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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크로맨서 재킷-287화 (287/321)

287편

<-- Chapter 7 : Holy Grail -->

피를 잔뜩 흘렸더니 도리어 머리가 상쾌해졌다.

“후우….”

아랑은 입가에 진하게 묻은 그것을 닦아냈다. 어린 소녀가 어른의 흉내를 내듯, 붉은 빛깔이 입술에 번졌다. 길게 한숨을 내쉰 그녀는 자리에 주저앉은 채 고개를 들었다. 가녀린 목의 선이 땀에 젖어 반짝였다.

그 주변은 미처 사라지지 못한 시체들로 가득했다.

아랑이 생각하기에 시체라는 표현은 어딘가 이상했지만, 그 외에 어울리는 단어는 없었다. 검은 기사들은 그녀의 날카로운 검에 베여 쓰러졌기 때문이었다.

그 수십 수백이 넘는 존재들이 모조리.

전혀 손조차 쓰지 못하고.

“….”

사실 조금 신났다.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중간에, 조금 이상하게 웃었던 것 같기도 해 아랑은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잠시 괴로워했다.

하지만 이내 일어섰다.

비틀거리며.

“이제 뭘 하면 되지?”

중심을 잡고 검을 품안에 꽂아 넣은 아랑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녀는 마왕의 성처럼 검은 바윗돌에 잠식된 방을 걸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싸울 때는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조금 이질적이었다.

본디 이곳 최상층은, 회장을 비롯해 CEO들의 개인 사무실이 밀집해있는 구역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벽을 모두 허문 것처럼 크고 널찍하게 공간이 남았다.

들어올 때 뭔가의 모퉁이를 돌긴 했는데.

싸움의 도중 허물어버린 걸까.

“엘레노어!”

아랑은 고개를 들어 허공을 향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하지만 벽에 튕겨져 나온 소리가 울릴 뿐이었다. 그녀는 싸움의 전만 하더라도 신이나 계속 말을 걸었던 엘레노어의 부재에 눈썹을 찡그렸다.

“꼬리를 말고 도망쳤나….”

그녀는 눈썹을 찡그린 채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내,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반대로, 기뻐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퀘스트를 완료하였습니다.

- 경험치가 상승하였습니다.

- 당신의 이름은….

“알고 있다.”

갤러해드.

그것을 새기듯 우아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딱히 이렇다 한 큰 변화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바닥을 꾹 쥐어보거나 숨을 크게 쉬어 몸의 상태를 점검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

눈앞에 빛이 일었다.

새하얗고 찬란하게. 둥그런 구체 같은 것이 이내 명확히 형태를 갖추어 가슴의 위로 떠올랐다.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던 아랑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설마 이게, 새로운 힘?

“아니….”

그게 아니다.

전혀 관련이 없는 물건이었다.

그녀는 그 정체를 확인하고,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놀라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고는 달려들어 가웨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귀찮다는 듯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파던 녀석이 고개를 들어 멍청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별 수 없었다고.”

“지금 그 자식 몸 상태를 알고서…!”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멱살을 쥔 손가락 끝에 통증이 일었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

짜증을 내며 손가락을 쳐낸 녀석이 날 거세게 노려보았다. 붉은 머리가 흩날리는 걸 마주 바라보던 나는 이내 어이가 없어지는 걸 느끼며 다가섰다.

“네놈을 믿는 게 아니었어.”

“하이고 언제는 믿으셨단 것처럼….”

거기에 발끈해, 멱살을 쥐었다.

“젠장….”

하지만 금새 놓았다. 이런 식으로 해봤자 끝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말이 맞았다.

나는 녀석을 믿어선 안 되는 것이었다.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어.”

높게 올라선 벽으로 다가가자 가웨인이 짤막하게 목소리를 냈다. 붉은 빛을 내는 벽을 손으로 만진 나는 이윽고 손에 들고 있던 스파다를 거세게 휘둘렀다.

“윽…!”

카앙! 하는 소리.

“소용없다니까.”

뒤를 이어 가웨인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녀석은 다가와, 비웃듯 내 어깨를 쥐며 뒤로 물러서게 만들었다. 나는 흠집조차 없는 벽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다 시도해봤어.”

“그 말을 어떻게 믿으란 거지.”

“아 ‘주인님’께서 이렇게 화내실 걸 알았으니까?”

녀석은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으로 따옴표를 그려보였다. 나는 질리는 기분을 느끼며 뒤로 물러섰다.

“빌어먹을, 우아랑….”

어떻게 하면 좋지?

“너무하군. 사람을 두고 빌어먹는다고 하다니.”

고민에 빠지려던 찰나, 목소리가 이어졌다.

“…?!”

놀라 고개를 돌린 나는 뒤쪽에 등장한 여성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대로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자니 뒤를 이어 그녀가 가까이 다가왔다.

우아랑이었다.

“장소를 알아냈다.”

그녀는 지친 모습이었다. 한쪽 어깨를 감싸 쥔 모습을 보고 나는 당황해 가까이 다가가 부축했다.

“너, 괜찮은 거야?!”

“어머니가 계신 장소를….”

그렇게 이야기한 우아랑은 어째선지 빙긋 웃었다. 그리고는 생체기가 슨 볼을 내 팔에 기대며 말을 이었다.

“기대는 것도 그다지 나쁜 기분은 아니군.”

어쩐지 후련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는 그런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하지만 대답은 않고 가볍게 숨을 고르던 아랑은 이윽고 볼이 붉어진 채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알았다는 말이다.”

“뭐, 뭘?”

“네게 기대니 마음이 편하다는 사실을.”

“….”

왜 이래, 이 녀석.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럴 수도 없는 노릇이겠지.”

뒤를 이어, 어깨를 툭툭 털며 일어선 우아랑이 눈앞에 팝업창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몇 번 누르더니 무언가 반짝반짝 빛나는 물체가 눈앞에 떠올랐다.

“어머니는 안전한 곳에 계신 모양이다.”

“회장님?”

우아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의 예상을 빗나갔지만.”

녀석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조금 신이 나 보이는 모습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을 던졌다.

“퀘스트가?”

“그래, 단순히 몬스터를 배열해놨을 뿐이더군. 우리는 원래 어머니께서 퀘스트의 마지막에 있을 거라고 예상하지 않았더냐. 하지만 안전하게 탈출하신 모양이다.”

“그럼 이 빛나는 게….”

“어머니께서 자신의 위치를 암시해둔 사진이다.”

나는 그것을 손에 쥐었다.

그러자, 빛이 흐트러지며 그것이 명확히 형태를 갖추었다. 직사각형의 사진 데이터였다.

나는 그것을 빛에 비추어서 제대로 확인을 해보았다.

가족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와 남자, 꼬마 여자애가 어느 집 앞에 모여서 씨익 웃고 있었다.

“이건?”

“대략 15년 전의 우리 가족이다.”

“….”

우아랑은 조금 부끄러워하는 듯했다.

나는 그 모습을 조금 관찰이라도 하듯 바라보았다. 확실히, 셋 다 아는 사람인만큼 묘하게 신기했다. 더욱이 신이 나서 개구쟁이처럼 웃고 있는 우아랑의 모습이.

“이, 이제 그만 봐라.”

그렇게 조금 감상하고 있자니, 우아랑이 내 손에서 사진을 가지고 갔다. 나는 어이가 없어 고개를 들었다.

“아니, 아직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이제 대충 어딘지는 알 것 아니더냐.”

녀석은 불만스럽다는 듯 날 노려보았다.

“…. 아, 네가 그때 살던 집?”

“그래, 현명하신 선택이다. 그때는 디멘션 커넥터가 없었던 만큼, 엘레노어도 위치를 특정하긴 힘들 테니까.”

중얼거린 녀석이 뒤로 돌아섰다.

“일단은 그곳으로 간다.”

그리고 유리로 된 문을 열고 쏟아져 들어오는 빛을 등지고 섰다. 그 너머에서는 그때까지도 전투를 벌이고 있는 에스콰이어들과 내 병사들이 가득했다.

“다시금 넬을 구출하고 빠지는 걸로.”

“그, 그래.”

“움직일 수 없진 않겠지? 타나토스, 가웨인.”

“흐음…. 즐거워 보이네. 우 대위님.”

당황한 나와는 달리, 가웨인은 빙긋 웃으며 그 뒤로 따라붙었다. 하지만 그게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뒤를 돌아본 우아랑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갤러해드다.”

“….”

아니 게임에 너무 몰입한 거 같은데, 이 분.

탈출에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소모되지 않았다.

“매번 떠도는 신세로군….”

“징징댈 체력이 있으면 걷기나 해.”

지친 건지 길게 한숨을 내쉬는 가웨인을 나름대로 독려(?)한 나는 그대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둠이 뚝 떨어져 숨을 쉴 때마다 입김이 나왔다. 사실 재킷을 입고 있기 때문에 자각을 하지 못했지만 겨울에 가까운 계절, 거기에 밤이었다.

조금 쉬어야 할까.

“우아랑.”

그렇게 생각한 나는 제일 앞서 걷고 있던 우아랑을 향해 말을 걸었다. 고개를 힐끔 돌린 녀석은 곧이어 내가 하려는 말을 깨달았는지 자리에 멈춰 섰다.

“그럼, 잠시 쉬었다 갈까요?”

넬이 확실하게 언질을 넣었다.

“그래, 아침부터 꽤나 움직였으니 말이야.”

다들 정신적으로 지쳐있는 상황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적당히 근처에 있던 편의점으로 들어섰다.

“야야, 그래도 모텔 같은 데서 쉬자….”

가웨인이 계속 징징거렸지만 무시했다.

“어서오세요오….”

들어서자, 카운터에 앉아 매사가 귀찮다는 듯 턱을 괴고 있는 손님의 모습이 보였다. 도무지 지금의 상황을 ‘자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일단 마실 거라도….”

“삼각 김밥 먹어도 돼?”

“….”

난 가웨인을 무시하고 싶었다.

“저기, 준?”

“그래, 너도 삼각 김밥 먹고 싶으면 먹….”

“아, 아뇨. 그게 아니라요.”

“응?”

나는 당황한 듯 목소리를 내는 넬을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지금 서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전 세계로 중계가 되고 있는 모양이에요.”

그녀는 눈앞에 떠오른 팝업창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충격적인 한 마디에 우리는 모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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