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편
<-- Chapter 7 : Holy Grail -->
◇
“저기이…. 가웨인님?”
넬이 구석에 있던 녀석에게 말을 걸었다.
“뭐.”
“음, 일단 회장님만 뵙고 나면 곧바로 갈 테니까요.”
“….”
“비비안님이 걱정이신 거죠?”
“주제넘게 말 걸지 마.”
좋아, 여기까지.
우아랑과 함께 서있던 나는 곧바로 돌아서 가웨인의 뺨을 올려붙였다. 짜악,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이 빙긋 웃었고 나는 뒤를 잇는 목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주, 준!”
물론 유…. 아니, 넬이었다.
“야만적이에요!”
“아니, 별 수 없잖아. 상대가 사람이 아닌데.”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어이가 없다는 듯 큭큭 대며 웃던 가웨인을 노려보았다. 이윽고 녀석이 고개를 들어 차가운 눈동자로 나를 노려보았다.
“이 새끼는 지금 개나 돼지랑 마찬가지인 거라고.”
“줄여서 개돼지인 건가?”
“누군가 자존심을 챙겨주려고 든다면 말이야, 가웨인. 그걸 닥치고 받아들이던지 아니라고 하던지. 어느 쪽이든 좀 제대로 반응을 보이란 말이야.”
“‘누군가’가 그런다면 말이지.”
“….”
녀석이 다시금 도발했다.
나도 멍청이는 아니고 이제는 슬슬 깨달았다. 이 자식은 일부러 내 화를 돋우기 위해 넬에게 이런 언행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아마 내가 반응하면 할수록 더 심해질 따름이겠지. 그래, 분명한 일이었다.
“넬, 이쪽으로.”
“아앗…?!”
하지만 알고 있음에도 참는 것에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돌아선 나는 곧바로 넬의 손을 붙잡고 우아랑의 곁으로 돌아갔다.
“어, 어린애도 아니고…!”
“우아랑, 어떻게 되고 있어?”
넬이 그렇게 나무랐지만 나는 무시하고 우아랑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예전의 집이 있던 근처까지 와서 계속해서 탐색을 거듭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완전히 박살이 나버렸기 때문이었다.
인근의 건물들이. 나와 가웨인이 헬기를 한 대 동반해 싸웠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폭격을 맞은 것처럼 완전히 쑥대밭이 되어있어 부서진 콘크리트의 잔해들로 발밑이 엉망진창이었다.
“…. 이쪽이다.”
하지만 우아랑은 침착했다.
그녀는 곧바로 재해의 형태를 분석하는 프로그램을 켜 무너진 바윗돌을 가상에서 재조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작업을 통해 거리를 원래의 모습으로 뇌 속에서 보완해내고는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체 왜 이렇게?
엘레노어의 짓인가?
“넬, 혹시 누가 이런 건지 알 수 있을까?”
“아…. 기록이 시작된 시점을 살펴볼게요.”
그녀는 믿음직스럽게 대답했다.
미사일 같은 걸 발사한 걸까. 아니면 폭발물? 하지만 과연 그런 수단을 써서 이곳을 폭파시킬 필요가 있으려나 싶었다. 엘레노어는 그런 ‘야만적인’ 짓을 할까?
“이건….”
그리고 다음 순간, 넬이 당황한 듯 목소리를 냈다.
“뭔데?”
나는 고개를 돌려 화면을 확인했다. 넬이 다시금 영상을 재생하기 시작해, 부서진 건물들이 다시금 원래대로 돌아왔다. 평범한 가정집이 늘어선 골목길 사이로 검은 인영이 내려섰다.
“트리슈…?!”
나는 놀라 중얼거렸다. 거기에 반응한 우아랑이 힐끔 뒤를 돌아보았고, 영상 안의 트리슈는 멍한 채 CCTV 카메라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카메라가 그 주변에 떠올랐다.
“잠깐, 우아랑….”
나는 의미심장한 기색을 느끼고 중얼거렸다. 앞장서 나아가던 녀석이 천천히 돌아서, 나는 계속해서 눈앞의 영상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몬스터들이 몇몇 나타났다.
하지만 전혀 트리슈의 상대는 되지 않았다. 그녀는 가볍게 몸을 비틀어 팔목에 감긴 화살을 쏘아 몬스터들을 쓰러뜨리고 계속해서 앞으로 전진했다.
그녀는 혼자였다.
하지만 이윽고, 일반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집밖으로 나와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다들 트리슈와 마찬가지로 눈동자가 공허함에 빠진 채였다.
모두 엘레노어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는 것일까.
철저하게 만들어진 상황 속에서 트리슈는 허공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그리고 잠시 후, 번쩍하는 빛과 함께 녹색의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큭….”
우아랑이 괴로운 듯 신음했다.
날카롭고 두터운 화살이 건물들을 부수기 시작했다. 콘크리트로 된 주택에 번개처럼 정확히 내리꽂힌 그것은 건물을 지탱하는 코어를 관통했다. 몇 발 이어지지 않은 화살비에 건물들이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지만 그 참상이 짐작됐다.
그리고 문제는 잠시 후 발생했다.
“어머니!”
무너진 건물의 사이에서, 우정현 회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마에 피를 흘리며, 그녀는 트리슈를 향해 양손을 들고 다가가 무어라 말을 건넸다.
항복의 의사를 전하는 건가?
트리슈의 목적이, 회장이었다고?
나는 당황해 멍하니 영상을 바라보았다. 그러는 사이 회장은 CCTV를 힐끔 확인하고, 자신이 일어선 장소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멍하니 있던 트리슈가 회장을 낚아채듯이 품에 안아들었다.
“안 돼…!”
그리고는 사라졌다.
우아랑이 뒤늦게 소리를 내질렀다. 하지만 그야말로 늦다 못해 완전히 끝난 시점이었다. 나는 눈썹을 찡그린 채 고개를 들어 CCTV의 위치를 확인했다.
“넬, 영상의 시간을 현재로.”
“네?”
“빨리.”
나는 멍한 채로 중얼거렸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넬이 내 지시에 따랐다. 나는 눈앞에 커다랗게 떠오른 스크린이 우리를 비추기 시작하는 것을 확인했다. 화면의 끄트머리였다.
“흐음….”
“왜 그러세요?”
“혹시 회장님이 모습을 드러낸 이후의 영상을 함께 표시해줄 수 있을까?”
“으, 으음. 해볼게요!”
넬이 잠시 눈을 감았다. 그 사이 고개를 슬쩍 든 나는 뒤로 돌아서서는 괴로움에 몸을 떨고 있는 우아랑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 틈에 쪼그려 앉아 의욕이 없이 죽어가는 가웨인을 발견했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빌어먹을….”
“괜찮을 거야.”
“스컬….”
어깨에 손을 올리자 눈썹을 찡그린 채 돌아선 녀석이 그렇게 숨을 삼켰다. 금방이라도 어머니를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절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준, 표시할게요.”
그리고 잠시 후, 넬의 말이 이어졌다. 동시에 고개를 든 나는 눈앞에 등장한 회장을 보고 순간적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아랑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이렇게 보시는 게 편할 것 같아서.”
번쩍거리며 영상 특유의 밝은 빛이 일어선 회장의 몸에 비췄다. 피를 흘리며 다가온 그녀가 CCTV가 있는 장소를 보고는 돌아서서 어느 한 장소에 시선을 보냈다.
“저곳.”
나는 그 위치를 손으로 가리켰다. 순간적으로 시간이 멈춘 양 영상이 정지하고, 뒤를 이어 넬이 내 말을 이해하고는 회장의 시선이 향한 위치를 표시했다.
“저기는…. 내가 살던 집이 아니다만.”
우아랑이 놀란 듯 중얼거렸다.
“확인해볼 가치는 있겠지.”
하지만 나는 무시하고 발밑을 조심하며 안쪽으로 걸었다. 기왓장이나 콘크리트가 박살이 낸 채로 바닥에 잔뜩 깔려 모래사장을 걷는 듯한 기분이었다.
“준.”
그러는 사이 공중에 휙 떠오른 넬이 내 뒤로 다가왔다. 그녀는 마술사처럼 눈앞의 지형에 팔을 휘둘렀고 불투명한 선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기록에 의하면 저곳에 바닥 문이 있는 모양이에요.”
녹색의 선이 바닥에 네모난 문의 테두리를 그려냈다. 제대로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우리는 금새 마음이 통했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바닥에 떠오른 녹색 빛의 곁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후.”
일단 조약돌처럼 놓인 잔해들을 조금씩 걷어내기 시작했다. 이어서 바닥에 커다랗게 들러붙은 콘크리트 벽이 드러나, 나는 허리를 숙이고 힘껏 들어올렸다.
“무겁…!!”
크게 먼지가 일었다. 와르르 돌이 무너지는 소리가 이어져 나는 이를 꽉 깨물며 이쪽의 키 높이까지 솟아오른 바윗돌을 아예 반대편으로 힘껏 넘겨버렸다.
“확실히 바닥에 문이 있군.”
“하지만 잠겨 있네요.”
다가온 우아랑과 넬이, 흙먼지가 쌓인 바닥 문을 확인했다. 허리에 슬쩍 무리가 가는 걸 느끼며 나는 두 사람의 뒤를 따라 무릎을 꿇고 상태를 확인했다.
“부술까요?”
“아마 그랬다간 큰 일 날걸.”
나는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우아랑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째서지?”
“뭐, 조금만 기다려보면 알 거야.”
그렇게 중얼거린 나는 가만히 눈앞의 문을 들여다보았다. 우아랑과 넬 역시 의아한 듯했지만 나를 믿고 입을 다물었다. 어둠 속에서 침묵이 찾아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 늦지 않아서 다행이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위로 열리기 시작했다. 펌프 같은 걸 통해 공기를 불어넣어 여는 듯하여 나는 조금 열린 문을 잡고는 위로 뜯어냈다.
“고마워, 힘들었는데.”
그 안에는 서진아가 있었다.
“이모님?!”
“그래, 아랑아. 오랜만…. 인가?”
괴로운 듯 문으로부터 시작되는 계단 아래에 서있던 그녀가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그러더니 우리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담배를 피우면 산소를 쓰게 된단 말이지.”
“네…?”
거기에 넬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서 고민이었어. 정현이는 너희가 올 거라고 했는데…. 그게 언제인지는 모르잖아? 그래서 피울까 말까. 엄청나게 고민을 하고 있었지.”
싱긋 웃은 진아 씨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잡아 그녀를 안에서부터 나오게 도왔다.
땀으로 흠뻑 젖은 셔츠에 청바지. 진아 씨는 연한 갈색의 머리를 흔들며 우리를 돌아보았다.
“그럼 일단, 상황을 정리해보실까?”
========== 작품 후기 ==========
인기 투표라는 걸 하는 중입니다.
유하가 선전하고 있군요. 최근 들어 등장이 줄었는데도 불구하고... 정실의 힘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