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편
<-- Epilogue : 이후의 삶. 인간의 삶. -->
Epilogue : 이후의 삶. 인간의 삶.
비행기는 정상적으로 운행이 된다고 하지만….
“이거 괜찮은 거겠지?”
나는 눈썹을 찡그린 채 그렇게 물었다. 묘하게 항공기의 소음이 크게 느껴져 귓바퀴의 디멘션 커넥터를 매만지려다 이내 관뒀다. 진화의 산물 중 하나였던 이 물건은 이제 그저 고철덩이에 불과했으니.
“사실 20년 전만 하더라도 이게 당연한 일이었지.”
거기에 누군가 대답했다.
사실 이 사람도 괜찮은가 싶었다. 나는 비행기의 복도를 사이에 둔 채 반대편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검푸른 양복으로 몸을 감싼 채였다. 짜증나게.
한성진.
그레일의 원본인 사내.
추락하는 전함에서 떨어진 나는 우연찮게 제주도 앞바다에 불시착했다. 디멘션 커넥터와 합금을 통한 신체와 뇌의 강화가 거의 끝나갈 시점이었다. 합금으로 낙하산을 만든 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기절했고, 정신을 차리니 한성진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는 말이었다.
나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게임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왔다. 현실과 가상이 뒤섞인 세계는, 그렇게 가상이 붕괴하면서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
그리고 우리는 서울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완전히 자유로워진 인간의 세계에서, 비행기를 타고.
“그 옷은 일부러 그렇게 입은 거야?”
나는 눈썹을 찡그린 채 물었다. 제주도 해변에서 그레일을 처음 만났을 때나, 이외에 녀석이 평소에 저것과 같은 양복을 입었던 것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원래부터 내 옷이었다네, 이준 군.”
“….”
과장된 말투로 대답하신다.
“그레일에게 빼앗긴 채로 있던 나의 아이덴티티를 되찾아왔을 뿐이야. 그게 맞는 말이겠지.”
“그렇군.”
나는 적당히 무시하자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아예 틀린 말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불쾌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녀석은 당신의 모든 걸 카피했지?”
다시 물었다. 한성진이 흥미로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이 복잡한 가운데 나는 재차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건가?”
거기에 한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불쾌한 기분을 느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도 그런 미친 짓을 할 거야?”
“미친 짓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안했던 거지.”
“그나마 다행이군….”
나는 턱을 괴고 앉았다.
그 사이, 스튜어디스가 한 차례 다녀갔다. 그녀들은 디멘션 커넥터라는 물건이 사라지자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었고 우리에게 음료를 권했다. 팝업창을 통해 주문을 받던 시스템이 사라지자 당황스러운 거겠지.
하지만 적응해야만 했다.
“결국 이상론이란 말이지.”
위스키를 한 잔 받아 손에 쥔 한성진이 말을 이었다. 반대로 사과주스를 든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엘레노어가 당신이라는 존재를 만들어내면서까지 이루려고 했던 세계가 말인가?”
“역시 이해가 빠르군.”
그는 쓰게 웃었다.
“….”
나는 침묵했다.
위스키의 향이 달콤하게 코를 간질였지만 취하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나는 그레일이 말했던 이상적인 세계에 대해서 곱씹듯 천천히 생각했다.
결국 완전한 세계이긴 할 터였다.
아니…. 솔직히 말해 어디까지가 괜찮은 건지는 개인마다 생각이 다를 테지만. 누구는 자연의 섭리라며 날 때부터 앉은뱅이를 놔두라 할 테니까. 그런 잔혹한 현실을 현실이라며 받아들이라는 사람도 있을 텐데.
그레일은 그조차 인류의 진화를 통해?
“생각해봤자 별 수 없어.”
고민에 빠져있던 찰나 목소리가 이어졌다.
“…?”
“그 진화를 이루어내는 것조차 인간이 되어야 하니까.”
“그렇군.”
이해했다.
“우리도, 엘레노어도 아닌.”
“더럽게 어려운 이야기로군.”
“하하하, 맞아. 그렇기 때문에 절실한 거겠지.”
게임이.
“당신…?”
“아아, 착각하지 마. 나는 엘레노어의 사상에 동조하지 않으니까. 단지 맞는 부분이 있다는 거지.”
교육을 통한 인간의 진보.
개개인 스스로가 더 나아져가는 삶의 구성.
“그건 오히려 이상적이지.”
“….”
“시대의 발전에 따라 만들어지는 새로운 가치를 인간은 계속해서 따라오지 못했으니까. TV와 인터넷, 스마트폰이 그러했고 디멘션 커넥터가 그러했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엘레노어까지?”
“내가 조금만 더…. 칼 후퍼를 제대로 된 눈으로 보았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내가 동의를 구하듯 묻자 그는 괴로운 듯 중얼거렸다. 거기에서 나는 한성진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했다. 결국 그 역시 그레일과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인간의 삶에 휩쓸리는 개인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날 때부터 다리가 없는 이가 없기를.
가난한 이가 없기를, 나태한 이가 없기를.
인종과 성별로 인해 차별받는 이가 없기를.
“이루어질 수 있을까.”
“언젠가는. 우리의 시대가 아니어도.”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저어….”
그 직후, 목소리가 이어졌다.
“기장님께서 착륙 준비 부탁드린다고 하셔서요.”
의아해 고개를 들자 마찬가지로 스튜어디스의 모습이 보였다. 공손하게 손을 모은 그녀가 말을 전한 뒤 사라졌고, 나는 머쓱한 기분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이런 건 어떻게 해야….”
원래라면 디멘션 커넥터를 통해서 기장이 안내하는 목소리가 직접 들려와야할 텐데 말이다. 내가 쓰게 웃자 안전벨트를 찬 한성진이 대답했다.
“뭐, 옛날 기종 같은 경우에는 비행기 내에 설치된 스피커가 있으니까. 당분간은 그게 사용되겠지.”
“더럽게 귀찮겠군.”
“자네는 이제부터 어떻게 할 셈인가?”
“…?”
나는 의아해 고개를 들었다.
이제 슬슬 한성진이라는 남자에 대해 파악이 되는 기분이었다. 그는 이렇게, 주의를 환기시키고 싶을 때 일부러 이런 식의 말투를 쓰는 것 같았다.
“글쎄.”
말인즉슨 이 사람은 진지하게 묻고 있다.
“난 못해두었던 일을 할 참인데. 이번 사태의 복구에도 참가하고…. 디멘션 커넥터를 대체할 물건이 나올 때까지는 당분간 외부 활동을 할 생각이야.”
자네는 어쩔 생각인가.
“….”
어려운 질문이다.
하지만 ‘글쎄, 잘 모르겠어.’라는 질문으로 넘기기에는 어쩐지 어려운 구석이 있었다. 그렇게 앞으로의 일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자니 한성진이 말을 이었다.
“뭐, 주변 사람들이 다들 자네를 원하고 있으니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잠깐 쉬어도 되겠지만….”
“아저씨, 남 일에 뭐 그렇게….”
“남 일이라고…?”
“뭐?”
느닷없이 딱딱해진 목소리에 고개를 든 나는 한성진과 눈이 마주쳐쳤다. 그는 지금껏 본 적이 없던 차가운 눈을 한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딸의 일인데 남 일이라고?”
“???”
“잘 들어, 이준. 난 너에게 무한히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건 전혀 다른 문제야.”
“네?”
무심코 존댓말이 나왔다.
“내 딸을 울리면 울린 눈물의 숫자를 제곱해서 네놈을 총으로 쏴버릴 것이다. 그것도 샷건으로.”
“….”
“그러니 부디 잘 선택하도록.”
“아, 알겠습…. 니다.”
마지막까지 존댓말로 대답했다.
순간적으로 강한 압박감을 느꼈다. 이것이 딸을 지닌 아버지라는 걸까 싶어 나는 당황해 마찬가지로 존댓말을 사용해 그의 말에 대답했다.
아니 근데 우아랑이 뭘…?
그 녀석이?
왜?
“….”
그러는 사이, 비행기는 서서히 지상에 착륙했다.
활주로를 길게 달린 뒤에 서서히 멈춰 섰고 이후로 완전히 정지할 때까지 한성진과 나는 어색한 침묵에 빠져들었다. 그는 몇 번이고 아버지로서의 우려와 분노를 내게 무어라 표현하려고 했지만 포기했다.
하지만, 모르겠다.
원래는 조금 유하와 시간을 보낼까 했었지만….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났다. 베디비어부터 시작해 모두가 나에게 한 번씩 물어봤던 것이다.
끝나면 뭘 할 건지.
이 게임을 클리어하고 나면.
모든 사태가 끝나고 나면.
이준은 뭘 어떻게 하면 좋지.
그걸 물어보고 싶은 사람이…. 지금은 없다.
“일단 가지. 호텔을 예약해뒀으니.”
“아, 네….”
그런 내게 말을 건 한성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멍한 채로 있던 나는 앞장서 비행기 바깥으로 나가는 그를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감상에 젖어있을 때는 아니겠지만.
묘한 기분이었다.
“후우.”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러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선 나는 모퉁이를 막 돌아서는 한성진을 따라 비행기 바깥으로 나갔다.
“…?”
그리고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회장이 여기에?
“성진 씨!”
조금 의아해하고 있자 힘차게 달려온 그녀가 한성진을 세차게 끌어안았다. 나는 그 모습에 더욱이 의아한 기분이 드는 걸 느꼈고, 한성진이 자연스럽게 회장에게 키스를 하자 아예 몸이 굳어져버리고 말았다.
아니 두 분 이혼하셨다면서요.
“…. 미안하다, 저런 부모라.”
“응?”
이어진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고생했다, 스…. 아니, 이준.”
창피하다는 듯 뺨을 붉히고 있던 그녀가 나를 보고 싱긋 웃었다. 그런 우아랑의 모습에 나는 싱긋 웃었다.
“가웨인은 실제 부상이 너무 심각해 치료 중이다. 헥터와 비비안 역시 병원에 있는 상황이고.”
“라이오넬은?”
“그는…. 구하지 못했다.”
목소리가 어두웠다.
그래, 하고 짧게 대답한 나는 녀석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어쨌든 함께 탈출하지 못했지만, 거기에 우아랑이 죄책감을 지닐 문제는 아니었다.
그건 포 무탐바라에게 실례였다.
“그리고 그….”
생각에 잠겨있던 찰나 우아랑이 말을 걸어왔다.
“혹시 넬은….”
“엘레노어와 함께.”
“역시, 그렇군.”
그녀는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를 냈다.
“지상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재킷의 힘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도무지 넬 이외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말투로 우리에게 설명을 하더군.”
게임은 끝났다.
남는 것은 오직 현실뿐이라고.
“그녀는 엑스칼리버를 사용했어. 그래서 가상의 세계 전체를 뭐가 뭔지 구별조차 되지 않도록 만든 거야.”
그렇기에 엘레노어는 다시는 인간의 세계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 역시 가상의 세계에 개입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일단 지금 당장은 말이다.
“준…!”
바로 그 순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
고개를 든 나는 공항 반대편에 서있는 여자를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이곳에 있으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유, 하?”
뿐만이 아니었다.
“티티!” “타나 오빠아!” “….” “타나.” “타나님!”
제각기 그 뒤에 선 동료들이 나를 향해 웃어보이고 있었다. 린슬렛과 트리슈, 모드레드와 베디비어. 그리고 발렌타인까지. 나는 상황을 납득하지 못하고 의아해 뒤쪽에 선 우아랑을 돌아보았다.
“다들 널 걱정할 거라고 생각해서 말이다.”
거기에 모두들 이제는 평범한 인간이다.
“…. 이야기 정도는 해달라고.”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가상의 세계가 다시 보이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피식 웃은 나는 이내 공항의 반대편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힐끔 뒤를 확인하자 그때까지도 키스를 하고 있는 부부에게 끼어든 우아랑이 보였다.
난 또 뭘 그리 고민하고 있었던 건지.
앞으로 해야할 일? 그건 간단했….
“주운!!”
“으헉!”
생각에 잠겨있던 중, 달려온 유하가 품에 안겼다. 거의 태클에 가까운 움직임에 나는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티티!” “타나 오빠!”
“케헥! 끅!”
린슬렛과 트리슈까지 달려들어 나는 공항 바닥에 등부터 세차게 넘어졌다. 머리가 핑글핑글 돌아 괴로운 가운데 천천히 다가오는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 고생하셨습니다.”
모드레드였다.
“다, 다들 좀 떨어지….”
“저도 안겨도 되겠습니다.”
아니, 물어볼 거면 ‘까.’라고 붙여야 하는데.
그녀는 그나마 이성적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모드레드까지 넘어진 내게 휙 안겨 나는 네 여성을 품에 안은 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남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뭘요?”
“뭘?”
“트리슈 생각?”
“….”
“설마 이후의 일에 대해서 생각하고 계신건가요?”
바로 그때, 마지막으로 다가온 베디비어와 발렌타인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의외로 이쪽을 통찰력 있게 파악하고 있는 그의 모습에 쓰게 웃었다.
어쨌든 일은 아직 끝나지 않은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