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편
<-- Chapter 6 : 이상의 기사 : 각성 -->
◇
[그럼 회장님과 합류하겠습니다.]
“그래, 더 이상 눈치 볼 것 없으니까.”
모드레드의 말에 나는 단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들이 먼저 엄니를 드러낸 시점에서, 우리도 더 이상 관계를 부정할 필요는 없어보였다. 뭐가 어찌 되었든 간에 녀석들은 회장님을 제거할 생각 같았으니까.
엑스칼리버가 완성됐으니 필요 없다는 거겠지.
“가웨인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 조심해.”
[그쪽은 린슬렛님과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그래….”
[당신은, 괜찮습니까?]
멍하니 있던 중 목소리가 이어졌다.
“뭐?”
거기에 나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반대편의 모드레드가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가웨인이 되살아나 심란하시지 않은가 해서….]
“뭐야, 그 녀석 언제 죽었대?”
나는 애써 웃으며 장난을 쳤다. 그러자 모드레드가 곤란하다는 듯 신음을 흘리는 게 들려왔고, 나는 녀석이 걱정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야말로 조심해.”
나는 거기에 부드럽게 목소리를 냈다.
[…. 네?]
“트리슈도, 듣고 있지?”
[응? 어떻게 알았어?]
이어진 다른 목소리에, 나는 예상을 벗어나질 않는다고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트리슈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두어서 이후에 엿듣지 않을까 싶었는데.
“하여간, 이렇게 귀여운 장난이나 치고.”
[…?? 타, 타나 오빠?]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괜찮으니까. 너희가 있어서. 몇 번이고 말하는 것 같지만….”
[그, 그렇습니까?]
“조심해. 내가 서울 갈 때까지 다치지 말고.”
[…. 넵.]
[응응…!]
“모두 안전을 최우선으로.”
중얼거리고, 나는 대답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끄응….”
태연한 척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 지금 당장이라도 올라가서 가웨인을 상대하고 싶었다. 남은 동료들이 걱정이어서 배가 아파올 정도였다.
“너무도 갑작스럽군.”
옆에서 목소리가 이어졌다.
우아랑이었다. 힘에 부침에도 굳이 걷겠다며 내려선 녀석은 내 팔에 팔짱을 낀 채였다. 조금 매달려오는 기운이 느껴져 힘을 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끝내고 가야겠지.”
“그래, 진실을 목도하기만 하면 되므로….”
“응,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우리를 안내하던 여자가 말을 이었다. 체력의 안배를 생각해서라며 일부러 우리를 쉬게 하려고 했던 그녀는, 일이 다급해졌다는 내 말에, 우리를 진실로 인도하는 중이었다. 좁고 길게 뻗은 복도를 걸어서.
나는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애초에 여기는 무엇인가 싶었던 것이다. 평범한 별장은 물론 아니겠지만, 게임의 퀘스트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보기에는 여자의 태도가 어쩐지 수상했다.
“우아랑.”
그래서 일단, 확언을 해두고 싶었다.
“뭐지, 스컬.”
“조심해.”
“뭘 말이냐?”
“마주하기 힘든 진실이라고 하니까.”
“….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녀석은 어이가 없다는 듯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하지 마라.”
그리고 이내 싱긋 웃었다.
그 미소는, 다소 연약했지만 의지로 가득했다. 가슴에 한가득 불쾌한 점액이 뒤덮인 채, 호흡을 방해하고 있었지만 녀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걸었다.
그리고 뒤를 이어,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나선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상황에 약간의 의구심을 가지면서도 여자의 뒤를 우아랑과 함께 따랐다.
“이 앞이야.”
그리고 한참을 걸은 끝에 도착했다.
나선계단의 제일 아래, 진실의 앞에.
“….”
평범한 문이다.
하지만 무언가 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나는 어렴풋이 떠오르는 그것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이내 마른 나뭇잎처럼, 떠오르려던 기운이 파스스 사라졌다.
안에서 의도적으로 감추고 있는 걸까?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랑이 너뿐.”
그렇게 생각하자 여자가 싱긋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건…. 엘레노어의 지정 때문입니까?”
우아랑이 눈썹을 찡그린 채 앞으로 나섰다.
“아니, 진실이 그걸 원하기 때문이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진실이라는 건 사람을 뜻하는 건가?”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여자에게 완전히 무시를 당해, 나는 입을 다물었고 뒤를 이어 우아랑이 내 쪽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럼, 다녀오겠다.”
“…. 그래.”
뭔가 의구심이 덜 풀렸지만.
나는 얌전히 그녀를 보내자고 생각했다. 일단은 생각에 앞서 행동을 해야할 시기였다. 거기에는 우아랑도 동의를 하는 듯 녀석은 망설이지 않고 방으로 들어섰다.
문이 한 번 열렸다, 이내 닫혔다.
“….”
생각보다 별 일이 없었다. 평범하게 문이 열리고, 어둠속으로 들어간 우아랑이 문을 닫고 그게 전부였다. 아서리안에서 중요한 퀘스트라고 보기에는 이질적이었다.
“좀 쉬지 그래요?”
문앞에 서있던 여자가 내게 권유를 해왔다. 하지만 나는 주변을 한 차례 힐끔 둘러보고는 벽에 기대어 섰다.
“여기면 충분해.”
“와일드하네, 여자한테 인기 많을 타입.”
“….”
무시하자.
“정현이한테 물었는데 당신, 꽤나 거창한 남자라면서?”
“뭐?”
하지만 그것은 금새 무너졌다.
“호오, 멋진 눈인데요?”
여자는…. 이상했다.
그런 표현이 더없이 어울렸다. 우리를 안내하는 역할을 맡은 것과 더불어,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 쓰는 것이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의지로 가득 찬, 어른스러운 눈이네.”
“뭔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아니 진실을 제대로 마주하고 받아들이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릴 테니까.”
“그 진실이라는 게 사람?”
“아, 글쎄…. 사람으로 봐야하려나?”
“제대로 대답해주시지.”
“나오면 들어봐, 직접. 그 아이는 뭐라고 말할까?”
“우아랑이?”
“그래, 그것이 향방을 정하지 않을까 싶어요. 나는.”
그렇게 이야기한 여자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입에 머금었다. 나는 앞머리를 매만지며 그 말을 잠시 생각했다.
안에 있는 것이 대체 누구인 걸까.
어쨌든 나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잠시 동안 거기에 대해서 깊은 고민을 했다.
◇
남자가 ‘진정’한 것은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
“수분 섭취라도 하시겠습니까?”
분위기가 얼어붙은 것이 느껴졌다.
그게 조금 불편해 말을 걸어보았지만 가웨인의 반응은 없었다. 방의 구석진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그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침묵하고 있을 뿐이었다. 모드레드는 포기하고 전화를 하러 나간 정현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모습이었다.
코트를 붉은 빛깔로 물들이고 있는 것은 전부 피처럼 보였다. 타나토스에게서 이야기를 들어두었기 때문에 모드레드는 그것이 가웨인의 피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방금 전의 전투에서 입은 것은 아닌 듯했다. 말라붙은 모양새가 그러했다. 그렇다면 비비안에게 찔린 상처에서 난 것일까? 그렇다고 보기에도 뭔가 이상했지만….
물론 진짜 피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드레드는 그런 가웨인의 모습에 뭔가 의미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새하얀 코트가 붉게 물든 채로 있는 모습은 어딘가 잔혹한 느낌을 갖게 했다.
“뭘 봐.”
그리고 거기에 가웨인이 반응했다.
“굶주린 맹수 같아서 말입니다.”
눈빛에 대한 감상을 내놓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빛을 완전히 흡수하는 듯 새까만 눈동자를 바라보며 모드레드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뭐 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
“가웨인, 아니 백시호 씨.”
모드레드는 일부러 그를 자극해보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는 냉장고의 문을 열고 캔 커피를 꺼냈다. 그리고 가웨인을 향해 휙 집어던졌다. 하지만 그는 캔커피를 잡아 손으로 세차게 일그러뜨렸다. 탁한 색의 액체가 주먹의 틈에서 빠져나와 흘렀다.
“커피 마시기 싫은가봐~. 모디모디.”
거기에, 뒤쪽의 소파에 누워있던 트리슈가 피식 웃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도발을 하는 모습에 모드레드는 당황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트리슈님….”
“아 뭐, 우리로서는 감사한 짓을 해주긴 했지. 오늘은 이런 호텔에서 잘 수도 있게 해주고!”
“하아,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여유로운 태도에 모드레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 말처럼, 잠깐 대화를 하러 나간 정현과 진아를 포함해 다섯은 호텔의 스위트룸에 몸을 숨기는 중이었다. 정현의 지인이 지배인으로 있는.
어쨌든 이후의 상황은, 두 사람이 돌아오고서 정할 일이겠지만 많이 복잡했다. 가웨인이라는 거대한 변수가 생겨버렸기 때문이었다. 모드레드는 고민에 잠겨 창문 바깥을 내다보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 있었어.”
“네?”
바로 그때, 가웨인이 무언가 말하려고 들었다. 모드레드는 고개를 돌려 그의 차가운 시선과 눈을 마주쳤다.
“죽일 수 있었다고.”
“누구를 말입니까? 설마 백 대령을?”
설마 했지만 역시 목적은 그것이었나.
“회장이 모르가나로 막지만 않았어도 확실하게.”
“뭘 어쩔 속셈이야?”
트리슈가 눈썹을 찡그린 채 물었다. 거기에, 무어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가웨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개새끼를 죽여 버리겠어.”
눈빛이 퀭했다.
손에 들고 있는 몽둥이는…. 그야말로 ‘죽이겠다.’라는 말밖에 하지 못하는 그의 의지를 구현한 듯했다. 모드레드는 거기에서 한 가지 빛을 발견했다.
“그럼 저희와 함께 행동하시죠.”
“잠…. 모디모디?”
“백 대령을 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드리겠습니다.”
“그래?”
가웨인은 싱긋 웃으며 모드레드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꺅?!”
투쾅! 하는 폭음이 울려 퍼졌다. 갑작스러운 폭음에 놀라 비명을 내지른 트리슈는, 곧이어 당황해 고개를 들었다. 먼지가 수북이 피어오른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대화를 할 생각은 없으십니까?”
하지만 모드레드는 무사했다. 순식간에 뒤로 물러섰고, 가웨인의 몽둥이는 애꿎은 바닥만 박살내고 말았다. 놀라 일어선 트리슈는 패일노트로 그를 겨누었다.
“다, 좆같아서.”
가웨인은 말이 통할 것 같지가 않았다.
“불길에 기름 부은 거 아니야…? 모디모디.”
“시도를 해볼 가치는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중얼거리고, 그녀는 단검을 두 자루 꺼내들었다.
“회장님께는 뭐라고 전하지?”
“제가 따로 말씀을…. 일단 흥분한 상대방이니만큼 정면으로 맞붙기보다는 탈출을 우선시하죠.”
“저기 여자들아. 다 들리는데….”
가웨인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하지만 모드레드는, 여전히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황이라고 판단했다.
이어서 밝은 빛이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