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편
<-- Chapter 7 : Holy Grail -->
◇
거대한 몬스터가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후우….”
이마에 맺힌 피를 닦아낸 아랑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눈앞의 바닥에 무력하게 쓰러진 검은 천사가 바람에 휩쓸려 모습을 감췄다. 상대하는 적이 갈수록 강해져, 그녀는 슬슬 힘에 부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넬, 다음은?”
하지만 쉴 시간은 없었다.
“잠시만요, 이 아래서 강한 반응이 느껴져요.”
뒤에 선 넬을 돌아보자 그녀가 조심스럽게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눈을 감아, 아랑은 침착하게 몸의 상태를 회복시켰다. 타나토스가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합금을 상처에 덧댔다.
“네, 이 바로 아래에 비비안님이 계세요.”
“정말이냐? 그녀는 왜….”
“글, 쎄요. 생각해보니 이상하긴 하네요.”
중얼거린 넬이 바닥에 손을 가져다댔다. 그리고 뒤를 이어, 바닥이 움푹 빠져드는가 싶더니 개미지옥처럼 안쪽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랑은 넬의 행동에 뒤로 물러서 그녀가 바닥을 조작하는 것을 기다렸다.
“지금이에요!”
이어서, 넬이 신호를 주었다.
좁은 틈이 벌어져, 아랑은 망설이지 않고 뛰어내렸다. 바닥에는 크게 빛이 드러나, 그녀는 금방이라도 싸울 준비를 했다. 그렇게 입고 있던 코트가 펄럭이며 아랑은 얼마 지나지 않아 구멍을 빠져나갔다.
“꺄악?!”
그리고 바닥에 착지하자 비명이 이어졌다.
“비비안이냐…?!”
아랑은 경계하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 완전히 겁에 질려 물러선 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히 비비안이었다.
“다, 당신은….”
그녀가 안심과 두려움이 반반 뒤섞인 얼굴로 물었다. 아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뻗었다.
“널 구하기 위해 왔다.”
“이곳은 대체 어디죠?! 저는…!”
“엘레노어가 만들어낸 인공 전함의 안이다. 너는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지? 기억은 있나?”
“…. 모르, 겠어요.”
비비안은 괴로운 듯 신음했다.
그 사이, 아랑의 뒤를 따라 넬이 아래쪽으로 내려왔다. 눈썹을 찡그린 채 서있던 아랑은 길게 신음하며 비비안의 대답이 이어지기를 침착하게 기다렸다.
“저는, 분명 절 데리고 도망치려는 가웨인에게 붙들려 있던 상황이었어요. 하지만 그때 백 대령이 모습을 드러냈고 뭔가 눈앞이 새하얗게 물드는가 싶더니….”
“백 대령?”
“아, 아뇨…. 하지만 그건 백 대령이 아니었을 거예요.”
“그레일이 변화한 모습이었다는?”
“네, 아마 그럴 거예요. 그리고 본인은 아무래도….”
거기에 대답한 것은 넬이었다.
“죽었다는 건가.”
“네?”
“아니, 혼잣말이다.”
의아해하는 비비안을 향해 대답한 아랑은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이 여자를 데리고 다시 가웨인의 곁으로 가야만 했다. 때문에 너무 많은 사실을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판단을 한 그녀는 바로 돌아섰다.
“…?!”
직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사랑하는 분께서 마음이 바뀌었다는군요.]
엘레노어의 목소리가 이어지는가 싶더니, 몸이 제대로 움직이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랑은 굳어진 채 그 소리를 들었다.
[본디 계획은 할 킬러즈의 간부였던 분들을 이용해 순차적으로 전투를 진행하는 거였지만…. 라이오넬은 마음이 바뀌었고 헥터는 스스로 미쳐버렸고, 남은 가웨인은 묘하게 성진님의 흥미를 끌어서 말이죠.]
“아버지의 이름을 그런 곳에 쓰지 마라…!”
[때문에 그렇게 된 거예요. 더 이상 비비안은 필요하지 않게 되었고, 후후, 지상으로 돌아가셔도 좋아요.]
“윽….”
엘레노어의 목소리를 들은 비비안이 괴로운 듯 신음했다. 하지만 아랑은 다시금 몸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고개를 들어 넬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의미를 담은 눈동자에 넬은 곧바로 그 의미를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타나토스의 곁으로.
이후 넬이 허공에서 모습을 감췄다. 아랑은 어떻게든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머릿속으로 지금껏 온 길을 되새기며 비비안을 향해 돌아섰다.
“윽, 우윽….”
하지만 그녀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무릎을 꿇은 채였다. 갑작스럽게 머릿속으로 말을 걸어온 신과, 기분 나쁜 전함의 내부. 움직이지 않았던 몸이 정신을 갉아먹고 있는 걸까.
“수현아!!”
바로 그때, 누군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수현…?”
그 목소리가 귀에 익는다고 생각하며 아랑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시금, 그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과 직면하고 말았다.
남자는 밝은 복도의 반대편에 서있었다.
가웨인이었다.
◇
도망쳐야 한다.
그런 자각이 든 것은 정지한 시간 속에서 그레일이 약 0.5초의 간격을 두고 빠져나왔기 때문이었다.
‘대단해.’
그렇게 말하면서도 눈앞의 존재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준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방금 전의 칭찬은 마치 첫 걸음마를 뗀 아이에게 한 것이었다는 듯이.
그것에 대응해 전투를 지속해 나가는 이준은, 분명 90억의 인류 안에서 유일하게 눈앞의 존재를 상대할 수 있는 자일 터였다. 하지만 그런 그도 전혀 상대가 되질 않았다. 몇 번이고 유효타가 들어갔지만 타격으로 이어지진 않았고 마치 연습 시합을 하는 듯했다.
그렇기 때문에, 도망쳐야만 했다.
어디로? 그건 모른다.
하지만 이곳을 빠져나가야한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가웨인은 복부가 텅 빈 감각이 이어지는 가운데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뒤로 돌아 주춤거리며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후가 어떻게 되든지, 그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는 그저 한 사람만 있으면 충분했다.
자신의 곁에 한 사람.
“젠장…. 젠장…!!”
하지만, 드넓은 복도를 내달리는 내내 가웨인은 괴로움에 몸부림을 쳤다. 이준이 했던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이 남지?
수현이가 없다면 자신에게는 무엇이 남지?
오직 그녀를 위해 살아왔던 삶인데. 그것이 거짓이라면? 위선으로서 치부 당한다면? 무너져 내린다면?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면?
어떻게 살아가면 좋지?
무엇을 위해서?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비명을 내지르고, 공허한 목소리가 온 가득 복도에 울려퍼졌다.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른 채 힘겨운 걸음을 내달리던 가웨인은 이내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이내 깨달았다.
거짓이 아니라고 증명해야한다는 걸.
거짓으로 치부당하는 게 싫다면.
그녀에 대한 이 마음이.
“…?!”
그렇게 생각하고 고개를 든 가웨인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앞에 비비안과 우아랑이 서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제대로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곁으로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이내 멈춰 섰다.
지금 자신이 그녀를 향해 다가가 봤자, 오히려 상처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머뭇거리며 서있던 그는 이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수현아!!”
거기에, 우아랑이 의아한 듯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가웨인은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도망쳐, 이곳에서…!!”
“가웨인?!”
“우아랑, 부탁한다. 수현이를 데리고 빠져나가줘!”
증명해야한다.
말뿐인 것은 더 이상 안 돼.
그렇게 생각한 가웨인은 망설이지 않고 돌아섰다. 그리고는 왔던 길을 되돌아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생각에 잠겼다.
스스로 자유로워지라느니 마니, 그렇게 이야기를 했던 이준의 말을 문득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한 가웨인은 이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 자식이 한다면 자신이 못할 리가 없다.
“…!”
눈동자를 타고,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가웨인의 머리색과 같은 붉은 빛깔이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쉰 그는 몸의 일부가 단단히 메워진 느낌을 받았다. 내장의 일부가 합금에 의해 대체된 것이었다.
거기에 갈라틴을 들고, 그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의지를 다지며 정신을 붙들었다.
마침, 위기에 몰려있는 상황이었다.
“이준!”
버럭 소리를 내지른 아랑은 곧바로 검을 휘둘렀다. 빛이 날아들어 바닥에 쓰러진 이준을 덮치려는 그레일을 베어냈다. 하지만 그는 전혀 타격을 입지 않은 듯 미동조차 없이 고개를 들었다.
“호오….”
흥미롭다는 눈이었다.
“그딴 눈으로 보지 마라!!”
그게 공연히 분노를 일게 해 가웨인은 인상을 잔뜩 쓴 채 그레일을 향해 달려들었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있던 이준이 놀란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검을 맞부딪쳐, 체격의 차를 이용해 밀어냈다.
“가웨인…?”
“아니야!”
“뭐?”
갑작스러운 대답에 타나토스가 놀라 중얼거렸다. 거기에, 분한 감정을 느끼며 고개를 돌린 가웨인은 피투성이가 되어있는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내 인생은 가짜가 아니라고!”
“….”
“일어나! 보여줄 테니까!”
도망치려고 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져 가웨인은 공연히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찝찝하다는 듯 그것을 보고 있던 타나토스가 천천히 일어섰다.
가웨인의 손을 잡지 않고.
“….”
그는 일단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옆에 있는 이 묶어둔 똥자루 같은 녀석이 함께 싸우기 위해서 돌아온 모양이었다.
“몸 상태는 좀 어떠냐.”
이준은 이마를 타고 흐르는 피를 닦아내며 물었다. 거기에 떨떠름한 얼굴을 한 채 앞으로 나섰다.
“내장 일부가 없어진 것 같지만….”
“그거 아마 재생될 때까지 그럴 거다.”
“원래 재생되는 거냐.”
“아니 당연히 안 되지만….”
합금이 그것을 도와주었다. 그 사실을 이야기하고, 서로 아무렇지도 이해한 두 사람은, 눈앞에서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그레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거야 원, 놀랍군….”
그는 검을 뽑아든 채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두 명의 기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가웨인이 돌아오는 건 예상치 못했어.”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무는 법이지.”
“난 고양이가 아니지만….”
호랑이? 아니 그 정도 차이의 수천 배 이상이 적절하리라. 그렇게 생각한 그레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섰다. 그는 검을 들어 두 사람을 겨누었다.
그 직후, 소리보다 빠른 속도로 두 사람이 날아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