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편
<-- Chapter 7 : Holy Grail -->
◇
인류는 크나큰 혼란에 휩싸였다.
갑작스러운 신의 강림을 모두가 알아보았다. 그녀는 지구의 끝에서 끝에 능히 닿을 정도로 뻗은 채였고. 밤과 아침을 가르는 장소로부터 각자 상반신을 뻗은 채로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인간을 내려다보았다.
새하얀 머리칼의 여신.
인종을 구분 지을 수 없으며, 단지 신비롭게 웃으며 지구를 양손을 뻗어 끌어안고 있을 뿐인 여신.
“…?!”
“아, 아아!!”
누군가는 겁에 질려 도망치려 들었고,
“빌어먹을!”
“저게 뭐야! 미사일이라도 쏴!!”
누군가는 호전적으로 대응하려 들었다.
“신이시여.”
“비나이다. 저희를 구원하소서.”
그리고 기도를 하려는 사람들까지.
전 세계의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대륙마다, 그리고 인종마다 반응이 제각기 달라지는 모습에 엘레노어는 순식간에 그 자료들을 수집하고 분석하여 하나의 결과로 만들어냈다.
그리고 깨달았다.
역시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는 걸.
신으로서의 역할이 있음을.
[저는, 틀리지 않았어요.]
그녀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것은 전 세계에 있는 모두에게 들렸을 터였다. 그러자 세계의 어딘가에 있던 우정현이 이를 빠득 갈았다.
“개소리 지껄이고 있군.”
대한민국, 서울 시내의 국회의사당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빙긋 웃은 엘레노어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뒤를 이어, 조그맣게 변하여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우, 우와아아악…?!”
그녀의 강림을 알고 사람들이 놀라 비명을 질러댔다. 새하얀 머리칼에 신을 상징하는 후광, 아무것도 입지 않았으나 빛으로 인해 아무도 볼 수가 없었다. 각지와 각 시대에 있던 신들의 공통된 모습을 빚어내 엘레노어는 그렇게 진정히 신으로서 모습을 드러냈다.
[어째서죠?]
그리고 그녀는 질문을 던졌다.
눈앞에 당당하게 서있는 짧은 머리의 여자에게.
모두들 그녀를 두려워하여 도망치거나 무릎을 꿇었음에 전혀 그런 낌새를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신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가요? 그렇다면 저는?]
엘레노어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빙긋 웃었다.
그리고 대답을 듣기 전, 그녀는 다른 땅으로 향했다.
[저는 무엇일까요?]
세계의 지배자였던 미국의 대통령에게.
“무슨….”
검은 피부의 여자 역시 그녀를 앞에 두고도 약간 놀라기만 할 뿐 물러서지는 않았다. 그것을 바라보던 엘레노어는 빙긋 웃으며 다른 장소로 향했다.
영국의 총리.
중국의 주석.
브라질의 대통령.
카메룬의 대통령.
그 외 수많은 국가의 리더들에게 가서 얼굴을 보여도, 다들 같은 반응이었다. 그들 모두가 놀랐지만 물러서지는 않고 엘레노어에게 나름대로 맞서려고 했다.
반면, 일반 시민들은 달랐다.
더욱이 빈민이 될수록.
의존적이었다. 현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다.
기도를 올리고 모여들어 그녀를 칭송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엘레노어는 이내 빛으로 현해 한 도시에 내려앉았다. 팔레스타인의 가자 지구. 수십 년 전부터 존재하지도 않는 신의 땅을 되찾는답시고 인간이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최악의 분쟁 지역.
패배한 인간들이 빛에 이끌려 모여들었다.
어린아이 하나가 그녀에게 조그마한 꽃을 내밀었다. 어두운 밤, 유일이 찬란하게 빛을 내는 엘레노어는 그것을 받아 귀에 꽂았고 싱긋 웃으며 아이의 뺨을 쓰다듬었다. 백린탄의 영향이 곳곳에 가득한 얼굴을.
이내 그것이 깨끗하게 아물었다.
“…!”
기적의 행사에 주변의 사람들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엘레노어는 아이의 곁을 자연스럽게 지나쳐 반대편으로 향했다. 철조망이 늘어선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 너머에는 무장한 병사들과 갖가지 무기들이.
[사라지세요.]
엘레노어가 명령을 내리자 그것은 녹아들기 시작했다.
철조망이.
병사가 든 총이, 방탄 헬멧과 조끼가.
탱크가, 미사일이.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갔다. 원래부터 그곳에 없었단 듯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그 모습을 확인한 엘레노어는 다시 날아올랐다. 거대하게 변해 지구를 내려다보며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어째서 인류는 고통을 받는가.
그 대답은 간단했다.
무지하기 때문이었다.
강자는 더욱이 강해지고 약자는 먹힐 뿐인 세계. 정의는 땅에 떨어졌고 심판하는 이는 없다. 경전은 유리하게 해석되며 모두가 악에 등을 돌린 채 살아가고 있었다.
소돔과 고모라.
그런 세계.
그런 무지한 인간들.
“헛소리 지껄이지 말라고…!!”
그 가운데 누군가 일어섰다.
◇
나는 분노를 느꼈다.
“네놈의 그런, 말도 안 되는 놀이에 희생된 사람이…!”
나는 입술을 빠득 깨물며 검을 움켜쥐었다. 엘레노어는 세상의 곳곳에 손을 뻗을 정도로 거대해진 상황이었고, 나는 그런 세차게 노려보았다.
“대체 몇이나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들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소리를 내질렀다.
“송유하라고 했던가?”
뒤를 이어 그레일이 차갑게 목소리를 냈다.
“그 여자를 잊은 건 아니야. 물론 전임 갤러해드이니 만큼 무척이나 잘 기억하고 있지. 하지만….”
허공에 떠오른 그가 손을 뻗었다.
“세상에 만연한 부패에 그녀 또한 희생되었을 뿐.”
“네놈들이 만든 이 세계로 인해서…!”
“아니지, 아니야. 나는 단지 암시했을 뿐이야.”
“뭐…?”
“세계의 축소라고. 그래서 아서리안이었던 거고. 그래서 전설이자 신화였던 거지. 사람의 마음을 이끌.”
그레일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네 누나는 희생된 거야. 이런 현실로 인해.”
“이 새끼…!!”
나는 참지 못하고 날아들었다.
하지만 휘두른 검은, 녀석의 몸을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아니, 휘두른 시점에 그레일은 그 자리에 없었다.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직후, 뒤쪽에서 그레일의 웃음을 참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딜 보는 거야?”
그리고 깨달았다.
녀석이 순간적으로 시간을 멈췄음을.
“그레일!!”
나는 우아랑의 검을 소환해 발밑에 두었다. 그리고는 곧장 그 위에 올라타 떨어지려는 몸을 지탱하도록 하고는 그레일을 향해 거세게 뛰어올랐다.
하지만 녀석은 다시 사라졌다.
“젠장!”
이런 말도 안 되는 건 대체 어떻게 상대해야 돼?!
[기다리고 있겠어. 타나토스.]
남은 것은 오직 목소리뿐이었다.
그레일은 완전히 지상에서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든 나는 높이 떠올라있던 항공모함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마치 강림하는 천사처럼 지상을 향해 천천히 내려왔다.
그리고 거기에서 천사들이 떨어져 내렸다.
검은 날개를 단, 죽음의 천사들.
“하…!”
어이가 없어 웃은 나는 곧바로 뒤를 돌아보았다. 뒤늦게 깨어나 상황을 파악하던 우아랑과 모드레드가 곧이어 내 쪽으로 날듯이 달려왔다.
“스컬!”
“이준 씨!!”
“둘 다, 너무 늦는다고.”
한숨을 내쉬며 핀잔을 주자 두 사람은 다른 의미에서 조금 당황한 듯했다. 하지만 어쨌거나 상황을 이해한 듯 보여 나는 짧은 시간동안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하지.
다들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
죽음의 천사들이 지상에 강림하는 가운데,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생각의 정리를 마쳤다.
“넬.”
“네, 준.”
“내 말이 서울 시내의 모두에게 들리도록 해줘.”
나는 그런 부탁을 했다. 거기에 고개를 끄덕인 넬이 어디론가 다시 사라졌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머릿속에 할 말을 정리하기 시작햇다.
“스, 스컬?”
“무슨 말을 하시려는 건가요?! 시간이 없는데…!”
“아, 그러게.”
두 사람의 당황한 듯한 물음에도 나는 얼핏 멍청하다 싶을 정도로 실없이 대답했다. 사실 거의 앞까지 다가온 천사들에게 정신이 팔려서기도 했지만.
[말씀하시면 되요!]
그리고 넬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짧은 시간동안 다시 생각을 했다.
무어라 말을 하면 좋을까.
갑작스러운 상황에 겁을 집어먹은 녀석도, 냉정히 상황을 파악하는 녀석들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런 녀석들에게 무어라 말을 해야 내 의지가 전달이 될까.
사실 답은 아까부터 나온 상태였다.
이 망자들에게 할 말은, 간단했다.
“일어서, 싸워.”
오직 그것뿐.
“알겠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은 모드레드였다.
“잠시, 어깨를.”
그렇게 중얼거리며 뛰어오른 그녀는 내 어깨를 밟고 더욱이 위로 도약했다. 그리고는 공중에서 우아하게 회전하며 여러 발의 단검을 쏘아 보냈다.
“나도 마찬가지로, 알겠다.”
우아랑 역시 마찬가지였다. 십자가와 같은 형태의 검을 뽑아든 그녀가 반대편 어깨를 밟고는 훌쩍 뛰어올랐다. 그것을 기점으로 아래에서 목소리가 이어졌다.
“좋아, 간다! 다들 정신 차리고!”
[에어리어 7, 여기도 반격할게!]
[에어리어 3, 여기는 안와! 지원할 곳을 지시해줘!]
[에어리어 5…. 혹시 이쪽으로 좀 와줄 수 있어?]
구분을 지어두었던 각 에어리어로부터 목소리가 이어졌다. 제일 먼저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은 린슬렛으로, 나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에어리어 11, 마음 놓고 싸워. 최선을 다할게!]
트리슈.
[에어리어 6. 반격하겠습니다.]
베디비어까지.
“좋아, 해보자고.”
나는 씨익 웃으며 중얼거렸다.
◇
“우습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하윤의 목소리는 조금 시니컬했다.
“….”
그녀가 하려는 말을 명확히 이해한 성진은 쓰게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 그가 상황을 관망하기 쉽도록 주변에 영상을 재생시키던 하윤은 무리를 지어 싸우기 시작한 에스콰이어들을 한심하다는 듯 보았다.
“지금까지 실컷 엘레노어의 협력자로 있던 주제에.”
“뭐, 이조차도 그녀가 바라던 바지만 말이야.”
그렇기 때문에 아직까지 다들 재킷의 힘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사실 이런 식으로 신의 위용을 내보이고 전투를 벌이는 일 자체가 모두 그녀의 의도였지만.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
그녀가 성진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분명 나타날 이유는 충분했음에도. 성진은 잠시 엘레노어의 그런 행동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았다.
“그 청년도 알고 있을까요?”
그 사이 하윤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벽을 가득 메운 창들의 중심에 서있는 성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에스콰이어들이 전투를 벌이는 영상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그는 마치 별들 사이에 서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어렴풋이.”
성진은 생각을 멈추고 대답했다. 답이 나왔음에도.
사실 그 답을 안다고 해서 자신이 어쩔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으므로.
“이해하고 있을까요?”
“그건 잘 모르겠네.”
어려운 질문이 연이어 성진이 쓰게 웃었다.
“사실 사람은 자기 일을 더 모르는 법이니 말이야.”
“그렇다면 그가 과연….”
“당연히 지겠지.”
성진은 단호히 중얼거렸다. 하윤이 잠시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다시 살아날 거야. 그는 그런 인간이니.”
“성진님….”
“일단 믿고 맡겨보자고.”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은 성진은 전투가 한창인 서울 시내의 영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