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편
<-- Chapter 7 : Holy Grail -->
“뭣….”
입술을 통해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 서있었다.
어둠 속에.
“처음, 만난다고 해야 하나? 모르겠군.”
“무슨 소리야, 그게.”
나는 으르렁거리듯 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반대편에 서있던 남자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는 말이야.”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품안에서 스파다를 꺼내들었다. 어둠 속에서 히끗 거리며 모습을 드러낼락 말락 하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저기 우리, 대화로 해결하지?”
그리고 목소리가 이어졌다.
“준, 바로 뒤…. 당신을 카피해 사용하고 있어요.”
넬이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냉정한 눈을 하고 있는 그녀와 시선을 마주친 나는, 앞의 남자와 뒤에 서있는 여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
그리고 검을 휘둘렀다.
불꽃이 튀며, 순간적으로 여자의 얼굴이 드러나고는 사라졌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혼란스러움에 의한 짜증이 배가 되는 것을 느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싶어서.
“윽…!”
뒤로 밀려난 여자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뒤로 물러섰다. 나는 이마를 짚어 침착하게 지금의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하윤아, 물러서.”
“네, 성진님.”
그 사이, 남자가 부드럽게 상황을 정리하듯 이야기했다. 여자가 뒤로 물러섰고, 나는 그로서, 남자가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가 되었음을 자각했다.
죽일 수…. 있을까?
아니, 그래야 하는가?
애초에 저 남자는 누구지?
“나는….”
당황한 내가 동작을 멈춘 사이, 남자는 무어라 말을 하려다 이내 관뒀다. 거기에서 나는 남자의 태도가 무척이나 조심스러움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아랑은.”
“….”
“어디에 있어. 대답해.”
“아랑이는….”
뒤쪽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당신에게 묻지 않았어.”
나는 차갑게 그 말을 잘라냈다. 거기에 여자는 짧게 신음을 냈지만 이내 입을 다물었다. 나는 다시금 눈앞의 남자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진실을 듣고, 도망쳤어.”
그는 쓰게 웃어보였다.
“뭐? 어디로?!”
“그건 모르겠어. 하지만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야. 몸 상태가 그러니까 말이지….”
“….”
마치 남의 일이라도 된다는 듯이 말한다.
“당신 지금 나랑 장난해…?”
나는 거기에서, 머릿속의 무언가가 세차게 끊어지는 걸 느꼈다. 스파다를 옆의 벽으로 내던지고, 나는 눈앞의 남자를 향해 분노로 가득 차 다가갔다.
“당신 딸이잖아!!”
“….”
멱살을 쥐며 소리쳤다.
그로서 나는 깨달았다.
눈앞의 남자는 분명히 한성진이었다. 아마도 이것이 엘레노어가 우리에게 말하고 싶어했던 ‘진실’일 터였다. 나는 거기에서 지금의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한 가지 예감을 했다.
하지만 일단, 그녀에게 듣고 싶었다.
우아랑에게.
모든 진실을.
“넬, 그 녀석의 위치를 탐색해줘.”
멱살을 놓고 돌아선 나는 곧바로 방을 빠져나왔다.
◇
“바로 앞이에요.”
넬의 안내는 더없이 정확했다.
“하아….”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무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우아랑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
“기왕이면 밑으로 내려가 주지 그랬냐.”
나는 일부러 조금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자 멍하니 바다를 보며 서있던 그녀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너로군.”
목소리에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거기에, 녀석은 제대로 내 눈을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았다. 나는 비탈진 길을 미끄러져 내려가 녀석의 옆에 섰다. 곳곳에서 반딧불이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대충 만나봤어.”
“아, 너도 말인가….”
“그래, 무척 충격적이더군.”
“저런 걸 보고도 멀쩡하면 도리어 사람이 아니겠지.”
“…. 의심한 적이라도 있어?”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지금껏 당연히…. 아버지가 엘레노어와 함께 한다고 생각했었지.”
우아랑은 괴로운 듯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저건 아버지가 맞는 건가?”
그리고 의심하며 내게 물었다.
바로 앞은 절벽이다.
별장으로부터 10분 정도 뛰어 올라와, 능선의 반대편으로 꺾어져 내려가는 부분이었다. 저 멀리 바다가 보이고 어둠에 잠긴 가운데 배의 불빛이 보였다.
“죽기라도 할 생각이었어?”
나는 대답을 회피하듯 말을 돌렸다.
“그럴 것처럼 보이나?”
“그건, 아니지만.”
의외로 괜찮은 걸까?
“….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여기서 몸을 던지면 이 수치스러운 기분이 사라진다는 걸 깨달았을 뿐.”
“깨닫고 행동으로 옮겼으면 큰일이었겠군.”
나는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기운이 없을 거라는 예상은 하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의 도발도 통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곁눈질로 우아랑을 돌아보았다.
녀석은 아버지가 저지른 행동을 수습하려고 했다.
엘레노어와 함께, 세계를 위협하는 테러리스트의 일부가 된 아버지를. 단죄하려고 했는지까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녀석은 확실하게 사태를 끝내고자 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니 뭐니 하는 그런 행동은 아니었을 것이다. 정말로 단순히, 아버지의 행동에 책임을 느꼈던 거겠지. 그래서 어머니에게 분노했던 거고.
하지만 그게 모조리,
“빌어, 먹을….”
무너져 내렸다.
우아랑의 어깨가 가녀리게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녀석의 거센 욕설에서, 주체하기 힘든 감정을 느꼈다.
“어째서냐…!! 어째서 어머니는! 그리고 아버지는!”
“우아랑….”
“누구도 말을 해주지 않았단 말이냐!!”
녀석은 그렇게 감정을 토해냈다.
“하, 덕분에 꼴사나운 짓을 해버렸군! 되먹지 못한 곳에서 되먹지 못한 짓을 하면서, 결국 아무것도…!”
분한 듯 외치는 목소리에서 물기가 느껴졌다.
“나는, 결국 아무것도 아니었단 말이냐!!”
“말할 수 없었던 게 아닐까.”
나는 무뚝뚝한 목소리를 냈다.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자, 그런 나를 나무라듯 바라보고 있는 넬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도저히 타협을 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내가 본 정현 씨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 미안, 조금 흥분했군.”
하지만 우아랑은 그런 내 대답이 차갑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깨달은 것처럼 서둘러 감정을 수습하는 그녀를 보고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고개를 돌려, 우아랑의 어깨를 쥐었다. 녀석은 어깨를 흠칫 떨며 나를 바라보았다.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보자 나는 입이 다물어지는 걸 느꼈다.
“괜찮아. 아직 끝나지 않았어.”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거기에서, 눈을 동그랗게 뜬 녀석이 의지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직 끝나지 않았다.”
코가 조금 나왔지만 이건 모른 척을 해줘야겠지.
“나는, 싸울 것이다.”
“이야기는 들어봐야지 아는 거고.”
새삼 대단한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해, 별로 관계가 없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나도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 일과 가장 가까운 당사자인 녀석은, 금새 의지를 되찾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하나로 묶은 머리, 눈물을 한바탕 쏟아 엉망이 된 얼굴로 녀석은 나를 올려다보았다.
“….”
하지만 그것도 잠시,
“미안, 그래도 아주 잠시만…. 시간을 주겠나.”
녀석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소리를 죽인 채 괴로움에 몸을 떠는 우아랑을, 아주 잠시 동안 다정하게 안아주었다.
◇
조금 시간이 흘러 진정이 되자 다른 고민이 들었다.
모드레드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이야기하는가에 대해서였다. 아무래도 그녀 역시 이 일과 가장 깊숙이 관련이 된 사람인만큼 충격이 상당할 터였다.
구분이 불가능했었다. 그녀와 칼 후퍼의 기록으로는. 누가 진짜 한성진이었고 가짜 한성진이었는지. 그 기록에 가짜와 진짜가 번갈아가며 등장한다는 사실도 한성진이 말해주어서 알 수 있었다.
그래 진짜 한성진.
인간 한성진이 말이다.
“그래서 당신은, 언제부터 여기에?”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거기에 그는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엘레노어가 그러라고 말한 시점부터.”
“그게 정확히 언제였습니까.”
우아랑이 질문에 질문을 덧붙였다. 거기에 한성진은, 대답에 앞서 나란히 앉은 나와 우아랑을 지그시 응시했다. 나는 그 의미를 알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진님,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물론 그래야겠지.”
그리고 뒤를 이어 그에게 하윤이라고 불렸던 여자가 나타나 우리 사이의 테이블에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커피였다.
“내가 엘레노어와 함께 사라졌다고 밝혀진 시점부터.”
“결국 그때 당신의 존재가 말살되었다는 거군.”
“이해가 빠른데.”
한성진은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 옆에 무릎을 꿇고 앉은 하윤을 웃으며 바라보고는 그녀가 앞에 내려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주름이 적당히 진 얼굴이었다…. 라고는 하지만 사실 그다지 나이가 들어 보이는 이미지는 아니었다. 아니 그런 걸 읽어낼 수 있는 인간일까 싶었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검은 바다.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어떤 때는 천진한 어린아이처럼 보였고, 또 어느 때는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의 냄새를 풍겼다. 한성진은 그런 남자였다.
“그 이후로 나는 쭉 이곳에 숨어 있었어.”
“어머니에게 모든 것을 다 맡겨두고 말입니까?”
“그래, 어쩔 수 없었다는 것만…. 이해해다오.”
한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는 전혀 이해를 바라는 얼굴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던 이유는 뭐지?”
거기에 나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와 하윤이 반응해, 나는 분노를 애써 참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에 와서 말하긴 그렇지만 할 킬러즈와 협력하는 방법도 있었잖아? 왜 굳이 이곳에 숨어서…?”
“그랬다면 감옥에 갇혀서 고문을 당하고 있지 않았을까. 이미 대중에게 있어 한성진은 엘레노어와 함께 세계를 착복할 악의 대상이 되었으니 말이지.”
그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 백 대령이.”
“그럼 그 한성진은 대체 어떤 존재입니까?”
“….”
우아랑의 물음에, 그의 동작이 잠시 멎었다.
“일단 그것을 설명해야겠군. 그래….”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성진은, 머나먼 옛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