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편
<-- Chapter 6 : 이상의 기사 : 각성 -->
◇
일단 마커가 반짝였던 공간까지 오기는 했지만,
“일단 기다리는 수밖에 없나.”
딱히 방법도 없어 나는 짜게 식은 표정을 한 채 중얼거렸다. 잠깐 갑판으로 나와, 현실과 가상이 뒤섞여 만들어진 검은 파도를 바라보고 있던 나는 콧잔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유하의 파트너…. 였다는 사람에 대해서.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팔에 누군가 달라붙는 감촉이 느껴졌다. 상쾌한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하아…. 심심해애.”
트리슈다.
“괜찮아?”
나는 볼을 부루퉁하게 부풀린 채 한숨을 내쉬는 그녀의 머리칼을 손으로 슬쩍 넘겼다. 그러자 트리슈는 새침하게 웃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심심해.”
“음….”
“뭐라도 좀 해줘봐아.”
그녀는 싱긋 웃으며 시험하듯 애교를 부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거기에 나는 무어라 대답할 바를 찾지 못하고 침묵한 채 눈을 깜빡였다.
“….”
“아니, 얼굴만 봐도 재미있긴 하네.”
그러자 피식 웃은 트리슈가 제멋대로 만족했다.
“무슨 대화를 그리 나누고 계십니까?”
바로 그때, 반대편에서 다가온 모드레드가 무뚝뚝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휙, 하고 난간 너머로 몸을 내민 트리슈가 씨익 웃어보였다.
“심심해서.”
“…. 그렇다면 탐색에 집중하는 편이.”
“하지마안~ 피곤한걸. 잠깐 바람 좀 쐬고.”
트리슈는 우는 소리를 내며 말을 잘라냈다.
역시, 다들 지하에만 있어 좀 더 에너지의 소모가 빠른 것일까. 배를 움직이고 있는 발렌타인과 그것을 돕는 베디비어. 거기에 트리슈는 계속해서 이쪽과 보조를 맞춰주었으니 말이다.
“다음 탐색은 같이 나가는 걸로?”
나는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며 물었다. 트리슈는 턱을 괸 채 나를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히힛, 좋아!”
그리고 이내 웃었지만.
“그럼 저는 빠지겠습니다.”
모드레드가 한숨을 내쉬며 물러섰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않아?”
“아뇨, 사람이 많으면 들킬 위험성이 증대되므로.”
그녀는 침착하게 팝업창을 띄우고, 누군가에게 보낼 메시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허공의 터치패드를 빛나게 만들었다.
“그 사이 린슬렛님을 만나고 오겠습니다.”
“린 언니를?”
“네, 엑스칼리버의 탈취 계획에 대해서 제대로 들어둬야겠지 싶어서 말입니다.”
“그거라면 내가….”
“아뇨, 신뢰할 수 없습니다.”
모드레드는 차갑게 날 바라보았다.
정말로 신뢰를 안 할 때 저런 눈인데.
“당신은 남의 사정을 봐주는 일이 많단 말입니다. 거기에 같은 편이라는 자각이 있을 수록 더.”
“…. 미, 미안.”
사과했다.
“흐음, 모디모디. 린 언니를 믿지 못하겠다는 거?”
“그건, 아닙니다만…. 역시 비비안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 그건 나도 동의해.”
두 사람이 의견을 주고받은 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비안이 어떤 생각을 가진 건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확인을 해보러 간다는 것일까….
“스컬.”
싶던 중, 우아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비틀어 뒤를 돌아본 나는 갑판으로 걸어서 나오던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거리가 좀 떨어진 상태였지만 우아랑은 다급히 무언가를 꺼내 내게 던졌다.
“위치가 확인이 되고 있다.”
“…?!”
“하지만 뭔가가 이상해.”
나는 트리슈, 모드레드와 함께 그 내용을 확인했다.
둥그런 상태에서 빛을 내는 데이터의 조각을 주먹으로 쥐자, 부서진 잔해가 하나로 합쳐져 지도가 되었다.
“…?”
그리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굳어졌다.
서울 시내의 전체에, 붉은색 점이 한 가득이었다. 아니, 마치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점멸하며 그 위치 또한 제각기 계속해서 바뀌었다.
“뭔가 표현하려는 건가?”
“일정한 속도, 변하는 점의 위치…. 등을 따져보자면 그런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누가 보내는지는.”
“엘레노어?”
“그렇지는 않을 듯합니다. 그녀가 이런 식으로 소극적인 형태의 연출을 보여줄 이유는 없으므로.”
“그럼….”
본인인가.
유하의 파트너로 있던 본인이 이런 식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로 대단한 일이 아닐까 싶었다. 엘레노어가 만든 네트워크의 사이에 자신이 원하는 바를 끼워 넣는 기술이니까.
“일단 해석을…. 가능하겠어?”
나는 모드레드를 돌아보았다.
“‘엿 먹어. 더 이상 귀찮은 일에 휘말리긴 싫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생각치도 못한 폭언을 내뱉었다.
“…?”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트루스 부호로군요.”
잠깐 당황한 사이, 모드레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이쪽이 모르는 부호가 있는 거겠지 싶어, 나는 적당히 넘기고는 말을 이었다.
“우리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음….”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가?”
“네, 위치의 특정이 불가능해졌으므로.”
“그래?”
“…. 남 일처럼 말하지 마십시오.”
눈썹을 찡그린 모드레드가 불만이 섞인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도리어 가볍게 웃었다.
“위치는 알 수 없지만, 누구인지는 알 수 있잖아?”
“…?”
“코드를 다루는 일에 능숙하다는 거지. 그리고 이런 실력이면…. 꽤나 유명할 테고.”
“말인즉슨….”
우아랑이 이해했다는 듯 말을 받았다.
“확인을 해봐야겠지만, 할 킬러즈의 데이터베이스에 뭔가가 있지 않을까? 아서리안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해커라면 말이지.”
“알겠다. 바로 확인을 해보지.”
“트리슈, 아서리안 쪽에도 뭔가 남은 정보가 있는지 알아봐줘. 모드레드는…. 린슬렛을 보러간다고 했지?”
“후후, 이럴 때는 조금 멋지다니까?”
“네, 연락이 돌아왔으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상황을 정리하고 결론을 내리자 거기에 모드레드와 트리슈가 제각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들과 눈빛을 주고받은 나는 갑판 끝의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
“주소로는 여기인데….”
헥터는 새하얀 입김을 내뱉으며 눈앞의 거대한 집을 바라보았다. 좌우로 넓게 뻗은 담장이 인상적이었다.
한옥이다.
좁은 골목을 타고 올라왔더니, 중간에 갑자기 경비원들이 나타나 이 위로는 차를 가지고 갈 수 없다며 막아섰다. 덕분에 뒤쪽에 서있는 라이오넬까지 포함해, 둘은 걸어서 이 높은 저택까지 올라온 상황이었다.
초인종은 물론 없다. 그런 세상이다.
“서진아….”
디멘션 커넥터가 방문자를 알리고, 집안을 관리하는 컴퓨터가 주인에게 허가를 구했다. 그 사이 정현이 소개해준 집 주인의 이름을 중얼거린 헥터는 고개를 들어 양쪽으로 난 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왜 한국의 부자들은 전통가옥을 고집하는 거지?”
그리고는 짧게 감상을 내뱉었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섰다. 넓게 뻗은 정원을 바라보며 헥터는 그런 생각이 맞다는 생각을 했다. 이 나라의 부자들은 죄다 전통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을 과시하고 싶기 때문일까.
“저기 아저씨, 어떻게 생각해.”
“….”
“칫, 재미없기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그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거대한, 키가 2미터는 족히 넘는 시커먼 피부의 사내. 라이오넬이 허리를 급히 숙여 저택의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두 사람은 바닥에 박힌 돌을 디디고 건너서 안쪽에 있는 사랑채 앞까지 다가갔다.
“누구….”
그리고 조금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마치 유령의 저택처럼, 휑한 분위기였다. 그 흔한 가정부나 인공지능도 없어 헥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까 전화로는 소리를 버럭 지르더니 문은 또 쉽게 열어주어 이상하다 싶기는 했는데.
“흐음….”
이렇게 또 장난을 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한 헥터는 이윽고, 차갑게 내려앉은 기온의 틈새로 무언가를 느꼈다. 단정히 솟은 코를 킁킁 거린 그녀는 그것이 담배 냄새가 난다는 걸 알아차렸다.
“뭐야 너네…. 누가 들어오래?”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중년의 여자였다. 농염한 색이 절정에 도달해 아직도 그 눈빛에 맺혀 있는. 붉은 입술에 헝클어진 연한 갈색의 머리칼. 헐렁한 셔츠 한 장만을 걸친 상태였다.
“서진아 씨. 맞으신가요?”
“누가 들어오랬냐고.”
불쾌하다는 듯 목소리가 이어졌다. 손에 든 담배를 입에 물고 여자는 헥터를 노려보았다.
“문이 열려….”
“그런다고 들어와? 니들 할 킬러즈 맞지? 나라의 개라서 그런가? 꼴린다고 다 들이대는 건.”
순전히 억지를 부리고 있다.
“안 그래도 오늘 피곤하니까 돌아가지 그래.”
“…. 우정현 회장님이 소개해주셔서.”
“정현이가?”
여자의 몸이 움찔 굳었다.
“네, 이걸 만드신 분이라고 하시던데.”
그 틈을 노리고, 헥터는 품안에서 모르가나를 꺼내 내밀었다. 그것을 본 진아는, 이내 생각에 잠긴 듯 입술을 꾹 다물었다. 효과가 있는 것 같아 헥터는 틈을 놓치지 않고 알아온 사실을 입에 담앗다.
“엘레노어의 초기 개발에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으셨다고 알고 있는데요.”
그리고 간을 보자 진아는 눈썹을 찡그렸다.
“한성진…. 코드네임 ‘그레일’의 정부셨다고.”
“저기, 이름이?”
“헥터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진짜 이상한 이름이네.”
“….”
진아의 말에 헥터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굳어졌다. 뒤에서 라이오넬이 헛기침을 했다. 헥터는 그것이 웃음을 참기 위한 행동이라는 걸 깨달았다.
“갑자기 찾아와서, 별로 남한테 공개하고 싶지 않았던 내 개인적인 정보를 멋대로 줄줄 읊고…. 당신 참 재미있는 사람인데 그래?”
진아는 당당하게 목소리를 냈다.
분명히, 꼼짝하지 못하게 할 말은 있을 터였다. 하지만 헥터는 어쩐지 말이 나오질 않는 것을 느꼈다.
========== 작품 후기 ==========
ㅎㅎ 즐겁게 봐주시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