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편
<-- Chapter 7 : Holy Grail -->
어둠에 잠긴 방송국에는 엘레노어가 만들어낸 ‘가상’이 덧씌워진 채였다. 하지만 그 구분은 점차 무의미해졌다. 아니, 단어의 의미 자체가 변화하는 듯했다.
가짜로 규정되었던 가상.
진짜로 규정되었던 현실.
그런 구분이 점차.
“길을 안내할게요.”
넬의 목소리와 함께 눈앞에 노란색으로 된 밝은 선이 생겨났다. 동시에, 어둠에 물든 장애물들의 테두리를 감싸 주변의 풍경을 완전하게 보완해주었다.
“믿음직스럽군.”
“헤헤, 일종의 편법이지만요.”
아랑은 넬을 대동한 채 나아가기 시작했다.
방송국의 안을 면밀하게 살피며, 하나뿐인 문에 기대어 서서 바깥의 상태를 살폈다. 옆에 선 넬이 잠시 집중을 하는가 싶더니 함정과 몬스터들을 표시해주었다.
치트라도 쓰는 기분이었다.
눈앞의 함정은, 회전하며 범위 내의 침입자를 인식하는 시스템인 듯했다. 그리고 그게 잠시 옆으로 돌아간 사이 벽을 박차고 날아오른 아랑은, 복도를 내달려 함정을 향해 다가갔다. 넬이 그 범위를 면밀하게 표시해주어 아랑은 별 문제없이 함정을 지나쳤다.
“아랑님, 검을!”
그리고 몬스터와 마주쳤다.
넬의 말에 따라 아랑은 곧바로 검을 뽑아 휘둘렀다. 동시에 둔중한 몬스터의 곁을 스치고 지나가 자리에 멈춰 섰다. 그녀는 날카롭게 숨을 내뱉으며 돌아섰다.
그리고 깨달았다.
“네가 있었기 때문이군!”
공격을 계속 이어나가며. 그녀는 허탈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나무 거인이 뒤로 돌아서려다 정강이 뒤쪽을 베여 무릎을 꿇고 아랑은 무릎을 밟고 뛰어올랐다.
“넬!”
“네, 네넬?”
넬이 당황한 듯 눈을 깜빡이며 예전의 말투로 되물었다. 그리고 그 사이, 이마에 아랑의 검이 박혀 비틀거리던 거인이 반대편으로 쿵 하고 쓰러졌다.
“그 남자가 이곳까지 올 수 있던 이유는.”
바닥에 내려선 아랑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눈앞에서 당황해 어깨를 움츠리고 있는 ‘인공 지능’을 약간의 경외감이 깃든 눈으로 바라보았다.
“네 도움이 꽤나 컸겠군.”
“에헤헤…. 과찬이세요!”
뺨을 붉게 물들이며 웃은 넬은 이윽고 다시금 집중하기 시작했다. 어쩐지 답답했던 속이 뻥 뚫리는 듯하여, 아랑은 돌아서 내달리기 시작했다.
“….”
넬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하나로 묶은 뒷머리를 휘날리며 달려 나가는 아랑의 모습은 당당하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넬은 조금, 아니 무척이나 부끄러운 기분을 느꼈다.
이런 칭찬을 들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후후, 넬이 없었으면 위험했을 상황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요? 준은 언제나 무모한 사람이었니까.”
“그래, 상대하는 입장에서조차 느껴졌지, 그게.”
“….”
“뭐지?”
갑작스레 입을 다문 넬을 보고 아랑이 자리에 멈춰 섰다. 한동안 잠깐 시선을 피하던 그녀는 이내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 아니…. 뭔가 한도 끝도 없을 것 같네요.”
“그 녀석에 대한 이야기가 말인가?”
“네, 확실히 많은 이야기가 있죠.”
“나를 곤란하게 만든 시간들…. 인가.”
쓰게 웃은 아랑이 그대로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야기를 듣기 위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넬을 향해.
“나중에 들을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군.”
“즐겁겠네요. 유하님의 커피와 함께.”
그것까지도 조금 궁금해졌다. 유하라는 사람에 대해. 이대로 이야기를 계속 나누었다간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았던 아랑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돌아섰다.
“이, 일단 가자, 넬.”
“네! 아랑님.”
그리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미로처럼 얽힌 트리슈의 성안을.
◇
몇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그 첫 번째로는, 모드레드가 인간의 언어를 구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내 말은 알아듣는 듯하였고, 지능 자체도 평소와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 말을 잘 들었다.
내 말에 한정되는 것이었지만…. 여러모로 순수(?)해진 모드레드는 혼자서 앞장서 나아가더라도 내가 부르면 곧바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꼬리를 흔들 듯 머리를 쓰다듬어줄 때까지 한동안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건, 지치는 일이었다.
물론 귀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리라.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모드레드는 절대 아니었다. 그것이 나를 비참하고 또한 괴롭게 만들었다.
“뭘 그렇게 표정이 심각해?”
그 사실을 알아챈 것일까. 가웨인이 입을 열었다.
“귀여우니 됐잖아?”
“비비안이 저래도 같은 말이 나오겠냐?”
“….”
녀석은 금방 입을 다물었다.
나는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린 가웨인을 보고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우리는 서로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알아차리게 되었다.
최악의 기분이었다.
그녀가 원래의 그녀가 아니게 되는 것은.
린슬렛, 트리슈, 모드레드. 아니 물론 발렌타인이나 베디비어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지금까지의 내 모든 것이 부정을 당하는 듯했다. 모조리 희석되는 듯했다.
이 현실과 가상이 하나가 된 세계에서.
이게 엘레노어와 그레일이 원하는 세계라는 걸까…?
“…. 이준.”
잠깐 고민에 빠지려던 찰나, 뒤쪽에서 가웨인이 날 불렀다. 고개를 돌려 그를 돌아본 나는 표정이 사뭇 진지해진 그를 보고 의아한 기분을 느꼈다.
“왜 그래?”
“방금 깨달은 사실인데.”
“뭐가.”
내가 되묻자 녀석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우리가 현재 위치한 곳은, 방송국 안쪽에 있는 세트장이었다. 예능의 촬영장인 듯 거대한카메라와 반사판이 곳곳에 놓여 있었고 거대한 나무 같은 게 늘어선 채였다. 조금 옛날 방식으로 촬영하는가 싶었는데.
“아.”
아무래도 그게 아닌 듯했다.
“모드레드!”
나는 버럭 비명을 지르며 앞장선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우며 날 돌아본 모드레드가 싱긋 웃었다.
그리고 그 머리 위로 무언가 떨어졌다.
몬스터…?!
“야 인마!”
나는 순식간에 린슬렛의 방패를 피워 올리며 내달려 나아갔다. 그리고 모드레드를 낚아채며 동시에 내리 찍히는 거대한 무언가를 막아냈다.
꽈앙! 하는 충격.
“와, 몬스터 진짜 잘 만들었는데?”
뒤쪽의 가웨인이 여유롭게 목소리를 냈다.
“이게, 대체 뭐…. 야?!”
어깨가 무거웠다.
힘을 주어 그것을 튕겨낸 나는 모드레드를 안아든 채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 거대한 나무가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였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말하자면 나무 거인이다.
눈코입 같은 게 달려있지는 않았고 단지 굵은 나뭇가지가 팔과 다리처럼 붙은 몬스터였다. 키는 3미터에 가까운 정도로 천장에 닿을락말락하였다.
그리고 한 둘이 아니었다.
“아, 가웨인?”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헛소리 하지 말고 싸워.”
나는 은근히 빠지려던 녀석을 제지했다.
하지만 그것을 확인하며 돌아보던 중, 생각보다 몬스터가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숫자가 적어도 열 마리 이상으로 꼼꼼하게 우리 주변을 포위한 채였다.
“아, 모드레드?”
나는 애써 침착하게 그녀를 불렀다.
“?”
입을 다문 채 모드레드는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날 올려다보았다. 조그맣게 품안에 양손을 모으고 있는 것이 다람쥐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는 이내 뭔가를 깨달은 듯,
“…♡”
내 볼에 입을 맞췄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
고개를 갸웃거린 모드레드는 판초를 쓱 내려 어깨를 드러냈다. 이걸 원하느냐고 묻는 듯이.
“….”
“와, 이준. 의외로 호색한이었네.”
부정할 수 없는 내 자신이 미웠다.
“윽?!”
바로 그 순간, 녹색의 빛이 날아들었다.
아슬아슬하게 반응해 그것을 피한 나는 모드레드를 안아든 채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리고는 곧장 고개를 들어 빛이 날아든 장소를 눈으로 확인했다.
머플러…?
“트리슈!”
불빛이 비추는 공간 너머에 서있던 누군가가 모습을 감췄다. 그 모습을 짐작해 버럭 비명을 내지른 나는 모드레드를 자리에 서게 만들고는 스파다를 뽑아들었다.
“모드레드!”
“…!”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장난이었던 거냐!”
그 의중을 알아채 소리치자 모드레드는 귀엽게 웃었다. 당황해 서있던 나는 곧바로 뒤를 돌아보았다.
“가웨인! 부탁한다!”
“엥? 뭐를?”
“물론 여기 몬스터들!”
중얼거리고, 나와 모드레드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쓸 스킬은 하나밖에 없다.
검은 가루가 흩날렸다.
우리는 서로의 모습이 사라진 걸 알아차리고는 곧바로 앞으로 뛰쳐나갔다. 거대한 나무 거인의 다리 사이를 빠져나가 트리슈가 사라진 방향으로 내달렸다.
“어…?! 어?! 야! 야, 이준!!”
가웨인의 목소리가 이어졌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
트리슈는 길목 곳곳에 함정을 설치해두었다.
방송국 안쪽으로 갈수록 내부의 구조는 복잡해졌다. 스튜디오와 복도, 지나치면 스튜디오. 그곳에서 갑작스레 튀어나오는 몬스터들이나 함정은, 아마 모드레드가 아니었다면 내 전진을 완전하게 봉쇄했으리라.
모드레드는 단검을 투척해 그런 함정들을 완전히 파훼했다. 날아드는 화살은 튕겨내고 바닥이 꺼진다 싶으면 두 명으로 분열(?)해 나를 도왔다.
“…♡♡”
그럴 때마다 칭찬을 바라듯 날 보았지만.
“자, 잘했어!”
나는 그렇게 외치며 계속해서 나아갔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검은 머플러를 두른 트리슈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우리로부터 계속 능숙하게 도망쳤고 나는 점차 지쳐가는 것을 느꼈다.
끝없는 소모전을 하는 기분이었다.
대체 무슨 수로 이런 ‘성’을 구축한 걸까 싶을 정도였다. 수많은 에스콰이어들을 지닌 헥터나 린슬렛과는 달리 트리슈는 철저하게 혼자인 듯했다.
그것은 모드레드도 마찬가지였지만.
“뭔가, 방법이….”
인상을 쓴 나는 이내 머릿속에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리고는 그것을 위해 나직이 중얼거렸다.
조금 그리움을 담아.
“트리슈.”
어깻죽지의 뼈를 변형시켰다.
두 대의 카메라가 주변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함정도 거의 없어져 단순히 쫓고 쫓기는 추격전에 불과했다. 나는 그것을 느끼고 카메라를 풀었다. 그로서 트리슈의 움직임을 읽어냈다.
그녀는 원형을 그리고 있었다.
방송국의 B동, 예능 스튜디오의 안을.
“모드레드! 여기서 기다려!”
“…!!”
고개를 끄덕인 모드레드가 끼익, 자리에 멈춰 섰다. 나는 남은 카메라를 두고 트리슈를 추격하는데 더욱이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는 그대로 한 바퀴, 스튜디오를 돌았다. 트리슈가 카메라를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트리슈!”
자리에 멈춰 선 그녀의 모습이 육안에 들어왔다.
총사들이 쓸 법한 챙이 넓은 모자. 머플러에 셔츠. 오늘은 조끼로 몸을 감싸고 바지를 입은 채였다.
“…?!”
당황해 날 돌아본 트리슈가 활을 겨누었다. 자리에 우뚝 멈춰선 나는 괴로운 듯 눈썹을 찡그리고 있는 그녀를 향해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나야, 이준.”
나는 마스크를 벗어 땅에 내던졌다.
“…!!”
화살이 날아들었다. 어깨를 스쳤다. 하지만 나는 그걸 무시하고 트리슈를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때 산에서 기억 안나?!”
이상한 일이다. 분명 유혹을 하라고 했을 텐데.
젠장,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날 도와주겠다며! 이 게임을 끝내도록!”
화살이 이번에는 정확히 어깨에 명중했다. 찌릿 통증을 느낀 나는 그보다 훨씬 놀라 입을 가린 트리슈를 발견하고는 멈추지 않은 채 계속 걸었다.
“트리슈!!”
다가가, 그녀를 안았다.
========== 작품 후기 ==========
솔직히 모드레드 귀여워서 이대로 놔두고 싶기도 한데 깨어났을 때 반응이 더 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