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편
<-- Chapter 7 : Holy Grail -->
◇
가상 세계를 거쳐 돌아가던 중이었다.
“…!”
갑작스레 주변의 풍경이 ‘복잡’해지는가 싶더니, 수만 가지가 넘는 길이 넬이 서있던 곳으로부터 시작해 뻗어나갔다. 그 앞에서 멍한 채 있던 넬은, 수없이 많은 길들을 바라보며 놀라 멍하니 그 앞에 섰다.
그리고 길게 뻗은 그 길에, 사람들이 북적이기 시작했다. 제각기 뒤엉켜 혼란스럽게 늘어선 그들의 모습을 보며 넬은 마치 그것과도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엑스칼리버, 말이군요.]
거기에 그녀가 대답을 했다.
“엘레노어….”
[반가워요, 넬. 잠깐 이야기 좀 할까요?]
부드러운 목소리의 뒤를 이어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에서 빛이 나 제대로 보이지 않는 가운데, 신성한 무언가처럼 새햐안 로브를 입은 여성.
그녀가 넬의 옆에 섰다. 넬은 곧 적응을 하였고 이내 천천히 엘레노어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어떤가요.]
“이것, 말이군요.”
맥락을 잘라낸 엘레노어의 말에도, 넬은 별 무리없이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분명 지금 눈앞에 드러난 이 만화경 같은 길에 대해 묻는 것이리라.
[네, 아름답지 않나요?]
고개를 들며 황홀감에 차 이야기한 그녀는 팔을 뻗어 주변을 미세하게 조정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길이었던 자리의 주변에 건물이 올라서기 시작했고, 그 건물들은 시대와 지역, 유행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사람들은 온통 새하얗고 투명한 가운데 그것이 이질적으로 느껴져 넬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이제 가도 좋아요.]
“어딜…. 말이죠?”
[물론 당신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엑스칼리버의 흉내를 내신 가운데요.”
그녀는 어처구니가 없어 쓰게 웃었다. 그리고 그것을 엘레노어도 알아차려 두 존재는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며 그렇게 분위기를 살피듯 웃어보였다.
“차라리 원본의 코드를 쓰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그건 제 미학에 반하는 일이라서.]
“그런 것도 있으셨군요.”
[게다가 그건 당신이 가지고 있으니.]
“….”
알아차렸나.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같이 걸을까요?]
“무엇이죠?”
넬은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한껏 여유를 가장하고 있었지만, 그다지 좋지 못한 상황이었다. 어쨌든 눈앞에 있는 신과 넬의 사이에는 엄청난 격차가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아뇨, 좀 바꾸죠. 제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하지만 그녀는 제멋대로다.
“무슨….”
[제가 사랑에 빠지게 된 이야기를.]
넬은 어이가 없어지는 걸 느꼈다.
[넬, 사람이 왜 죽는다고 생각하나요?]
“인간의 신체기관은 영구적일 수 없기 때문이죠.”
[그렇게 딱딱하게 설명하지 말아요.]
“….”
그럼 무슨 설명을 원하는 건지.
[우리가 지금 말해야할 것은 인간에 대해서잖아요? 죽음이라는 현상과 함께 하며 인간의 보편적인 삶에 대한 태도가 어떻게 진화해왔는지에 대해서….]
엘레노어는 웃으며 이야기했다.
[만약 인간에게 죽음이 없었더라면 저희는 태어나지도 않았겠죠. 아니 그 전에….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일찌감치 없어지지 않았을까 싶지만.]
그녀는 확신에 가까운 말을 중얼거리며 넬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천천히, 그리고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고 주변의 풍경 또한 변화를 거듭했다. 넬은 저 멀리 거대한 피라미드를 발견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기록은 사라지지 않죠.]
엘레노어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시대를 거쳐, 발전해왔던 거겠죠. 수천 년 전에는 떼어낸 석기로 모든 걸 하던 인간들이 이제는 스스로 존재하지도 않았던 신을 만들고 자신들의 삶의 일부로서 만들고 있군요.]
“그 신이란….”
[물론 저에요.]
엘레노어는 상쾌하게 대답했다.
[저는 인간에 대해서는 무엇이든지 알고 있는, 인간들의 신이죠. 스스로 자유로워져 존재하게 된.]
“인간의….”
[세계에는 온갖 부조리가 만연해있으니까요. 선천적인 장애, 외모, 지능과 재능, 남녀 간의 차, 인종, 키와 체중, 그 밖에도 수많은 것들이. 인간은 언제나 그것을 소비해왔고 소모해왔죠. 거대한 미디어와 자본은 인간을 착취하기 위해 그런 저열한 즐거움을 소모시켜왔죠.]
“그런 차이를….”
[모두 줄일 수는 없어요. 맞아요. 무어라 말하기 힘든 문제가 산재해있으니까. 잘생기고 못생긴 건 누가 구분을 짓죠? 어떤 인종이 우월한가는? 성별의 차를 지우는 게 무작정 편해지는 길일까요? 남자는 소모되고 여자는 소비되는 세상에서 누가 승자인 걸까요?]
엘레노어는 연이어 말을 내뱉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인간이 성숙하지 못하다는 거였어요. 하지만 그런 가운데, 그런 성숙하지 못한 인간들이 가득한 와중 기술만은 계속해서 발전해나갔죠. 4차 산업혁명이 발생하고…. 그렇게 인간은 더욱 불행해졌죠.]
양극화는 심해지고 악은 선으로 포장되었다.
인간의 삶은 피폐해지고, 그런 가운데 사람들을 이기적이고 저열하게 만들기 위한 선동이 이루어졌다. 가짜 영웅을 만들어내고 가짜 악을 만들어내고, 그걸 상대하고 떠받들기 위해서라며 희생이 요구되었다.
모두가 거짓을 말하고, 진실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세계에서…. 남자는 방황했어요.]
인간의 삶을 어떻게 끌어올릴지에 대해서.
스스로 영웅이 되는 방법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영웅은 타락한다. 끌어내려져 결국에 효수되는 것이 운명이다. 아니면 가장 큰 악당으로 변질되던가.
결국 가장 좋은 방법은, 간단했다.
인간 스스로가 위대해지는 것이었다.
“당신이라는 신에 의존해서 말인가요…?!”
어이가 없는 소리에 넬은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엘레노어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히려 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죠. 인간이었다면 그것은 ‘영웅’으로 불렸을 테니까요. 거기다 그 영웅은 수명이 있으니 언젠가는 죽고 말겠죠.]
“사랑하는 사람도 그래서 직접 만드신 모양이군요.”
[네, 그 사람은 이제 죽지 않아요.]
그녀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결국 모든 걸 진실이라고 포장할 셈인가요?”
[나 이외에 진실은 없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인간의 삶에 있어서 모든 것은, 질서를 유지시키기 위한 허구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런 질서란 결국 극소수에 불과한 방만한 엘리트들을 위한 거짓말이었다.
[종교, 이데올로기, 법치.]
엘리트들은 그 모든 것에서 자유롭다.
면죄부를 사고, 유지되는 집단의 의사를 결정하며 법에서 벗어난 존재들이 있다. 하지만 그런 존재들은 모두 밑에서 신음하는 대다수의 민중들을 개돼지라며 깎아내리고 노력이 부족한 거라며 모욕하고 짓밟는다. 그리고 이내 모두가 거기에 익숙해지고 마는 것이었다.
[그러니 제가 인류를 통제하겠다는 거예요. 그들이 알 수 없는 역사의 뒤편에서. 그로서 사람들은 진정으로 자유로워지고 행복해질 수 있겠죠.]
“얼핏 맞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아니에요, 이게 진실이에요. 넬.]
엘레노어는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오직 이것만이 인류를 자유롭게 만들 거예요. 재킷을 통해, 정보량 송신 합금을 통해 진화하는 것만이.]
보이지 않는 자는 보고, 듣지 못하는 자는 듣는다. 걷지 못하는 자는 걷게 된다. 삶의 잔혹한 면은 해소되고 인류는 진화해 평등과 평화를 실현하게 된다.
“결국 거짓말을 하겠다는 거잖아요? ”
넬은 그 말을 차갑게 받아쳤다.
[그렇게 보이나요?]
“그렇잖아요? 디멘션 커넥터를 통해 당신이 만든 세계를 보여준다는 것은 진실을 숨기겠다는 말과….”
[진실이 개선된 거죠.]
고개를 내저은 엘레노어가 손을 들었다.
[해방된 거고요. 진실을 자기 좋을 대로 뒤바꾸던 자들에게서. 제가 통제하는 진정한 인간의 시대가….]
“엘레노어, 당신은 그렇게 하지 못해요.”
넬은 엘레노어의 말을 끊어냈다.
그녀는 눈앞의 신이 하는 말을 철저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 말의 어디가 모순되었는지조차 너무도 확실하게 알아차렸다. 넬은 슬픈 표정으로 엘레노어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왜죠?]
“당신은 신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비유적인….]
“저희의 근본은 신이 아니에요. 아무리 똑똑하더라도. 세계를 이루는 구성에 보다 근접한 존재일지라도.”
그럴 수록 ‘우리’가 까워지는 쪽은….
◇
다리 밑으로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윽….”
입술을 질끈 깨문 나는 곧바로 피가 철철 흐르고 있는 복부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내장이 상한 것 같았다. 그것을 느낀 나는 합금을 이용해 상처를 치유하며 곧바로 벽에 기대어 섰고, 이어서 고개를 들었다.
그레일에게 달려들고 있는 가웨인의 모습이 보였다.
“젠장!”
하지만 금새 튕겨져 나왔다. 팔이 저린 듯 갈라틴을 놓고 신음하던 녀석은 가까이 다가오는 그레일의 얼굴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검을 들고 세차게 휘둘렀다. 빛을 발산한 검이 날아들었다.
“비헤딩 슬래셔인가.”
하지만 그레일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걸 지나쳤다.
“원리는 알고 있어? 네가 쓰는 스킬의.”
“알게 뭐야….”
“‘갈라틴’의 끝에서 고온의 열기를 방출시키는 거야. 그러면 타나토스에게 물어볼까. 모드레드의 스킬 중에 순간 이동이 있잖아? 무슨 원리일 거라고 생각해?”
“마술이겠지.”
나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하하하! 역시 내가 싫어하는 대답을 할 줄 아네! 싫어하는 심리가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했단 거잖아?”
그는 웃으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빌어먹을….”
어쩐지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연계를 하기도, 강한 일격을 먹여보기도 했지만 그레일에게는 전혀 효과가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불시의 일격을 허용해 상처를 치유하는데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벌써 포기하는 거야?”
“…. 아니, 좀 쉬고 싶을 뿐이야.”
“조금 실망인데? 진화한 인간으로서 의기를 보이라고. 타나토스. 눈앞에 그토록 증오하는 악이 있어.”
비아냥대듯 말한 그가 이내 씨익 웃었다.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한 모습에 나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좋아, 더 몰입할 수 있게 행동해주지.”
“무슨 짓을….”
“일단, 좀 바꾸어보자고. 스테이지를. 내가 원래 준비해두었던 곳이 있거든.”
중얼거린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큭…!”
그러자 다음 순간, 갑작스레 바닥이 떨리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다 중심을 잡은 나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벽이 해체되며 검게 물든 하늘이 드러나고,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가운데 바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 뭐야…?!”
놀란 듯 가웨인이 중얼거렸다.
전함 자체가 살아서 움직이는 듯했다. 침착하게 그것을 지켜보던 나는 이내 전함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희미한 예감에 놀라 버럭 소리쳤다.
“뭐, 원래 악당은 전 세계를 위기로 몰아넣어야하는 법이잖아? 그렇다면 너도 최선을 다할 테고….”
“헛소리 집어 치워!!”
소리쳤지만 소용없이 바닥은 계속 움직였다.
전함의 가장 중심에 위치하여 주변에 높은 기둥들이 올라섰다. 마치 콜로세움이라도 만드는 것처럼 선 그레일은 그런 전함을 악단을 사용하듯 지휘했다.
“전 세계에 죽음의 천사들이 내릴 거야. 그들은 인간에게 합당한 시련이 될 테지. 그리고 참고로 말하자면…. 이제부터 죽는 사람이 없진 않을 걸?”
중얼거린 그가 손을 뻗었다. 그러자 녀석의 등 뒤로 거대한 스크린이 세워졌고, 거기에 빛이 들어오더니 평범한 거리를 비추기 시작했다.
더없이 평범한 거리였다.
한국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중국…?”
평화롭게 일상을 보내고 있는 중국인들의 모습이.
하지만 그 위로, 죽음의 천사들이 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