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편
<-- Chapter 7 : Holy Grail -->
◇
전함 내부는 인간을 현혹하는 듯했다.
“후우….”
정신이 달리는 것을 느끼며, 우아랑은 이마를 짚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머릿속이 지끈거리며 통증과 더불어 묘한 형태의 압박감을 느꼈다.
답답함, 그와 유사한 종류였다.
“넬, 떨어져선 안 된다!”
중얼거린 아랑은 머나먼 복도 끝에 선 넬을 향해 소리쳤다. 다시금 좁아진 길을 앞서 나가던 그녀가 머쓱한 듯 다시 아랑에게로 돌아왔다.
“죄, 죄송해요. 좀 생각할 게 있어서.”
“무엇을 말이지?”
아랑은 흥미를 느끼며 물었다. 그러자 턱을 매만지며 잠시 고민을 하던 넬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합금’에 관해서요.”
“….”
아랑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침 같은 생각을 하던 중이었던 터라 그녀는 쓰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이걸, 무너뜨릴 수 있겠나?”
그리고 벽을 손으로 짚었다.
합금으로 이루어진 검은 벽은, 그녀가 손을 올리자 반응을 보였다. 손이 닿은 부위를 중심으로 형형색색의 빛이 파장처럼 퍼져 나갔다. 그것을 조금 놀라 바라보던 아랑은 이내 조심스럽게 정신을 집중했다.
그가 할 수 있다면 자신도 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아랑은 이미지를 머릿속으로 그려냈다.
“윽….”
하지만 이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괘, 괜찮으세요?”
넬이 놀란 듯 다가와 물었다. 허공에 반쯤 떠올라있는 그녀의 모습에 아랑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할 수 있나?”
“한 번 봐야겠지만….”
중얼거린 넬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뒤를 이어, 허공에 완전히 떠오른 그녀가 양손을 모아 가슴에 올렸다. 아랑은 그 새하얀 손의 중심에서 빛이 일어나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넬….”
그녀는 조그맣게 말을 중얼거렸다.
‘재구성.’
그리고 다음 순간, 벽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랑은 놀라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치 성스러운 일격에 당한 망자들처럼. 빛에 타들어가는 것처럼 검은 벽이 녹아들었고 이어서 거대한 구조물이 눈에 들어왔다.
“아, 니….”
아랑의 입에서 경악에 찬 신음이 몰려나왔다. 그녀는 주변의 벽이, 장막이나 다름없던 그것이 완전히 걷히며 드러난 현실을 마주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엘레노어는 정교한 기계 장치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것으로 하나의 세계를 구성해냈다.
마치 실험실 안의 쥐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벽을 구성하는 검은 합판이 레일을 따라 이동하고, 파이프를 통해 꿀렁거리는 검은 액체가 뒤섞였다. 검은 천사들이 만들어져 어디론가 천천히 걸어갔다.
방안을 하나의 던전처럼 구성해, 퀘스트를 수행하거나 하면 통과를 할 수 있다는 걸까. 알을 깨고 나온 인간이라도 된 듯한 기분에 아랑은 숨을 삼켰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이해하고 있었다.
엘레노어가 왜 이런 세계를 만들었는지.
“넬….”
“네, 아랑님.”
“이 안에서 비비안을 찾을 수 있겠나?”
“글쎄요, 전함의 세로 길이가 약 10km인데….”
“그녀는 이곳 어딘가에 분명히 잡혀있을 텐데.”
중얼거린 넬이 끝이 보이지 않는 함선의 반대편을 멍한 채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녀는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무언가를 계산하고 있었다.
“아랑님, 체력은 괜찮으신가요?”
“…. 내가 지금까지 뭘 해왔다고 생각하지?”
아랑은 불만스러운 눈으로 넬을 돌아보았다.
“얼마든지 괜찮다, 좋을 대로 다뤄다오.”
“네, 네!”
그리고 이내 시원하게 웃는 모습에, 넬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그녀는 정신을 집중해 이 넓은 전함 내부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같은 요령이었다.
본디 이것은 ‘게임’이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그램처럼 각 개체에 맞기 주어진 코드가 존재했다. 넬은 그 자료를 탐색해 가장 강한 녀석을 찾기 시작했다.
“찾았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멀지 않은 거리에 몇 개가 느껴졌던 것이다.
“비비안인가? 어디지?”
“그, 그건 알 수 없고…. 이쪽이에요!”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빠져나가 달리기 시작했다. 엘레노어가 지정한 게임 세계의 바깥으로.
◇
유하가 다가온다.
“준, 정말로 오랜만이네.”
유하인가? 저것은?
“가웨인, 한 마디만 하지.”
이성을 잃을 듯한 기분에, 나는 무뚝뚝하게 말을 내뱉었다. 품안의 가웨인을 일으켜 세워 멱살을 쥐고는 다가서는 유하가 검을 뽑기 전 똑똑히 말을 건넸다.
“나는 네 명줄을 잠시 이어준 것뿐이야. 상처를 꿰매둔 것에 불과하다고. 합금을 세포의 형태로 변환시켜서.”
“뭐….”
“남은 건 네가 알아서 해. 에너지가 다시 돌도록 만드는 건 너야. 너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나는 똑똑히 그것을 정했다.
게임을 오랜 기간 플레이해온 녀석이라면 분명히 내 말을 이해할 터였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이내, 가웨인을 등 뒤로 멀리 던져버렸다.
“큭…!”
녀석이 무력하게 날아갔다.
“…!”
그 사이 돌아선 나는 유하의 검을 막아냈다.
“누나가 말하는데 들어야지?”
“헛소리, 집어 치워…!”
그녀의 검은 날카롭게 뻗은 평범한 한손 검이었다. 별다른 특징도 없이, 혼자서는 약간 모자란. 그 대신에,
“후후….”
반대손의 방패와 조화될수록 위력을 발휘하는…!
“큭!”
방패가 휘둘러져 옆구리를 후려쳤다. 먹먹한 통증을 느끼며 옆으로 나가떨어진 나는 곧바로 중심을 잡았고 따라드는 유하에 맞서 다시 스파다를 들었다.
막아내고, 곧바로 튕겨낸 뒤 방패를 막았다. 조금 버거운 동작에 순식간에 숨이 차는 걸 느꼈지만 눈앞의 여자는 그런 나를 놀란 듯 바라보았다.
“역시, 넌 머리가 좋아.”
“잘 안다는 듯이…!”
“진화했기 때문인 걸까?”
“…!”
공격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물이 흐르듯, 그녀는 내 검을 손쉽게 막아내고는 공격을 이어나갔다. 나는 제대로 된 반격조차 하지 못하고 당황해 주춤거리며 뒤로 밀려났다.
“왜 내가 송유하가 아니라고 생각해?”
“바로 눈앞에서…!”
“이건 어때? 지상에 있는 송유하를 죽이는 거야.”
그녀는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러면 송유하와 같은 기억을 지닌 내가 진짜 송유하가 되지 않을까? 이건 어떻게 생각해?”
“무슨, 개소리를….”
“그럼 이건 어때? 내가 지상의 송유하를 이곳으로 정확히 순간이동 시키는 거야. 신체 조직을 분해하고 재조립하는 거지. 기억을 똑같이 이관시키는 것도 나에게 있어서는 간단한 일이야. 그럼 그건 송유하인가?”
“…!”
“나는 왜 송유하가 아니지?”
“그레일!!”
“왜 송유하가 둘일 수는 없는 거지?”
그녀는 싱긋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왜 너는 제대로 검을 휘두르지 못하지?”
푸욱. 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커흑….”
나는 비틀거리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복부에 진하게 통증이 일며 한손검에 꿰뚫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피가 뚝뚝 떨어지며 나는 무릎을 꿇었다.
“그건 진짜 피일까? 아닐까?”
“너….”
“진짜 송유하는 무엇일까?”
“너, 이 자식….”
“결국 인간은 무엇을 등불로 삼아야 하는 거지?”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아니, 나는 대체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지.
너를.
누나를.
송유하를.
“너는 어떻게 생각해? 준.”
“….”
“음~ 그러면 이건 어때? 나는 지금, 송유하가 기억을 잃기 직전의 정신 상태와 지능, 의식 수준. 그리고 기억을 모조리 카피해온 상황이야. 심지어 체중과 키, 머리카락의 길이 같은 몸의 상태까지도 모조리 말이야. 그럼 이 상황에서 내가 너한테 내 감정을 말한다면?”
그것은 진실이 되는 건가?
“내가 관두라고 하면 관둘 수 있어?”
“….”
“준, 내가 뭐라고 말할 것 같아? 송유하가 말이야.”
몸이 움직였다.
“응…?”
“닥쳐.”
중얼거린 나는 스파다를 찔러 넣었다.
“…. 준.”
“유하 ‘누나’는 죽었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중얼거렸다. 그런 사실을 인정해야만 하는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돌아올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병실에서, 아버지와 여동생을 잃고 모든 것으로부터 배신을 당한 그 시점에서. 누나는 삶의 의지를 잃고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나는 ‘유하’와 함께 살아갈 거다.”
그리고 남은 것은 유하였다.
“후후, 마음도 강해지고…. 이제 얕볼 수 없겠어.”
“시끄러워, 사내놈이 여자 흉내 내지 말라고.”
“나는 사내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야. 보다 진화한 인류를 가로막는 극복 가능한 재앙일 뿐이지.”
“뭐…?”
놀라 뒤묻고 뒤를 이어 그녀의 모습이 바뀌었다.
얼굴이 길게 늘어지며 늙은 개와 같은 형상을 이루었다. 커다란 가슴의 지방이 복부로 내려가고 검은 코트가 생겨나 나는 ‘백 대령’으로 모습이 변하는 그레일의 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왜 송유하의 기억이 사라졌는지 알아?”
녀석은 차갑게 중얼거렸다.
“패배한 인간을 다시 검으로 벼려내기 위해서야.”
“뭐….”
“세계에는 명백하게 정돈된 악이 필요해. 그 존재만으로 인간을 하나로 묶어줄, 그리고 동시에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진화할 수 있도록 동기를 제공하는.”
아서리안.
“하지만 그것은 단지 실험이었을 뿐이야. 인간이 정말로 재킷을 통해 진화한 상태에서, 뇌를 제대로 활용하여 이 혼란스러운 세계를 스스로 나아갈 수 있는가.”
녀석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취하는 거야. 인간이 제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태어난 생명을 그저 방구석에서 게임이나 쳐하다가, 아무것도 모른 채 무작정 누군가를 혐오하다가 죽지 않도록. 정말 세계에 만연한 악이 무엇인가에 대해 알려주기 위해서. 나는 그렇게….”
어느덧, 모습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나는 그래서 스스로 태어났다.”
녀석은, 찬란하게 황금빛으로 빛나는 갑옷을 입은 채 고개를 들었다. 신성한 무언가를 받아들이듯 건틀릿을 낀 손을 가슴께로 들어 그대로 부드럽게 웃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악을, 만들어서?”
나는 거기에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그로서 찬찬히.”
“너잖아.”
“….”
“아무리 봐도 그런데, 악당.”
나는 쓰게 웃었다.
해골의 하관이 새겨진 마스크, 검은 재킷을 입은 채. 나는 황금의 갑옷을 온몸에 두른 천사와 같은 사내를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내가 틀린 말을 했나?”
“너라면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했다만.”
“그럴 리가. 나는 인간인데, 너와 다르게.”
“나 또한 인간이야. 보다 진화된.”
“나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던 거냐?”
“일의 한 축을 맡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
그레일은 쓰게 웃었다.
“하지만 아니었군.”
“당연한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군….”
나는 어이가 없어 다시 스파다를 뽑아들었다. 그레일은 싱긋 웃으며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렇다면 역시 다른 용도로 쓰는 편이 낫겠어.”
‘뭐…?“
“너 또한 악으로 만들어주지.”
“어째서?”
“간단한 이유다. 내 세계에서 혼란을 일으키는 존재는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래, 그런 이유에서….”
중얼거린 녀석이 이내 표정을 차갑게 굳혔다.
온다.
나는 그것을 느끼고 곧바로 뒤로 빠지려고 했,
“시간이여, 멈추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