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편
<-- Chapter 7 : Holy Grail -->
“여기서요?”
“안으로 내려갈래? 습도 최악일 텐데.”
“…. 근처에 대화하기 좋을 장소를 물색해볼게요.”
넬이 눈앞에 팝업창을 띄웠다.
“아니, 됐어. 여기면 왕궁이 부럽지가 않지.”
하지만 진아 씨는 고개를 내저으며 근처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는 콘크리트가 모여 높게 솟은 자리로 가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거기다…. 괜히 주변을 경계할 필요도 없으니.”
그녀는 차갑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쪽은 가웨인? 용케도 정신을 제대로 가누고 있네. ‘게임의 캐릭터’로서 여기에 있는건 아니지?”
“‘게임의 캐릭터’라니요?”
우아랑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곁으로 다가섰다. 그러자 담배를 한 모금 마시고 그 연기를 내뱉은 진아 씨가 품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네모난 상자.
“윽….”
넬의 반응에 나는 그게 무엇인지 금새 알아차렸다. 안색이 창백해져 물러난 그녀가 등 뒤로 숨었고, 나는 눈썹을 찡그린 채 입을 열었다.
“디멘션 커넥터. 다 꺼.”
하지만 진아 씨가 선수를 쳤다.
“저기, 아무리 그래도….”
“아니 그쪽의 요정 언니를 믿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엘레노어가 엿듣는 걸 원하지 않거든.”
“괘, 괜찮아요. 준.”
그렇게 말하는 넬은 조금 쓸쓸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내가 곤란해져 입을 다물자, 녀석은 도리어 괜찮다는 듯이 싱긋 웃고는 디멘션 커넥터 안으로 사라졌다.
“칫.”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여, 나는 귓바퀴에 달고 있던 디멘션 커넥터를 종료하고 떼어냈다. 붉은 빛으로 점멸하는 그것을 손으로 쥐고 진아 씨를 돌아보았다.
“그게 뭔데?”
그 직후, 뒤쪽에 서있던 가웨인이 물었다.
“엘레노어에게 대항할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한 수단.”
“…?”
“맛보고 싶으면 디멘션 커넥터 끄지 않고 있어봐.”
“이모님….”
“백문이 불여일견.”
우아랑이 조심스레 만류했지만 진아 씨는 짓궂게 웃었다. 이런 순간에서조차 여유가 넘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가웨인의 반응을 기다렸다.
사실 조금 기대에 차서는.
“윽…!”
그리고 다음 순간, 녀석은 몸을 기울였다.
금방이라도 구토를 할 듯한 모양새였다. 진아 씨가 양철통마냥 번쩍이는 기계를 작동시킨 직후였다. 괴로워하며 앞으로 몸이 고꾸라진 가웨인은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를 보는 듯했다.
“자아, 여기까지.”
그리고 진아 씨는 기계를 껐다.
“허억, 헉….”
“어때. 재미있지?”
“남자한테 강간당하면서 마약하는 기분인데.”
그는 거칠게 욕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괴로운 듯 신음을 내뱉는 가웨인을 보고 나는 쓰게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진아 씨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다시 기계를 작동시켰다.
“모르가나를 사용하셨나요?”
나는 곧장 질문을 던졌다. 거기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를 드는 손동작을 취해보였다. 나는 그것이 일종의 버릇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모르가나를 들고 있는 것이었다.
“갑작스레 일이 그렇게 된 직후였어. 마치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한 걸 폼페이에서 지켜보는 듯했지.”
진아 씨는 가볍게 신음했다.
갑작스레 세상이 변했다.
그녀는 상황을 그렇게 회상했다. 천지가 개벽한 듯했다고. 번쩍하며 빛이 일더니 모든 것이 순식간에 변화했다고. 그것은 마치 신의 강림과도 같았다고.
“나와 정현이의 디멘션 커넥터 안에는…. 특수한 방화벽 프로그램이 설치되어있어. 그게 우리를 살렸지.”
고작 5초 정도였다.
서진아라는 일류 프로그래머가 온힘을 다해 만든 프로그램이 뚫리는데 걸린 시간이 말이다. 하지만 그 사이 두 사람은 모르가나를 작동시킬 수 있었고 엘레노어의 지배로부터 빠져나오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너희를 기다리고 있었어. 혹시나 싶어 모든 모르가나를 자동으로 작동하도록 하면서. 그리고 그게…. 저 친구의 정신을 들게 한 모양이고.”
진아 씨는 가웨인을 손으로 가리켰다.
“…. 방법은 있습니까?”
나는 상황을 대충 파악하자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거기에 진아 씨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날 바라보았다.
“무슨 방법?”
“신을 죽일 방법이.”
“이제 그리 부르는 게 어색하지가 않네.”
“그녀 스스로 신이 되었으니까요.”
입으로 내기에 무척이나 불편한 말이었지만 나는 그 사실을 인정했다. 그녀는 신이다. 우리가 네트워크로 구성된 가상의 세계를 완전히 버리지 못하는 이상.
아니 버린다고 쳐도, 그게 있는 이상 그녀는 정보량 송신 합금이라는 물질을 통해 현실에 개입하겠지.
그리고 한없이 전지에 가까워질 터였다.
우주의 진리를, 세계의 법칙을 모조리 알아내겠지.
마지막으로 그걸 자신의 힘으로서 벼려내겠지.
그로서 한없이 전능에 가까워질 터였다.
“있습니까.”
“물론. 통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지만.”
“가능성을 바라고 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 역시 죽여도 살아난다던 남자답네.”
진아 씨는 쓰게 웃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호수에 성검을 반환하는 거지.”
그리고는 곧바로 설명을 시작했다.
“마녀의 도움을 받아서.”
그녀는 조금 사악하다 싶을 정도로 웃었다.
◇
그리고 한 시간 뒤,
“정말로 믿는 거냐?”
높은 곳에 올라서 있자니 옆에 있던 가웨인이 말을 걸어왔다. 나는 어둠속에서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뜬 녀석을 힐끔 돌아보았다.
“뭘.”
그리고 되물었다.
“저런…. 일반인의 말을.”
“너보다는.”
대꾸하고 곧장 무시했다.
“….”
밤바람이 차갑게 볼을 에고 지나갔다. 성큼 거리며 겨울이 다가온 것을 느꼈다. 그 뒤를 잇듯 가웨인이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기색이 느껴져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녀석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또…. 헛소리나 하겠지.
병신.
이 자식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그래서 싫어하는 것이었다. 금방 또 이렇게 타인을 무시하고 헐뜯기를 좋아했으니까. 제대로 상대해줄 필요가 없었다.
이런 녀석이 진심으로 대하는 건 비비안정도겠지.
아이러닉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비비안은 가웨인을 자신의 인생을 망친 존재로 의식하여 질색하는데 말이다. 녀석은 정반대로 그녀를 계속해서 위했다. 입에 감히 담는 것조차 못할 정도로 신성시 여겼다.
“….”
다리를 고쳐주고 싶어 했었지.
“어떻게 할 거냐, 넌.”
성공이든 실패든 이 일도 이로서 어떻게든 마무리가 될 터였다. 그렇게 되면 이후에 아마 녀석과 내가 더 이상 얽힐 일도 없으리라.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는 조금 신경이 쓰였던 사실을 물었다.
“뭘.”
거기에 녀석이 내가 했던 것과 똑같이 대답했다. 그것을 바라보며 짧게 한숨을 내쉰 나는 말을 이었다.
“비비안.”
“몰라.”
“뭐…?”
“모른다고.”
“왜 몰라?”
나는 어이가 없어지는 걸 느끼며 물었다. 짜증이 조금 덧붙었다. 나는 가볍게 혀를 찼다.
“그건 그녀가 정할 문제니까.”
“….”
이해하는 내가 싫었다.
상자를 열어보기 전까지는 모른다. 녀석은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리라. 그래서 모든 것은 그녀가 어떻게 결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거겠지.
“마음대로 해라….”
나는 질려 대답했다.
“이번 일을 돕는 이유도 그래서야. 그녀를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을 시험해보기 위해서.”
“알겠으니까.”
“확실히 해둬. 트리스탄에게 시험을 해보라고.”
“저기, 친구야. 안 물어봤어.”
“뭐?”
“안 물어봤다고.”
나는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거기에, 가웨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리고는 건물의 옥상에 있는 좁은 물탱크 위에서 나를 향해 완전히 몸을 돌렸다.
“아 그래, 뭐 좀 재미있는 이야기 좀 해볼까? 역으로 내가 물어보는 건 어때? 네 여자 문제를.”
“뭐…?”
“결국 송유하냐?”
“그걸 내가 왜 대답해야하지.”
“아, 그러게. 내가 이 문제를 너희 모두가 모였을 때 화두에 올려두면 어떻게 될지 볼만하겠는 걸.”
“….”
말이 안 나오는 순간이었다.
“린슬렛? 둘이 아주 분위기 좋던데. 나랑 처음 맞붙었을 때잖아. 전까지 티격태격하던 너희들이 말이야.”
그것을 알아차리고, 가웨인은 잔학하게 웃었다. 녀석은 내게 다가와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동무를 했다.
“트리스탄과 모드레드는 모르겠고…. 게임 인공지능에 회장 따님까지 말이야.”
“하아, 자꾸 너희들 이상한 소리를 하는데.”
나는 즐겁다는 듯 묻는 녀석의 말을 끊었다.
“뭐가?”
“우아랑이 대체 왜….”
“어라? 물어볼까? 저기, 우 대위.”
[뭡니까.]
우아랑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순간적으로 심장이 철렁해져, 나는 가웨인의 멱살을 쥐고 잡아 올렸다. 녀석이 그 더러운 낯짝 면면에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노려보았다.
“아니, 그래. 알았어. 알았다고.”
“뭘 알겠다는 거지? 이준.”
“…. 그녀가 내게 호감이 있다는 것 정도는.”
나는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그래? 그녀만?”
“아니, 모두! 모두 다!”
저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하지만 그거잖아…. 한 번 사귀면 끝까지 여성을 책임 져야 하는데. 물론 거리를 두지 않고 모조리 받아들인 내 잘못이 제일 크긴 하지만 말이다.”
“풉…!”
당황해 말을 잇자니 가웨인이 그런 소리를 냈다.
“?”
“푸하하하핫!”
“뭐, 뭘 웃는 거냐?!”
“아니~ 그동안 표정 하나 안 바뀌고 할 일 무뚝뚝하게 하던 ‘이준’님께서 여자 문제로 당황해 골머리를 썩히고 있는 게 웃겨서! 아하하하하핫!”
배꼽을 붙잡고 웃음을 터뜨리는 가웨인. 나는 그제야 녀석이 왜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를 깨닫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분한 마음에 주먹을 쥐고 떨었다.
“그러니까 잘 하라고. 유혹.”
그리고 잠시 후, 녀석은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네가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다….”
나는 거기에 애써 반응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돌아섰다. 그러자 뒤를 이어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준비됐어?]
“네, 바로 출발하게 해주세요. 제발.”
진아 씨의 목소리였다. 거기에 한숨을 내쉬며 대답한 나는 이윽고 물탱크 위로부터 훌쩍 뛰어올라 ‘방송국’ 방면으로 날아올랐다.
“….”
나는 이곳에서 트리슈를 유혹해야만 했다.
통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 작품 후기 ==========
이제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된다고 하는데 ㅠㅠ독자님들 모두 몸 조리 잘 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