보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 2군에 자리가 있을 것 같아? 지금 프론트에선 엄청나게 민감하다고. 그런 상황에 어깨가 아작 난 너를 왜 다시 부르겠냐? 구단이 이렇게 된 데에는 너도 한몫했어. 계약금을 다시 돌려줬다지만… 그동안 쏟아부은 재활 비용이 억 단위야. 억. 차마 그거까지 달라고 할 수 없어서 계약금 지급으로 마무리 지은 거지."
그리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다음 말했다.
"씨바. 괜히 시간만 허비했네. 그딴 말할 거면 찾아오지 마. 그리고 전화도 하지 마. 알았어?"
그 말을 남기고 김진수 코치는 황급히 떠났다.
동팔은 말을 할 틈도 얻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멍하니 있다가 자리를 떠났다.
동팔은 호텔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자신의 꿈과도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
이미 자신에게 어깨 부상의 낙인이 찍혔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리고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은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
"적어도… 한 번만이라도 봐 달라는 말 정도는 하게 해 달라고……."
그래서 가방에는 글러브와 야구공이 있었다. 그리고 던지기 편한 복장으로 온 상태였다.
하지만 그에게 남은 주홍글씨는 단 한 번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게 만들었다.
여기까지 오는데 민희의 코치가 있었다. 짧은 시간에 자신을 제대로 알리기 위한 준비와 방법까지 알려주었다.
실제로 절반 이상은 맞아 떨어졌다.
문제는 코치가 자신의 선입견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과 기회조차 얻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하냐……."
그때, 동팔의 머릿속에 한 사람의 말이 떠올랐다.
"당장 프로에 들어갈 수 없으면… 아마 1부 리그 우승하는 건 어때?"
그건 김 대리님의 제안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그냥 흘려들은 말이었다.
당장 프로 2군에 들어가서 집중적인 훈련을 할 수 있다면 아무런 쓸모가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어 말한 대리님의 말이 떠올랐다.
"눈을 끌어야 몸값이 오르고, 그래야 더 좋은 팀에 더 좋은 조건으로 들어갈 수 있잖아."
하지만 비록 어깨의 부상이 심각했다고 해도 이런 대우를 받자 오히려 오기가 솟아올랐다.
"그래. 한 번 해보자. 지금이야 이렇지만… 1년 후에도 이럴 수 있는지. 아니, 이렇게 대한 걸 완전히 후회하게 해주겠어. 반드시……."
이전이라면 단순한 메아리에 불과했을 결의. 하지만 이젠 명백히 강한 힘과 영향력을 가지게 된 결의였다.
하지만 지금 당장 아마 1부 리그로 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당장 갈 수 있는 팀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동팔은 제일 정통할 사람에게 전화를 했다.
"민철이 형. 저 동팔이에요. 혹시 지금 시간 되시나요? 왜긴요. 상담하고 싶어서요."
동팔의 상담 부탁으로 민철은 가까운 곳에서 그와 만났다.
"방금 전에 보고 또 보니 좀 어색하다. 그런데 갑자기 왠 상담이야?"
민철의 말에 동팔은 주저했다.
"그게……."
지금 자신이 먼저 상담을 부탁했지만 막상 말하자니 힘들었다.
'내가 1부 리그팀으로 간다면 지금 팀은 완전히 두들겨 맞을 텐데…….'
같은 팀에 있는 선수들도 잘 알고 있는데, 그런 상황에 자신의 꿈을 위해 1부 리그로 간다고 하면… 자신의 이기심으로 그들을 버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동팔이 쉽게 말을 하지 못하자 민철은 먼저 그에게 물어보았다.
"동팔아. 너 혹시 오성의 김 코치 만나고 왔니?"
그도 동팔과 김진수 코치와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는 척을 안 했을 뿐, 오늘 민희와 동팔의 대화 내용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네……."
"그런데 나랑 상담하고 싶어 하는 건… 일이 잘 안 됐다는 말이겠네. 잘됐다면 할 말이 있다고 했을 거고."
"네……."
민철은 동팔의 표정만으로 그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짐작했다.
"솔직히 그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이미 선입견이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던질 기회도 주지 않을 줄은……."
"한 번 찍힌 낙인이 쉽게 지워지겠냐. 그건 거기만 아니라 사회에서 사람들이랑 살아가면 항상 있는 일이야. 물론 그게 옳다는 건 아니고, 그냥 받아들이고 포기해야 할 이유는 아니지만……."
그리고 민철은 이어서 말했다.
"그럼 내게 상담하고 싶다는 건 어떤 건데? 직접 프로에 들어갈 수 없으니 선입견을 깰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거 아냐? 그리고 그걸 도와줄 사람도 있으면 하는 거고."
"…맞아요.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에요. 제가 형에게 부탁하고 싶은 건… 제가 갈 수 있는 1부 리그팀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 그래요."
"1부 리그?"
프로 1군이 아닌 이상, 동팔이 말한 1부 리그가 아마리그라는 건 그냥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있는 팀은 서울 남부에 위치한 2부 리그.
동팔이 1부 리그에 가고 싶다는 건 지금 있는 팀을 떠나야만 했다.
"하……."
민철의 한숨에 동팔은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급작스럽고 부담스러운 부탁이었다.
"오늘 공 던지는 것 보고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는데… 그게 오늘일 줄은 몰랐다."
그리고 민철은 동팔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야. 넌 뭘 그렇게 주눅이 들어 있어? 프로에 문을 두드렸다는 건 결국 지금 있는 데에서 나와야 하는 거잖아. 안 그러냐?"
"네… 하지만… 그래도 1부 리그팀으로 가는 거랑 프로팀으로 가는 건… 느낌이 다르잖아요. 아마리그는 취미지만 프로는 직업인데……."
"그건 그렇지만 너무 기죽지 마. 솔직히 나라도 네가 하는 생각했을 거다. 전에는 불가능했을지 몰라도 이젠 더 높은 곳에 갈 수 있게 되었잖아. 나 같으면 지금 당장 여길 때려 쳤을 거야. 그럼 직장은 어떻게 할 건데? 확실히 그만 두는 거야?"
민철은 이미 동팔과 민희의 대화를 들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제대로 확인하기로 했다.
"네. 인수인계랑 신입 사원 뽑을 때까지만 다니고, 늦어도 3주 뒤에 그만두기로 했어요."
"그렇구나. 알았다. 이미 일이 거기까지 진행됐네."
민철이 핸드폰을 꺼내고는 이어 말했다.
"너 진짜 운 좋다. 마침 투수를 구하는 팀이 있어. 이미 구했는지 모르겠지만… 1부 리그 우승을 노리는 팀이니 약하진 않아. 이번에 제대로 하려는 것 같으니까 좋은 기회가 될걸?"
민철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나야. 민철이. 너희 투수 구한다면서? 혹시 이미 구했어? 어. 어. 그래? 알았어."
두 사람의 대화를 듣지 못하는 동팔은 긴장하며 민철의 이어지는 말을 기다렸다.
이내 민철이 동팔을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못 구했다고? 마침 잘됐다. 그렇지 않아도 아주 좋은 투수가 FA(자유계약)로 풀려나서 말이야. 언제 시간 되냐? 오늘? 아니면 다음 주? 그냥은 안 되고… 테스트? 내일? 그야 그건 어쩔 수 없지. 알았어."
통화를 마친 민철은 동팔을 보며 말했다.
"다 들었지? 다행히 자리가 있네. 테스트를 해야 하겠지만… 솔직히 너 정도 구위면 충분히 통과하고도 남을 거야. 아무리 1부 리그가 준프로라지만 130km 대 던지고 제구력도 좋은 투수는 어느 1부 리그라도 귀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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