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차 안에서 민철은 민희에게 이것저것을 물어보면서 여러 가지를 알게 됐다.
"아, 동팔이 회사 동료분이셨구나. 그런데 여기에는 어쩌다 오신 거예요? 아침부터 오시는 건 쉽지 않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동팔 씨가 회사 업무에 빨리 적응하려면 그 시간이라도 투자해야죠. 동팔 씨가 일을 잘해야 안 잘리실 거고, 그래야 저와 다른 사람이 해야 할 업무가 안 늘어나잖아요."
"그래도… 여기까지 오시는 건 너무 불편하잖아요. 차라리 점심 즈음에 만나자고 약속을 잡는 게 더 낫지 않나요?"
"그것도 생각은 해봤지만… 동팔 씨가 톡을 잘 보지 않으셔서 장담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직접 찾아가는 것이 더 낫겠다 싶어서 인터넷을 통해서 찾아왔어요. 동팔 씨가 어느 팀, 어느 리그에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요."
민희는 그 말을 하며 살짝 동팔을 봤다.
그리고는 다시 앞을 보며 말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동팔 씨가 공을 던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거든요."
"다시…요……?"
민철은 무언가 미묘한 표정으로 말하다가 이내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보셨어요? 동팔이 공 열심히 던지는 거."
"그럼요. 동팔 씨 공을 아무도 못 치던데요?"
민희의 말에 동팔은 처음으로 말을 꺼냈다.
"저기… 그 정도까진 아니에요. 몇 명은 쳤어요."
그러자 민희가 바로 말했다.
"그건 친 게 아니죠. 쳐 봐야 파울이나 플라이 볼. 그리고 내야 땅볼이 전부던데요?"
민희의 말에 민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그건 친 게 아니죠. 동팔이 녀석은 너무 기준이 높아서 그것도 못 치게 하려고 엄청나게 노력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지금 동팔이 변화구가 대단합니다. 커브도 거의 포크볼 수준의 커브지만… 절묘한 슬라이더에 가끔 체인지업도 던져요."
민철은 그 말을 하면서 아차 싶었다.
'아, 실수. 야구를 모르는 여자한테 야구 용어를 남발하다니…….'
민철이 서둘러 설명을 하려고 할 때, 민희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네? 체인지업도 던지세요? 전에는 직구랑 커브만으로 던지시더니… 구종이 많이 늘었네요."
민희의 말에 놀란 사람은 민철과 동팔이었다.
"네?! 그걸 어떻게 아세요?"
"야구에 대해 아주 잘 아시는데요?"
동팔은 자신이 이전에 던지던 주력구를 민희가 알고 있다는 사실에, 민철은 민희가 의외로 야구 용어에 익숙하고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야… 이전부터 동팔 씨 팬이었거든요. 그래서 회사에서 볼 때마다 많이 속상해요. 그 감독이 동팔 씨를 혹사시키지만 않았더라면… 지금 회사 사람들은 전부 동팔 씨를 보며 부러워했을 텐데……."
민희의 말에 민철도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지난 일이라곤 하지만 솔직히 저도 화가 납니다. 동팔이가 원래 있을 자리는 여기가 아니라, 프로리그인데 말이죠."
두 사람의 말에 동팔이 말했다.
"됐어요. 이미 다 지난 일이고, 끝난 일인데……."
그 말에 민희와 민철은 더 이상 그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계속 이야기를 해봤자 동팔의 상처를 헤집는 것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동팔은 민희에게 업무를 처리하는 요령에 대해 배웠다.
업무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사람과의 관계를 맺을 때 주의할 점이 절반 이상이었다.
지금 동팔에게 중요한 것은 업무를 볼 때 컴퓨터의 사용법. 특히 엑셀 사용법과 기입된 정보의 정확한 파악을 중점으로 배웠다.
그 후 동팔이 간 곳은 집에서 제일 가까운 투수 레슨장이었다.
"동팔이 왔구나. 오늘도 그거 던지러?"
"네.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레슨장의 사장님은 동팔에게 하나의 열쇠를 주었다. 동팔은 열쇠를 가지고 창고의 문을 열었다.
그곳에서 꺼낸 것은 야구공보다 조금 큰 원이 달린 물건.
전체적인 모습은 표지판과 같았지만 밑에는 발바닥보다 넓은 네모난 판이 있고, 아래에 바퀴가 달려 있었다. 그리고 중간의 쇠막대는 길이를 조절하거나 꺾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동팔은 그것을 끌고 나와 실내 마운드에서부터 홈 플레이트 사이에 놓았다. 동팔은 모두 3개인 그것의 고리의 높이를 조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설치를 마친 동팔은 마운드에 올라 공을 던졌다.
슉~
캉!
동팔이 던진 공은 두 개의 고리는 통과했지만 마지막 고리를 통과하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아……."
동팔은 아쉬움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지켜보던 사장님은 감탄하며 말했다.
"오늘 처음 던지는데 두 개나 통과한 거야? 나중에 기록 갱신하겠다, 야. 그런데 너무 어렵게 던지는 거 아냐? LA의 거쇼도 이렇게는 못 던질걸?"
사장님의 말에 동팔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구속도 느린데 이 정도는 던져야죠. 하하……."
동팔이 그렇게 말하며 벽에 있는 작은 표시기를 봤다.
표시기에 나온 숫자는 116. 방금 던진 동팔의 구속이었다.
'후…….'
이후 동팔은 계속해서 공을 던졌다.
그의 변화구는 때론 모든 고리를 통과하기도 했고, 마지막 고리에 맞으며 절정의 제구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120 이상을 넘는 공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동팔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열심히 공을 던졌다. 그의 말대로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그리고 자신의 컨트롤이 좋아지는 것을 보며 조금씩 희망을 키워 나갔다.
언젠가 불펜으로나마 프로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을. 행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그리고 무엇보다 오랜 시간동안 자신을 바라봐주고 있는 단 한 사람만을 위해서라도 포기하지 않았다.
'미안해, 혜진아… 내가 반드시 행복하게 해줄게…….'
그 희망은 그날 밤에 깨지고 말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동팔이 제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 인해서.
혜진과 데이트를 하고 헤어질 때쯤, 동팔은 믿지 못할 말을 들었다.
"우리 이제 친구로 지내자."
그녀는 너무나도 차분하게 말했다. 그래서인지 동팔은 처음 그 말을 듣고 이해하지 못했다.
"혜, 혜진아… 그게… 무슨 말이야? 친구로 지내자니……."
동팔의 말에 혜진은 눈에 눈물을 머금고 그에게 한 걸음 멀어지며 말했다.
"나도 이제 지쳤어. 그리고 불안해. 나 언제까지 너만 바라봐야 하는데?"
두 사람은 고등학생 때부터 사귀어 온 연인이었다.
자신이 승리투수가 되었을 때는 물론 프로에 입단했을 때도 같이 기뻐했다. 그리고 어깨 부상으로 재활할 때에도, 방출되어 입대하게 되었을 때에도.
같이 슬퍼하며 함께했다.
하지만 7년 동안 이어져 온 관계가 지금 끊어졌다.
"네가 싫다는 건 아냐. 하지만… 더 이상은 내가 못 버티겠어. 미안해……."
혜진은 그 말을 남기고 동팔의 곁을 떠났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떠난 혜진과 달리, 동팔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동팔을 스쳐 지나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지만 거리의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사라졌고, 이젠 아무도 오가지 않는 적막함만이 거리를 채우고 있다.
털썩.
이제야 자신의 시간이 흐른 동팔은 주저앉았다.
"아하하……."
눈에선 눈물이 흘렀지만 입에서는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마지막인지도 모르고, 그녀와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 좋아하던 자신이 너무 바보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미안했다.
그녀가 자신과 헤어지는 선택을 하게 만든 자신이 미웠다. 혹사당하는 것을 알고 미리 조심했더라면 이런 상황까지 오지 않을 수 있었다.
온몸을 쥐어짜는 자괴감에 동팔은 버틸 수가 없었다.
동팔은 영혼을 찍어 누르는 자괴감으로 벗어나기 위해서 오랜만에 술을 찾았다.
주점에 들어와 몇 병을 마셨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의식은 멀쩡했다.
운동을 한 덕분인지, 아니면 선천적으로 간이 건강해서인지 그 이유는 몰랐다.
동팔이 너무 마신 나머지 걱정한 아주머니가 결국에는 그를 밖으로 내보냈다. 택시를 불러주려고 했지만 그 사이 동팔이 사라졌다.
"……."
동팔은 정처 없이 걸었다.
차가 오면 그대로 몸을 들이밀어 죽을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밤을 지나 새벽이 되어가는 시간에 지나가는 차는 보이지 않았다.
인도는 물론, 차도도 적막과 어둠에 싸여 있었다.
유일한 불빛은 하얗고, 주황색 빛의 가로등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 빛들은 너무 작아 동팔의 어둠을 밀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씨바… 씨바……."
처음에는 자신을 향한 원망이었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고교 때의 감독을 원망했고, 지금은 이런 상황을 조장한 그 무언가를 원망했다.
"족 같은 신… 이렇게까지 날 괴롭혀? 씨바… 씨바……."
신을 원망해서일까?
동팔은 갑자기 올라온 구역질로 인해 배 속에 있던 것을 게워냈다.
"우욱~!!"
한참을 쏟아낸 동팔은 다시 그대로 걸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너무 걸어 힘이 빠진 다리와 자신이 토해낸 미끄러운 배설물로 인해 넘어지고 말았다.
콰당!
"아……!!"
크게 넘어지며 등으로 자신의 모든 체중을 느꼈다. 동팔은 몸을 가누며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던 중에 한 사람이 손을 내밀었다.
그는 한국 사람이 아니었다.
검은 옷을 입고, 둥근 원통형 모자를 쓴 영국의 중년 신사였다.
외국인이었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한국말은 너무 자연스러웠다.
"거 참. 젊은 친구가 꼴이 말이 아니야."
"아… 감사합니다."
동팔은 그의 손을 잡고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이제 더 이상 일어날 힘도 없어 완전히 주저앉자 자신을 일으켜준 사람을 봤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만… 가셔도 됩니다. 이젠 정말… 지쳤거든요."
하지만 동팔의 말에도 영국 신사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런가? 하지만 내가 갈 이유는 아닌 듯싶네. 마침 지나가는 길에 자네가 하는 말이 나의 마음에 쏙 들었거든."
"네? 대체 무슨……."
동팔은 자신이 무슨 말을 했나 의아해했다.
그러자 영국 신사가 답했다.
"자네가 말하지 않았나? 족 같은 신이라고."
"그 말을 하긴 했습니다만……."
기운이 없을 뿐이지, 의식은 또렷했다.
자신이 분명 그 말을 하긴 했다.
"독하지 않아서 완전히 마음에 들지 않지만… 빌어먹을 신이자 나의 원수인 그를 욕하는 걸 들으니 속이 시원하더군. 나와 같은 심정인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나는 것과 같은 이치야."
그의 말에 동팔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신을 원망하는 사람이 저 한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닌데… 좋아하다니… 혹시 악마라도 됩니까?"
단순한 농담이었다.
동팔은 악마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눈앞에 자신을 도와준 사람이 악마라는 생각은 더욱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말에 영국 신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연이긴 하지만… 자네 말이 맞아. 나는 악마 스크레이치라고 하네. 무능한 조카를 잡으러 왔는데 마침 좋은 말을 들으니 멈추지 않을 수가 없더군. 그러니 원하는 것을 말해 보게나. 자네의 영혼을 받는 대가로 소원을 들어주지."
스스로 악마라 말하는 그의 말에 동팔은 어이가 없었다.
"네? 뭐라고요? 악마? 허 참… 술이 확 깨네……."
그러자 그는 더욱 좋아하며 말했다.
"술이 깼다고? 그럼 더욱 좋군. 명료한 의식 가운데 계약을 진행해야 그 원수도 깐깐하게 뭐라 하지 않아. 거기에 본인의 의지가 있어야 하고, 그에 맞는 조건을 걸어야 해. 그러니 영혼을 모으는 게 힘들지."
그 이후로 그의 투덜거림이 이어졌다.
한참을 투덜거리던 그가 다시 동팔을 보며 말했다.
"그래서 뭘 원하는가? 자네를 이렇게 만든 사람에게 저주를 내려줄까? 아니면 직접 원수를 갚을 수 있게 힘을 줄까? 그것도 아니면… 헤어진 연인을 다시 돌아오게 해줄까?"
말도 되지 않는 말을 진지하게 하니 동팔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정말 악마인가…? 하지만 악마 같아 보이지 않은데…….'
그의 생각을 읽었는지 스크레이치가 동팔의 눈을 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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