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편
<-- Chapter 7 : Holy Grail -->
◇
전함 내부로 들어서자 지독할 정도로 깊은 어둠이 몰려들었다.
“여기가 어디야…?”
길게 뻗은 복도는 잠수함의 그것을 연상 시켰다. 곳곳에 파이프가 툭 튀어나온 것이나 그런 게 말이다. 하지만 쓸 곳이 있어 달아둔 것은 아닐 터였다.
단순한 연출이겠지.
이 거대한 전함을 띄우는 힘은, 고작 그따위 저급한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보다 고차원적인 힘을 필요로 했다. 나는 그 사실을 어렴풋이 이해했다.
지금 문제될 것은 아니지만.
“넬.”
나는 어둠 속에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잠시 대기.
아마 이 안이 엘레노어가 만들어낸 장소인 만큼 내 말이 넬에게 닿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일단 움직이자고 생각했다.
안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조금 걸어, 길이 오른쪽으로 틀어졌다. 그렇게 나아가 다시 오른쪽. 그게 정확히 네 번째 될 시점.
“….”
그렇군, 빙글빙글 돌게 만드는 건가.
이 어둠과 좁은 복도는 그걸 눈치채는 게 늦도록 만드는 거고. 그것을 깨달은 나는 지금이, 입구로 들어온 뒤 얼마 걷지 않은 자리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네모난 길을 돌아 원래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했다.
“좋아….”
그 상태에서 계속 걸어 모퉁이까지 향한 나는 눈을 감은 채 벽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정신을 집중해 무언가를 ‘행’하려고 했다.
결국 이 벽의 재질도 ‘정보량 송신 합금’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내가 다루지 못할 것도 없다.
“윽….”
머리가 지끈거리며 울렸다. 동시에 나는, 눈가를 타고 흐른 피가 볼에 닿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눈앞의 벽을 내 마음대로 다루려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공했다.
“후우.”
검은 벽이, 가루가 되어 부서지듯 눈앞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손을 뻗은 채 앞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나는 바닥이 푹 꺼진 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문제될 것은 없었다.
무너진 벽을 수복해 바닥에 길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나는 정신을 집중해 점차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
“준!”
넬이 나타났다.
“크헉?!”
집중해 걷던 나는, 놀라 하마터면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스스로 외나무다리를 만들어 걷고 있었다는 자각이 들어 나는 중심을 잡고 자리에 섰다.
“노, 놀랐잖아!”
그리고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하지만 넬은 그런 내 반응에도, 뭔가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듯 바로 밑을 손으로 가리켰다. 나는 그 장소를 눈으로 확인했다.
“뭐야…?”
그리고 의아해 되묻듯 중얼거렸다.
바로 발 밑, 넬이 가리킨 방향에서 불꽃이 타오르는 게 눈에 들어왔다. 검은 벽의 틈새에 마치 긴 선처럼 불꽃이 이어진 채였다. 나는 거기에 우아랑이 관련되어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아랑님이 벽에…!”
넬의 말은 심플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고 곧바로 밑으로 뛰어내렸다. 다이빙 선수마냥 몸을 아래로 향한 채 망설이지 않고 날아들었다.
불꽃을 마치 결승선처럼 지나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바로 밑의 벽에 매달려 있는 우아랑을 발견했다. 그것을 알아챈 나는 녀석의 검을 계승해 발밑에 위치하게 하고는 지그시 밟았다.
“우아랑!”
그 직후 우아랑의 옆으로 뛰어올라, 스파다를 벽에 찔러 넣었다. 거기에 매달리자 끙끙 앓던 우아랑이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뭔가 불편하다는 생각을 했다.
“스컬…!”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어이가 없어 중얼거린 나는 스파다를 쥔 손에 힘을 주어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우아랑을 향해 손을 뻗었고, 이내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렸다.
녀석에게 누군가 매달린 채였다.
검은, 무언가가.
“어머, 나…. 이게 누구야…?”
“헥터…?”
나는 어이가 없어지는 걸 느끼며 중얼거렸다. 벽에 박아 넣은 검에 매달린 우아랑의 발에, 다시금 헥터가 매달린 채였던 것이다. 놀란 나는 저도 모르게 허공을 맴돌던 우아랑의 검을 조종했다.
헥터의 팔을….
“안, 된다!!”
우아랑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뭐…?”
그런 녀석의 반응에 놀란 나는, 이내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헥터의 손을 놓을 순 없다. 녀석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조금만 기다려.”
중얼거린 나는 스파다의 위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동시에 정신을 집중해 먼저 장소를 면밀히 살폈다.
이 드넓은 ‘절벽’을.
폭은 3km에…. 깊이는 1km 정도인가. 거기에 반대편까지의 길이는 500m쯤. 이런 절벽을 이루고 있는 게 모조리 정보량 송신 합금이라는 생각을 하니 그 거대한 규모에 혀가 내둘러질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의 나라면.
“윽…?!”
검은 바람이 발밑에 휘몰아쳤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우아랑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고, 그 아래의 헥터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내가 하는 행동의 의미를 이해하고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해보였다.
나는 조종하고 있었다.
정보량 송신 합금을.
“뭐, 뭐야?!”
놀란 헥터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내가 두 사람이 밟고 설 수 있도록 벽 안쪽에서부터 좁은 발판이 튀어나도록 만들어냈기 때문이었다.
“윽….”
신음한 우아랑이 거기에 착지하고, 팔이 밀려나게 되자 헥터가 손을 놓았다. 그렇게 두 사람이 제각기 발판에 올라서 떨어졌고 나는 그 중 우아랑의 발판을 아까 전처럼 앞으로 길게 늘이기 시작했다.
“자, 좀 앞으로 가봐.”
그리고 스파다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윽….”
좁은 다리의 위에서 우아랑이 놀라 신음했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날 돌아본 녀석은 이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채 내 뺨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스컬, 눈이….”
“나를 이끌어줘.”
그런 그녀에게 나는 무뚝뚝하게 속삭였다.
“뭐?”
나는 대답하는 대신 눈을 감고 손을 내밀었다. 혈액의 이물감을 느끼며 기다리고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우아랑의 손이 부드럽게 내 손을 감싸는 걸 느꼈다.
“가….”
상냥히 이어지는 우아랑의 목소리.
“잠까아안!!”
그것을 끊어내듯 헥터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나는 자리에 멈춰서 곧바로 말을 이었다. 돌아보지는 않고, 그저 헥터의 위치를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거기 가만히 있어. 다 끝나고 데리러올 테니까.”
“뭐?! 무슨 개소리야! 끝낸다니!!”
“엘레노어를 쓰러뜨리고 오겠어.”
“…?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가능성을 봤으면 애초에 오지도 않았어.”
“미친 새끼!”
헥터는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언제나 허울 좋은 꿈에만 심취해있군 타나토스…! 하지만 요행은 여기까지야. 이 이상은 신의 영역이라고!”
“그걸 위해서 여기까지 온 거야.”
“죽어야만 정신을 차릴 모양이군!”
“….”
이 이상 들어주기가 힘들었다.
“윽?! 뭐, 뭐야!”
헥터가 있는 발판을 타고 오르도록 창살을 만들어냈다. 당황한 듯 목소리가 이어지고, 나는 머리가 지끈거리며 통증을 호소하는 가운데 그녀를 창살에 가두었다.
“타나토스으으으으!!”
헥터는 증오에 차 소리를 내질렀다.
“가자, 우아랑.”
“알겠다. 인도하지.”
“아, 뒤에 잘 보고 걸어. 뒤에 아직 안 만들어져 있는데 막 갔다가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부, 불길한 소리 좀 하지 마라!”
“그럼 그건 제가 볼게요!”
뒤쪽에서 목소리가 이어졌다.
“굉장하네요, 준.”
넬이었다.
“…. 별 거 아니야.”
경외감에 찬 목소리에 나는 머쓱해져 말을 얼버무렸다. 그리고는 정신을 계속 집중해 합금으로 이루어진 다리를 만들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검은 바람이 휘몰아치는 걸 느꼈다.
그것은 마치 연금술과 같은 광경이었다. 허공을 떠돌던 검은 세포들이 모여 하나의 물질을 형성하는 듯했다. 나는 계속해서 그것을 만들어내며 그대로 우아랑의 도움을 받아 반대편까지 걸음을 옮겼다.
“벽에 도달했다.”
“…. 그래.”
얼마 후, 부드러운 목소리에 눈을 떴다.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우아랑의 얼굴이었다.
“정말로 대단하군.”
녀석은 부드럽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뒤를 이어, 옆에서 빙글 돌아 모습을 드러낸 넬이 우아랑의 뒤쪽으로 이동해 길게 뻗은 벽을 짚었다. 그러자 그것을 이루고 있던 합금이 검은 소용돌이에 휩쓸리며 사라져 크게 구멍이 벌어졌다.
“가실까요?”
넬은 안내하듯 중얼거렸다.
구멍의 너머에 길이 드러나 나와 우아랑은 그곳까지 훌쩍 뛰었다. 바닥에 착지한 나는 곧바로 벽에 기대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조금 무리를 했다.
“스컬…!”
“아니, 괜찮아. 가자.”
하지만 걱정하는 듯한 우아랑의 목소리에 곧바로 평온을 가장했다. 나는 눈 밑에 찐득하게 굳어진 피를 닦아내며 일어서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풍경이 조금 변했다.
“….”
“뭔가 좀, 고풍스러워졌군.”
우아랑이 얼떨떨한 듯 목소리를 냈다.
이전과는 달리 복도는 엄청나게 넓어졌다. 폭이 100미터 정도. 발밑에 양탄자가 깔리고, 기둥이 좌우로 간격을 둔 채 늘어선 옛날의 성 같은 구조였다.
아니…. 보다 다른 느낌이었다.
“제기랄.”
“어지러우면 잠시 쉬었다가는 게….”
다시금 이마를 짚는 나를 보며 우아랑이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하지만 나는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래서가 아니야.”
나는, 이곳과 정확히 같은 장소를 가본 적이 있다. 올해 초. 내가 게임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
찰박.
“응…?”
길게 뻗은 길의 이후 이어지는 바로 앞의 호수.
“내 뒤에 있어, 우아랑.”
“대체 무슨 일….”
“빨리.”
나는 차갑게 중얼거렸다.
호수의 뒤로 안개가 낀 상태였다. 고개를 갸웃거린 우아랑이 등 뒤에 서자 나는 긴장을 늦추지 않은 상태에서 호수를 돌아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 뒤로 높은 옥좌가 드러났다.
정확히 알고 있는 풍경이었다. 이곳은 내가 당시 잡혀갔었던 라쿠스 기사단의 본부였다. 평범한 건물 같은 외양과는 달리 내부는 이런 식이라 놀랐던 기억이 났다. 모든 것이 그 구조와 정확히 일치했다.
단 하나를 빼고.
“좀 늦었군.”
옥좌 위에 삐딱하게 앉은 가웨인이 그렇게 말을 내뱉었다. 새하얀 코트,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 평소와 같은 모습에 나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옥좌를 올랐다.
“엘레노어는 어디에 있어.”
“아쉽게도, 내 역할이 그곳으로 보내지 않는 거라.”
녀석이 중얼거리고, 살기를 느꼈다.
“윽…!”
뒤로 물러선 나는 턱 아래를 스치는 날카로운 감각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자 가슴을 타고 피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셔츠가 찢어진 틈을 따라서 옅은 상처가 난 게 눈에 들어왔다.
스쳤다는 생각도 못했는데.
“싸우자고. 타나토스. 마지막이야.”
약간 당황하고 있자 싱긋 웃은 가웨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곧장, 오른손에 들고 있던 갈라틴을 세차게 휘둘렀다.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세찬 빛이, 곧바로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