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편
<-- Chapter 7 : Holy Grail -->
◇
“가상과 현실이 뒤섞인 세계가 될 거야.”
“…?”
헬기의 날개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오는 가운데였다.
고개를 돌린 나는, 눈앞에 서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셔츠에 검은 바지, 어깨의 위에 코트를 걸친 채 그는 별장 앞마당에 둥그렇게 새겨진 경계선의 뒤에 서있었다.
경계선이 빛나기 시작했고, 둥그런 그것의 안쪽에 H라는 글자가 새겨진 채였다. 그리고 그 위에는 거대한 운송용 헬기가 자리를 잡은 채였다.
하윤과 우아랑은 헬기의 안쪽에서 이륙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뒤늦게 헬기에 오르려던 나는, 멍하니 말을 걸어온 한성진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무슨 소리를 하자는 거야?”
품평이라도 하는 듯한 얼굴에 차갑게 대꾸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거지.”
빙긋 웃은 그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날카롭게 귓가를 두드리던 헬기의 소리가 잦아들어 이내 완전히 조용해졌다. 나는 눈썹을 찡그린 채 모르가나를 손에 든 한성진을 노려보았다.
그가 내 디멘션 커넥터를 해킹한 것이었다.
“이런 세계가 될 거라는 말인가?”
“고개를 돌지 않으면 헬기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거지. 뭐…. 거창한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고.”
“어떻게.”
“응?”
“어떻게 하면 좋을 거라고 생각하지? 당신은.”
“….”
내 질문에 한성진은 잠시 놀란 듯 굳어졌다.
하지만 나는 솔직하게, 그의 생각도 들어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레일에게 무척이나 가까운 존재인 그의 의견은 무척이나 중요할 터였다.
“간단한 이야기지.”
“노인들은 간단한 이야기라고 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중의적인 한 마디로 상황을 표현하려 들더군.”
“….”
그는 당황한 눈치였다. 하지만 이내, 피식 웃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내 옆의,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듣는 거야.”
넬을.
“대체 언제부터….”
“아니, 보이지는 않아. 하지만 이로서 확실해졌네.”
“뭐?”
나는 놀라 되물었다. 그러자 한성진은 피식 웃으며 눈동자를 한순간 차갑게 빛냈다. 나는 옆에서 입을 다물고 있던 넬이 흥미롭다는 듯 웃는 걸 발견했다.
“이 나이쯤 되면 뭔가가 보이는 법이라.”
“세계의 ‘흐름’이 말인가요?”
바로 다음 순간, 넬이 한성진을 향해 날아들었다. 자신이 직접 타인에게 모습을 드러낸 그녀를 보고, 나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녀의 변화를 느꼈다.
“그렇게 거창한 부분까지는 아니야. 다만…. 엘레노어라면 그렇게 행동했을 거라고 추측했을 뿐이지.”
“그건, 넬이 존재하는 이유도 반증할까요?”
“그건 그쪽이 정할 문제이지. 인공지능 아가씨.”
둘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잠깐, 한성….”
“가요, 준.”
인공지능이라는 말에 반응하려던 찰나, 넬이 내 말을 끊으며 돌아섰다. 그녀는 내 곁으로 다시 돌아와 한성진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그쪽은 자유로워진 건가?”
“네 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자유롭습니다.”
그녀는 긍지를 담아 소리쳤다.
“….”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 모습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
헬기의 조종은 자동으로 이루어진다는 모양이었다.
군용으로 사용되는 듯한 헬기는, 뒤쪽의 컨테이너가 텅 빈 상태였다. 자동으로 조종을 하는 녀석(?)의 솜씨가 나쁘진 않아, 벽에 붙은 의자에 편하게 앉아있던 나는 이내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잠시, 도와주겠나.”
조종석에서 돌아온 우아랑은 차분하게 목소리를 냈다. 헬기 안은 꽤나 추웠음에도 녀석의 목덜미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미안하다.”
중얼거린 녀석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눈앞에 팝업창을 띄웠다. 그리고 뭔가를 매만지는가 싶더니, 나는 이윽고 머리 위의 조명이 잦아드는 것을 느꼈다.
“윽….”
그리고 녀석이 중심을 잃고 의자에 쓰러졌다.
“우아랑!”
나는 놀라 그녀를 부축했다. 입술을 질끈 깨물며 숨을 몰아쉬던 우아랑이 이윽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붕대를, 감아주었으면 한다.”
“뭐?”
“하루 정도만 버틸 수 있으면 되니까.”
그렇게 말하는 눈빛이 단호했다.
더 말은 필요하지 않다는 듯, 녀석은 냉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고민을 하던 나는, 아이템창을 띄우고 붕대를 선택해 그것을 가상으로부터 이끌어냈다.
현실까지.
“퀘스트는 어떤데?”
푹신한 붕대의 감촉을 느끼며, 나는 돌아서 앉은 우아랑을 향해 물었다. 검은 셔츠를 벗어 내린 녀석의 새하얀 어깨가 어둠 속에서 빛나듯이 드러났다.
“내가 나아갈 방향을 정하라는군.”
“그건…?”
고개를 갸웃거리자 눈앞에 창이 하나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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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픽 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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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갤러해드의 여정 10/10
난이도 : 없음
내용 : 당신이 나아갈 방향을 정하세요.
제한 시간 : 없음
보상 :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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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내용이었다.
“너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느껴지는군.”
나는 감상을 입에 담으며 검은 점액질로 가득한 우아랑의 가슴에 붕대를 감았다. 한순간 강하게 신음한 녀석은 곧이어 쓰게 웃으며 날 돌아보았다.
“녀석이 원하는 바를 알 것 같은 기분이다.”
“엘레노어?”
“그래, 아버지의 말을 통해서 생각해보자면.”
“현실과 가상의 완전한 융합.”
나는 녀석의 말을 받아내듯 중얼거렸다.
“그로 인한 인류의 진화.”
그것이 엘레노어가 진정으로 바라는 바였던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다시금 셔츠를 입으며 일어서는 우아랑을 바라보았다. 아까보다는 견디기 편해진 듯, 호흡을 정갈히 한 녀석이 말을 이었다.
“아마…. 서울은 봉쇄가 된 상황이겠지.”
거기에는 나도 동의를 했다.
“아무하고도 연락이 되질 않아.”
“우리 쪽도 마찬가지다. 대체 무슨 일이….”
우아랑은 고민에 빠져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모드레드를 비롯하여 다른 동료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걱정이 드는 것을 느꼈다. 단순히 연락이 되지 않는 것이면 좋을 텐데.
“아마, 게임의 일부가 되셨을 거예요.”
“…?!”
그리고 다음 순간 넬이 나섰다.
나와 우아랑은 서로 다른 의미에서 놀랐다. 물론 우아랑은 갑작스레 눈앞에 여자애가 나타났기 때문이었고, 나는 넬이 그런 행동을 취했기 때문이었다.
“너, 는…?”
“넬이라고 해요.”
싱긋 웃은 넬이 손을 뻗었다. 당황해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우아랑은 머뭇거리다 그것을 맞잡았다.
“준의 망자인.”
“…. 우, 우아랑이다.”
“잘 부탁해요.”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었다.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순간이라고 하면 이상할까. 할 킬러즈의 전직 대위님과 아서리안의 전직 네비게이터가 이렇게 한 편이 되어 인사를 나누다니.
“그래서 넬,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이건 순전히 제 생각인데….”
“그게 제일 신뢰가 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볼을 붉히며 싱긋 웃은 넬이 곧이어 손뼉을 쳤다. 그러자 소리가 난 틈새로 거미줄처럼 지도가 뻗어져 나왔다.
“서울이에요.”
그녀는 능숙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우리는 동시에 그것을 이해했다. 이 수많은 거미줄은 촘촘하고 면밀하게 짜인 네트워크였고, 그를 통해 서울을 그려내고 있었다.
“엘레노어의 위치는 모르겠지만, 그레일과 함께 있을 공산이 커요. 두 사람은 현실과 가상에서 서울을 사람들이 모르도록 이미 먹어치운 상태겠죠.”
“항상 서울이 문제군….”
나는 어이가 없어지는 걸 느끼며 중얼거렸다. 거기에 넬은 씁쓸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하나의 거대한 실험장인 셈이죠.”
“서울이 말인가.”
“네, 현실과 가상을 완전히 융합해낸.”
하긴 그럴 터였다.
원하기만 한다면 엘레노어는, 전 세계를 손에 넣을 수 있겠지. 이 촘촘하게 얽힌 네트워크를 지구 단위로 생각해보자면 그 크기는 더욱이 어마어마해질 테니까.
그걸 굳이 서울에 국한해두는 이유는 그래…. 우리의 수준에 맞춰주기 위해서일까.
“한 번 해보자고…. 신.”
나는 차갑게 중얼거렸다.
◇
“저기, 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적당히 작전 회의를 마친 뒤였다. 우아랑은 헬기 뒤쪽에서 잠시 쉬겠다고 해 조종석에 앉아있던 나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내 쓰게 웃었다.
“문으로 다녀줄래….”
조종석의 벽을 통과해 아무렇지도 않게 넬이 안으로 들어섰던 것이다. 귀신이 사람 놀래는 것도 아니고.
“애석하게도 자동으로 문을 여는 기능은 없더라고요.”
“헬기를 해킹한 거냐?”
“헤헤, 그 정도 수고도 들이지 않았죠!”
녀석은 신나보였다.
“사실 예전에는 이래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뭘?”
“멋대로 해킹해서 제 거점으로 삼는 행위요.”
넬은 내 옆에 앉아 빙긋 웃었다.
“하지만…. 이상한 기분이에요. 지금이 무척 즐거워요.”
“부디 걸려서 된통 혼나지만 말기를.”
나는 킥킥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리고 새하얀 눈처럼 쌓인 넬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누, 누구에게 말인가요?”
한쪽 눈을 찡긋 감은 녀석이 의아해 물었다.
“글쎄, 엘레노어?”
“훗, 넬은 이미 엘레노어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죠.”
“대체 가상 세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준을 생각하니까…. 이상하게 그렇게 되더라고요?”
녀석은 그렇게 말한 뒤 부끄럽다는 듯이 웃었다. 하지만 그 미소가, 어쩐지 나를 도리어 부끄럽게 하는 기분이었다. 당황한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기 준.”
“왜.”
때문에 일부러 무뚝뚝한 목소리를 냈다.
“저희는 이제 자유롭게 되었어요.”
“저희?”
“네, 당신과 저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보랏빛의 눈동자가 진지했다.
“내가?”
“네, 지금의 준은…. 현실과 가상 세계를 잇는 일종의 서버 역할을 제가 하고 있으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야?”
“준의 재킷은 제가 유지하고 있다는 말이에요.”
“그거라면 확실히….”
“엘레노어에게 한 방 먹여줄 수 있는 근간이 되겠죠!”
넬은 거칠게 이야기했다.
그리고는 상쾌하다는 듯이 웃었다.
“…. 너 좀 변한 것 같다.”
“그런가요? 저는 준이 더 그러지 않나 싶은데.”
“내가?”
“네! 처음 만났을 때는 눈 이렇게~ 막 찡그려서!”
녀석은 양손을 들어 눈꼬리를 곤두 세웠다. 그리고는 내가 조금 당황하자, 그것을 즐기듯 웃었다.
“그게, 자유롭다는 거겠죠?”
그리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글쎄….”
“준은 분명 모르는 거예요! 자유로운 게 당연하니까!”
“흐음.”
사실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런 준을, 사랑해요.”
그리고 넬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뱉었다.
“잠…?”
“그렇게 밖에 설명할 수 없어요, 준. 제가 당신에게 가지는 감정은…. 그 외의 말로는 어딘가 어긋나버려요.”
그렇게 이야기하고 넬은 활짝 웃었다.
“…. 너 말이야.”
나는 당황해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하지만 넬은, 그런 내 태도에도 아랑곳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해요, 준.”
“바보 자식….”
나는 볼이 빨개져,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