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크로맨서 재킷-314화 (314/321)

314편

<-- Chapter 7 : Holy Grail -->

아니 그러면 재미없잖아?

그렇게 생각한 성진은 싱긋 웃으며 손을 들었다. 그런 그의 눈앞에는 정지한 사내가 서있었다. 의지 그 자체로 이루어져 있는 듯한 검은 재킷의 사내였다.

적당히 기른 곱슬머리, 떡 벌어진 어깨에 큰 키. 그리고 객관적으로 봤을 때 잘생긴 얼굴. 하지만…. 그것은 사내가 가진 가능성과 살아온 길의 단 1프로도 증명해주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그것으로 평가되었다.

그것이 인간의 삶이었다.

저열하고 비겁한, 모순적인 패배자의 삶.

“….”

지금의 이준처럼, 멈춰선 인간의 삶. 방황하며 인생을 낭비하다 스스로의 아집에 사로잡히고 마는…. 불행한, 패배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으로서의 삶.

그는 그 구원자가 되기 위해 강림한 것이었다.

이 땅에.

이 패배자들로 가득 찬 땅에.

“너는 모르는 건가?”

그레일은 이준을 바라보며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품안에서 날카로운 검을 꺼내든 그는 시간이 멈춘 채로 있는 이준의 뺨을 검으로 긁어냈다. 피가 조금 흐르는가 싶더니 이내 몸을 따라서 함께 정지했다.

“쓰레기 같은 현실은 없애야한다는 걸.”

그레일은 그 모습을 보며 차갑게 중얼거렸다.

그런 의미에서는 차라리 이준보다는 백시호가 나을 것이다. 그레일은 그렇게 생각하며 뒤쪽의 벽에 기대어 주저앉아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이쪽을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보며, 백시호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죽어가는 중이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진화된 인간의 대열에 들어서지 못했다. 애초에, 눈앞에 있는 이준 이외에 그레일이 원하는 대로 스스로 인간을 벗어난 존재는 없었지만.

“조금, 도와줘볼까….”

중얼거린 그는 손가락을 까딱였다.

“크헉…?!”

그리고 그가 정신을 차렸다.

아니 뿐만 아니라, 세계에 존재하는…. 이준을 제외한 모든 것이 다시금 작동을 시작했다. 그것은 그레일의 의지에 의해서였다. 그는 그런 존재로 스스로를 정의했다.

엘레노어가 어머니 자연이라면,

“나는 아버지. 시간.”

“뭐, 뭐야….”

바로 그때, 놀란 듯한 백시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해가 가질 않나? 지금의 상황이.”

그레일은 그것을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는 검을 휘두르려던 자세 그대로 멈춰있는 이준을 놀란 듯이 보았다. 얼굴에 식은땀이 만연해 변해버린 현실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준은 달랐다.

“크윽…!”

“호오.”

시간 정지를 깨부순 그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달려들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약간 놀란 그레일이 주춤 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이준은 곧바로 상황을 판단한 듯 스파다를 내던지며 동시에 그 위치에서 사라졌다.

“근본 승계…!”

그레일은 신이 나 소리쳤다.

남의 일이라는 듯, 그는 날아드는 살기를 무시한 채 이준의 위치를 예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레일!!”

바로 앞이었다.

“그래, 너는…. 타인을 망자로 되살리는 재킷이었지.”

검이 복부를 꿰뚫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그레일은 도리어 이준의 얼굴을 신기하다는 듯이 보았다. 지금 그는, 마치 신기한 물건을 앞에 두고 관찰하는 사람처럼 눈이 흥미로 가득한 채였다.

이준이라는 존재에 대한 흥미로.

이렇기 때문에 엘레노어가 그토록 이 사내를 특별히 여겼던 건가 싶었다. 어울리지도 않게 인공지능까지 붙여주고 말이다. 그때는 의아해했지만 지금의 이준은, 그레일조차 인정할 정도로 찬란하게 빛났다.

전적으로 그의 기준에서였지만.

신에게 맞서는 필멸자의 모습이.

진화해 어떻게 해서든 맞서 싸우는, 죽여도, 죽여도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망자의 모습이…. 그에게 경외감을 느끼도록 했다. 그레일은 신이 나 그를 관찰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는 이 세계를 망자들의 세계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가장 사랑하던 누나가 죽은 후로….

그래, 그것은 이쪽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그렇게 패배한…. 죽은 자들을 모조리 조종해 네 것으로 만들면 될 것 아니더냐! 이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받아쳤다.

하지만 모를 리가 없다. 그걸 알아차린 그레일은 검을 뽑아든 채 몇 번이고 휘둘렀다. 자신에게 덤벼드는 이준을 즐겁다는 듯이 바라보며 그는 다시금 중얼거렸다.

“시간은 정지한다.”

우뚝, 멈춰 섰다.

“후….”

이준이 정지한 채로 흘렀던 시간, 방금 전에는 분명 37초였다. 그것을 계산한 그레일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과연 몇 초일까.

그는 보다 빠르게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모든 인간의 종착역을 계산하는 시간으로부터?

진화하여?

“빌어먹을…!”

느긋하게 기다리던 중, 이준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25초다. 조금 더 빨랐다. 공격이 이루어지고 해골로 된 병사들이 주변에 일어섰다. 그레일은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병사들이 땅바닥에 짓눌려 부서졌다. 하지만 이준은 그런 건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다시 시간이 멈췄다.

다시 흘렀다.

27초.

“…?”

의아해 바라본 그레일은 그의 눈동자에 맺힌 붉은 피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그는 이준의 뇌가 반쯤 부서지기 직전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인간이기 때문인가.

“후….”

다시 시간이 정지했다.

이번에는 전과는 달리 지켜보지 않았다. 그레일은 멈춰선 이준의 옆을 지나치며 그의 옆구리와 팔의 힘줄, 다리의 근육 등에 제각기 상처를 입혔다. 날카롭게 피가 튀어올랐지만 금새 그 상태로 정지했다.

“큭…!”

34초.

“이, 자식…!”

비틀거리던 그가 자세를 잡고 돌진해왔다. 어깨에 방패를 세운 모습을 막아내고, 뒤쪽으로 튕겨져 날아간 그레일은 다시금 시간을 정지 시켰다.

이준은 스파다를 휘두르며 날아들던 그대로 허공에서 멈췄다. 물론 그것은 이곳에 있는 합금의 농도가 짙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옥좌에 이르는 계단에 엉덩방아를 찧고 있던 그레일은 다리를 꼬았다.

1

7초.

“역시 인간은 위기의식을 느껴야 반응하는군.”

“…!”

날아들어 휘두른 검이 그레일의 목을 꿰뚫었다. 하지만 이준은 나무토막이라도 찌른 듯한 반응과 감각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레일은 그런 그의 반응을 잠시 감상이라도 하듯 가만히 응시했다.

“…! 커헉!”

하지만 이준은 견뎌내지 못했다.

한 움큼 피를 토해낸 이준이 버텨내지 못하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눈과 코 그리고 입과 귀까지 포함해 붉은 피를 흘리며 그는 괴로운 듯 무너져 내렸다.

“흐음.”

그 모습에, 변덕스럽게도 흥미가 싹 식었다.

“그레, 일….”

“이래서야…. 악도 쓰러뜨릴 수 없을 거야.”

그는 그런 상황에서도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이준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제는 계단 위에 걸터앉아 여유롭게 턱을 괸 채로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뇌를 좀 변형시키는 게 좋을까? 송유하처럼.”

“…!”

“아, 그런 방식이거든. 뇌의 일부를 절제한 뒤에 내부에서 원자 단위로 분해해 모공으로

배출시키는 거야. 깔끔하고 쉬우며, 살을 쨀 필요도 없지.”

이야기를 들은 이준의 눈동자에 증오가 깃들었다.

“내가 왜 그랬을 것 같아?”

“알게, 뭐야….”

“그녀는 탈락했기 때문이야. 인간을 진화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이 ‘게임’에서. 그렇다면 쓸모가 없는 인간이라고 치부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 기억 나? 네가 처음으로 쓰러뜨렸던, 고그와 모그였던가?”

그레일은 쓰게 웃었다.

“그 둘은 사회적인 규범에서 너무 벗어났거든. 그냥 놔뒀더라도 알아서 게임에서 배재되었을 거야. 게임은 그런 식으로 인간을 진화시키도록 구성되었지.”

퀘스트와 레벨 업을 통해.

확연히 알 수 있는 목표치를 두고, 신화적인 소재를 차용해 이미지의 확장을 돕는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보다 진화된 인간으로서 활동하기 위한 훈련이었다.

“그러면서 에스콰이어들은 차츰 현실의 악에도 대응하기 시작한 거지. 이미지를 내가 변화시켰기 때문에 그것조차 자신의 의무가 되어버린 거야.”

그로서 이상적인 세계가 완성되었다.

공정한 신만이 존재하는, 선과 악의 경쟁. 악은 패배하며 선은 승리하는. 정의는 실현되고 인간은 보다 진화하여 스스로를 판단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이분법을…. 하고 있군.”

그 말에 이준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개소리야, 참으로 재미있는 개소리….”

“어째서? 침착하게 생각해 너 또한 세계에 만연한 악에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었으면서 그런 소리를?”

그레일은 의아해 되물었다.

그의 말은 간단했다. 이준의 가장 소중했던 송유하는, 엘레노어에 반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인간의 이기심에 사회적으로 살해당했다. 그레일은 그런 악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진화하지 못했기에.

인간으로서의 한계가 있기에 겪는.

무지한 악.

그리고 그런 무지한 악을 이용하는 더 큰 악.

모두가 잘못되었다.

누구 하나 제대로, 인간을 위하지 않는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세계를 보고 행동하지 못하여 눈앞의 급급한 이득을 좇아 세계를 멸망으로 몰아넣고 있다.

그래선 안 된다.

“간단해, 세계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나고 있기 때문이야. 점차 많은 정보가 쏟아져 들어오고, 그로서 모두가 두려워했던 거 기억 나?”

21세기 초의 인터넷 세계라던가.

모두가 미디어의 선동에 휩쓸리고 자극적인 것만을 찾아 다녔던 그 광기의 시대.

“물론 지금 더했으면 더했지만. 그래도 말이야…. 그게 결국에는 인간이 제대로….”

“주둥아리 닥쳐!!”

이준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그런 현실을 조장하고 있는 주제에 무슨 진화야! 개소리는 엘레노어 앞에서나 지껄이지 말라고! 그레일!!”

그는 더 들어주지 못하겠다는 듯 스파다를 들었다. 검은 재킷이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흩날렸고, 이준은 그 상태에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결국 세계를 지배하고 싶다는 거잖아!! 인간을 진화시키겠다는 허울 좋은 개소리를 앞에 두고! 자유를 통제하고 인간의 권리를 빼앗고 모두를 노예로 삼고…!”

소리친 그가 손을 뻗었다.

“인정 못해, 그런 세계는…!! 내가!”

“…?!”

그레일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앞의 사내가 하려는 짓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인정할 수가 없단 말이다!!”

그리고 시간이 멈췄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