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편
<-- Chapter 6 : 이상의 기사 : 각성 -->
◇
남자는 정신을 차렸다.
그래야할 때라고, ‘신’이 말했기 때문이었다.
“케흑…!! 컥! 헉…. 허억….”
몸이 벌떡, 일으켜 세워졌다. 마치 만화처럼 그렇게 되어 남자는 콧속에서 이물감을 느끼고 선을 뽑아냈다. 온몸을 벌레가 타고 오르는 듯한 기분에 그는 자신이 누워 있던 침대에서 나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씹…. 발…!”
최악의 기분이었다.
남자한테 강간 당한 기분이었다.
붉은 머리에서 더러운 냄새가 풍겼다. 남자는 그것이 짜증이 나, 머리를 거죽 째로 뜯을 것처럼 움켜쥐고 이내 침대에 등부터 세차게 부딪쳤다.
쨍그랑, 하고 소리가 울렸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리고 남자는 비명을 내질렀다.
환자복을 쥐어뜯으며,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채,
가웨인은 울부짖었다.
◇
“혹시 콘돔 필요하면 말….”
여자는 뭔가 오해를 하고 있었다.
“아니, 괜찮습니다.”
그런 그녀를 반쯤 억지로 밀어낸 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소파로 가 털썩 주저앉았다. 사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오늘 엄청난 일을 겪어서 죽을 맛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수천 미터 상공에서 전투를 벌이다니. 그것도 괴상한…. 쇠똥구리 같은 벌레하고.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기계일 터였다. 정보량 송신 합금이 형태와 질감, 그리고 재질을 표현해낸 가상과 현실을 아우르는 형태의 ‘몬스터.’
이게 인간이 할 짓인가.
“….”
나는 과연 인간으로 불려도 되는 걸까 싶을 정도였다.
“후우.”
뒤를 이어, 숨을 몰아쉰 우아랑이 하나로 묶었던 머리를 풀었다. 검푸른 머리가 어깨로 흘러내려 녀석은 이마를 매만지며 장식장 앞에 기대었다.
“침대에 좀 눕지 그래.”
거기에 나는, 대답이 예상되는 걸 느끼면서도 물었다.
“여기면 됐다.”
“피곤하지도 않아? 난 죽을 것 같은데.”
“…. 아직 퀘스트가 남아있다.”
막무가내다.
거기에 나는, 어쩐지 불쾌한 기분을 느꼈다. 책임감을 느끼고 행동하는 것이 과도한 그녀의 모습이 과도해 어쩐지 좋지 못한 감정을 들게 만들 정도였다.
“내가 있는 게 걱정이라면, 나가있을 테니까.”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섰다.
“뭐…?”
“편하게 쉬라고. 대위님.”
“그게 무슨 소리냐!”
문을 열고 나서려하자, 우아랑이 그것을 막았다. 반쯤 열리려던 문이 다시 닫혀, 나는 옆에서 단정한 눈썹을 찡그리고 있는 녀석을 돌아보았다.
“남자랑 같은 방에 있어서 싫은 게…?”
“얕보지 마라! 군인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렇다면 왜 경계하고 있는 건데?”
“딱히 그런 의도로 한 행동은 아니다. 단지 내가 편하게 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
“또 그놈의 책임감….”
“뭔가 잘못되었나?”
“적당히 어깨에 힘을 푸는 게 낫지 않겠어? 그러다 갑자기 쓰러지면 본말전도라고.”
“하아….”
우아랑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너는 이상한 남자다, 스컬.”
그리고 눈썹을 찡그린 채 불만이 섞인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
우아랑이 몸을 움찔 떨었다.
“알겠으면 쉬어두라고.”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뭔데?”
“너도 같이 쉬는 것이다.”
“…. 응?”
무슨 말인가 싶어 되물었다.
“침대도 마침 킹 사이즈고 하니 괜찮겠지.”
“저기, 대위님?”
“기왕 한다면 효율의 문제라는 거다.”
“….”
이 부분은 타협할 수 없나.
◇
“굉장하잖아….”
진아는 놀란 얼굴로 눈앞에 떠오른 창을 살폈다.
사실 그다지 흥미는 없었었다. 적당히 귀찮다고만 생각했고, 정현의 얼굴을 생각해 보러 왔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진아는, 주변에서 호위를 맡은 할 킬러즈의 간부들이 뭐라고 하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심지어 손에는 위스키 병까지 들고서, 준비된 차에 올라타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건….
“술이 확 깨는 걸.”
진아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반쯤 비운 위스키 병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뒤쪽에 서있던 헥터가 그것을 낚아채 가져갔지만 그녀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반짝거리는 정보의 바다에 시선을 보냈다.
말 그대로 그것은 바다였다.
반짝이며 빛나는 지중해의 보석, 그것이 가득 들어차 헤엄을 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방.
“그렇죠? 열심히 준비했으니까.”
벽에 기대어 서있던 헥터가 싱긋 웃었다. 방금 전까지는 분노를 꾹꾹 눌러 담고 있던 녀석이 금새 기세가 등등해졌다. 진아는 그것을 느꼈지만, 눈앞의 보석에 보다 흥미가 일어 무시하고 고개를 돌렸다.
펼쳤다.
그것이 정답을 향해 이르는 지도인 것처럼.
“….”
어두운 연구실.
주변에는 흰 가운을 입은 과학자들로 가득했다. 이러한 명화를 개발해낸 인원들이었다. 진아는 철야로 지쳐 쓰러지기 직전인 그들에게 경외감을 느꼈다.
하지만 확실히 완성했다.
엘레노어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는 검을.
“그렇게 대단한 겁니까?”
“이 대단함이 이해가 가질 않아?”
함께 온 정현의 물음에 진아는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솔직히 말해 이 정도의 결과물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추호도 예상치 못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물론 우아랑 대위님이 갤러해드 퀘스트를 마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거겠죠? 그래야 엘레노어께서 모습을 드러내실 테니까.”
헥터의 대답은 간단했다.
하지만 정현은, 잔학하게 입 꼬리를 비틀어 올린 헥터의 모습에 눈썹을 찡그렸다. 뭔가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 그녀는 뒤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누군가 서있었다.
어느 샌가.
“…?”
강한 존재감을 느껴 뒤를 돌아본 그녀는, 검은색 군복을 입은 백 대령의 모습을 발견했다. 주변에 소총을 든 간부들을 대동한 채였다.
뭔가 쇼라도 하고 싶은 걸까.
“간부님들이 총을 가지고 계시군요.”
정현은 슬쩍 분위기를 파악하듯 중얼거렸다. 그러자 백 대령이 불쾌한 미소를 입에 머금었다.
“용도가 있습니다. 일종의…. 보여주기 식이라고 해야 할까요? 의외로 일반적인 사람들은 ‘코트’를 입은 자들의 능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말입니다.”
“그걸 일반인에게 사용한다는 듯이 말씀하시는군요.”
“저희는 나름 군‧경찰이니만큼 국가 내란죄를 지은 범죄자에 대한 체포도 겸하고 있기 때문이죠.”
“음…. 정현 씨?”
일부러 라는 듯 분위기를 잡는 백 대령의 모습에 진아가 눈썹을 슬며시 찡그렸다. 곁눈질로 주변을 살펴본 정현은 가볍게 결론을 내리고 입을 열었다.
“네, 저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군요.”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체포의 이유는?”
“말씀드렸다시피 국가 내란. 아서리안 사태에 대하여 국가의 방침과 어긋난 생각을 지니고 있다면 그 누구도 예외치 않고 체포가 가능합니다.”
“뭔가 증거라도?”
“누군가 함께 하고 있다는 첩보가 있어서요. 회장님.”
거기에 대답한 것은 헥터였다.
“우아랑 대위가. 그래서 그와 관련된 확실한 ‘조사’를 위해 라이오넬 대위가 미행을 했었거든요.”
“그 커다란 덩치로…. 미행을?”
“네, 그 남자는 스페셜리스트니까요.”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린 그녀가 정현과 진아의 앞에 팝업창을 하나 띄웠다. 어둠 속에서 그림이 그려졌다.
사진이었다.
공항에서 이준과 함께 있는 아랑을 찍은.
“그 결과가 이거죠. 이해가 가시나요?”
“어떤?”
“저희는 무척 당황했거든요. 왜 갑자기 우아랑 대위가 다른 마음을 품게 된 것인 걸까 싶어서…. 저 개인적으로도 그렇고요. 믿을 수가 없었어요. 이해가 가세요?”
말과는 달리 헥터는 장난을 치는 듯한 얼굴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정현은 슬며시 팔짱을 끼며 벽에 기대어 섰다. 그러자 뒤를 이어, 주변에 서있던 요원들이 총을 겨누었다. 진아가 피식 웃고 이내 헛기침을 했다.
우스운 거겠지.
이토록 졸렬한 국가 기관의 행태가.
”뭐 그래서, 어쩌실 생각인지.“
“물론 따님을 설득해야겠죠. 어머님께서.”
“….”
그 발언은 조금 불쾌했다.
그런 딸로 낳은 기억은 없다. 하지만 정현은, 굳이 거기에 반응을 하지 않고 양손을 들어 뒤통수에 가져다댔다. 저항할 의지가 없다는 나름의 표식이었다.
“그럼 체포해.”
백 대령이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
강렬한 빛에 미소가 지워졌다.
방안의 모두가, 창문을 꿰뚫고 날아온 빛에 반응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찬란한 ‘태양’의 빛은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처럼 방안으로 파고들어 폭발을 일으켰다.
“이게 무슨…?!”
헥터가 비명을 내질렀다.
“꺄악?!”
“진아 언니, 이쪽으로!”
정현은 그런 상황에서 침착하게 대응했다. 책상 뒤쪽으로 파고든 그녀는 당황해 비명을 내지르는 진아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연이은 폭발을 견뎌냈다.
그녀는 이 빛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아마 이 방의 모두가 알고 있을 터였다.
“뭐, 뭐야! 이게 무슨 상황이야!!”
당황한 와중에도 백 대령은 어떻게든 체면을 차리려고 애썼다. 불길이 거세게 피어올라 실험실의 안이 엉망진창으로 물든 가운데,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주변의 상황을 통제하려고 했다.
하지만 정현은 느낄 수 있었다.
이건, 그럴 수 없다.
거대한 무언가…. ‘증오’가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투쾅! 하는 소리와 함께 사무실 안에 무언가 뛰어들었다. 등이 저릿저릿하게 울리는 감각에 정현은 놀라 그 너머를 넘겨보았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 그리고 그에 맞춘 듯 새빨갛게 물든 코트를 입은 남자.
가웨인이었다.
“시, 시호…?!”
백 대령이 놀라 소리쳤다. 거기에 반응해 가웨인이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세차게 휘둘렀다. 그러자 고열의 빛이 발생해 초승달 모양으로 흩뿌려졌다.
“대령님!”
옆에 서있던 요원이 그를 안고 몸을 날렸다. 흥분한 가웨인은 앞뒤를 구분하지 못하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그의 손에는 검 대신 투박하고 길쭉한 형태의 나무 몽둥이가 들린 채였다.
“가웨인!!”
헥터가 그에게 맞섰다.
하지만 그녀의 채찍은, 흥분해 눈에 핏발이 가득 선 가웨인에게는 애들 장난에 불과했다. 날아든 채찍이 허공에서 강하게 충격파를 일으켰지만, 가웨인은 도리어 회수되는 채찍을 향해 달려들었다.
“큭?!”
그리고 그 끝을 잡아 반대편으로 넘겼다.
몇 명의 요원이 더 달려들었다. 하지만 가웨인은 그런 그들을 어린애들을 다루듯이 상대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정현은 천운이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빠져나갈 기회다.
정말로 하늘이 주신,
“아니….”
정말로 하늘이 주신 걸까?
너무나도 상황이 잘 맞아떨어져 그녀는 불편한 기분에 휩싸였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바로 잡았다.
“진아 언니, 이쪽으로.”
정현은 슬며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바로 옆에서 머리를 바싹 숙인 채 있던 진아가 고개를 들었다.
“음…. 어떻게 나가려고?”
“그건 나가면서 차차.”
“아니 기왕이면 저 친구와 같이 나가는 건 어때서.”
“네?”
정현은 놀라 되물었다.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세운 진아는 가웨인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 친구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손에는 검은 보석이 들린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