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편
<-- Chapter 6 : 이상의 기사 : 각성 -->
“저기, 넬….”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기분에, 나는 고개를 돌려 넬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고, 녀석이 말을 이었다.
“힘내세요.”
라고.
“뭐?”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넬은 어색하게 웃으며 양손을 보여주었다.
“…?!”
그 손이, 불투명하게 물든 채였다.
“아무래도 엘레노어께서는 오늘은 두 분만 있으시는 걸 원하는 것 같은데요.”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어이가 없어지는 것을 느끼며 소리쳤다. 넬 역시 곤혹스러운 듯 점점 사라져가는 자신의 손을 짜게 식은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어, 어쩔 수 없잖아요?”
하지만 이내 웃었다.
“넬….”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저는 그동안 가상에서 최대한 정보를 모아볼 테니까! 주인님은 주인님 나름대로 열심히…!”
“아니 잠깐.”
보다 못해 내가 녀석을 제지했다.
새하얀 뺨이 투명하게 물든 채였다. 나는 최근 들어 별 것 아닌 것처럼 의견을 개진하고 생각을 말하는 녀석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타나토스라고 부른다며.”
“에헤헤, 아직 입에 잘 안 익네요.”
“….”
“그럼, 고생하세요!”
“너도 힘내.”
그 말이 어쩐지 신기한 기분이었다.
서로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 이내 넬이 사라졌다.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던 나는 이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서 우아랑을 내려다보았다.
뭔가 문제를 계속해서 발생시키려는 것 같지만….
“여기는 현실이란 말이지.”
“윽…!”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우아랑을 번쩍 안아들었다. 그리고는 침대 바로 뒤에 있는 의자에 앉혔다.
“아, 윽….”
괴로운 듯 신음하는 우아랑.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그런 모습에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돌아서 침대를 정리했다. 어쨌든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 정도일 테니까.
아니 정확히는 그렇다고 생각하는 거지만.
“자, 일어나봐.”
“크윽….”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우아랑을 다시 안았다. 그리고는 침대에 눕히고 아래로 밀어두었던 이불을 다시 당겨 덮어주었다.
“더, 워….”
하지만 녀석은 그것을 떨쳐냈다.
이마를 만져보니 열이 있다.
“끄응….”
순간 당황했지만, 나는 이마를 매만지며 정신을 차렸다.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이해하려 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어려운 일이었다.
눈앞의 여자는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내 최악의 적중 하나였다. 그런 여자와 지금은 한 장소에 갇혀서, 그것도 지금까지 고생고생해오면서 목표로 삼아왔던 것을, 이번에는 내 쪽에서 ‘도와서’ 클리어를 해야 한다니.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우아랑….”
나는 그런 녀석을 불쾌한 감정을 느끼며 바라보았다.
모르겠다.
이 녀석은 대체 무슨 이유로 할 킬러즈가 된 거지? 어째서 싸우는 거고, 왜 자신의 어머니와 그토록 적대를 하는 걸까.
“으극….”
그리고 왜, 이토록 괴로워하는 것일까.
“….”
잠시 서있던 나는, 돌아섰다.
반대편 방으로 향하는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철커덕 하는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가 작동했다.
“그럴 마음도 없어, 개자식.”
명백히 의도적인 행동에, 나는 인상을 찡그린 채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그 문의 바로 옆에 있던 화장실로 들어섰다. 나름대로 할 일을 떠올렸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는 여자다.
하지만 가만히 놔둘 수는 없다. 어쨌든 녀석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고민하고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분이 나쁜 것이기도 했지만…. 인정할 부분은 인정해야만 했다.
수건을 찾아, 그것을 따뜻한 물로 적시고 짠 뒤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 나는 이불을 완전히 걷어찬 채로 누워있는 우아랑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일단은 오늘 밤을 무사히 넘겨야겠지.
“일어나봐.”
“윽….”
가볍게 목소리를 내자 약간의 반응이 돌아왔다. 정신을 반쯤 놓은 상태에서 반응이 있는 걸로 봐서는 완전히 기절하지도 못하고 괴로운 상태인 듯했다.
“몸 닦아줄 테니까.”
“스….”
“그래, 스컬.”
멍한 눈으로 대답하는 우아랑을 일으켜 세워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녀석을 조금 곤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지고 작업(?)을 시작했다.
“옷 벗어.”
“응….”
완전히 맛이 간 녀석은 순순히 말을 들었다.
독특하게도 민소매였지만, 셔츠는 가슴에 달린 단추를 풀어야 하는 기본적인 형태였다. 멍하니 침대 위에 앉아 단추를 푼 우아랑이 셔츠를 벗었다.
새하얗고 깨끗한 등이 드러났다. 날개 모양의 뼈가 오롯하게 드러나, 그 사이에 움푹 들어간 척추의 라인은 매끄럽고 단정한 형태였다. 잘록한 허리까지 이어진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이내 고개를 휘휘 내저으며 수건으로 등을 닦기 시작했다.
의식하지 말자. 의식하지 말자.
하지만 여성스러운 체형이다. 아니 물론 여성이니 당연한 거겠지만서도…. 우정현 회장의 젊었을 적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허리를 꼿꼿이 펴고 선 모습이 약간 흑표범을 연상케 했다.
평소의 자세나 행동, 고압적인 말투나 표정은 딱딱하고 고압적이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맛이 가서 그런 식으로 감춰놓은 원래의 모습이 드러난 듯했다.
근육이 붙었지만 나올 곳은 나오고 들어갈 곳은 들어간, 그런 지리멸렬한 표현이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옷을 입었을 때는 전혀 안 그랬는데.
입으면 말라 보이는 타입인 걸까. 유려한 선에 시선이 팔려있던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다시금 수건으로 땀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잠….”
바로 그때, 우아랑이 말을 걸어왔다.
“뭔데.”
“그, 한 번 빨아서….”
땀을 닦아내자 조금은 정신을 차린 걸까. 녀석은 숨을 몰아쉬면서도 또박또박 말을 해왔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일어서 다시 화장실로 향했다.
- 망자가 기분 좋아합니다.
- 동시에 수치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뭔 미친 소리야….”
그리고 떠오른 메시지를 애써 무시했다.
그것을 내가 안다는 것 자체가 우아랑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수치일 터였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금 바깥으로 빠져나가 녀석의 몸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
무거운 침묵만이 맴돌았다.
등을 다 닦아내고, 화장실에 가 다시 수건을 쥐어짰다. 그리고 돌아와 팔과 목까지. 그러는 내내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 우아랑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검은 점액질로 물든 가슴을 감춘 채로.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저기, 그….”
그리고 뒤를 이어, 녀석이 간절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눈가가 촉촉하게 물든 채 있던 우아랑은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자리에 누웠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뒤로 돌아누웠다.
“할 말이 있으면 하라고.”
“너도 좀 쉬어두라는 말이었다….”
절대 그런 것처럼 보이진 않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앞머리를 매만졌다.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듯한데, 지금의 상황에서 입을 열게 만들기라는 쉽지 않아보였다.
그리고 뒤를 이어, 다시금 메시지가 떠올랐다.
- 망자는 허기를 느낍니다.
“….”
그럼 말을 하지 그랬냐.
순간적으로 그렇게 말할 뻔했지만, 나는 녀석이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배가 고프다고 하면 어리광을 부리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테니까.
“잠깐 나갔다 온다.”
나는 무뚝뚝하게 목소리를 내며 돌아섰다.
“어딜…?”
“알 거 없어.”
룸서비스는 없을 시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적당히 근처에 있을 편의점을 둘러봐야겠지. 망자와 계속 붙어있어야 한다는 말이 신경 쓰였지만 이대로 재울 수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이 엘레노어의 퀘스트로 인해 발생하는 거라면, 망자를 돌보기 위해 편의점에 가는 것쯤은 봐줄 테니까.
“위, 위험한 짓은…. 윽!”
바로 그때, 바닥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뒤를 돌아본 나는, 침대 앞에 거꾸로 엎어져 있는 우아랑을 발견했다. 나를 말리기 위해 일어서려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저렇게 넘어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얼굴을 땅바닥에 박고 있는 모습이 조금은 웃겼다.
“이 멍청아.”
나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으며 우아랑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는 거꾸로 넘어진 녀석을 번쩍 안아들었다.
“힉?!”
“의외로 여자 같은 목소리도 내는군.”
“그, 그게 무슨 소리냐…!”
당황한 우아랑은 안긴 상태에서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나를 노려보았다. 일부러 좀 더 놀리기 위해 반대편으로 돌아간 나는 녀석을 다시 침대에 눕혔다.
“자지 말고 있어 먹을 거 좀 사올 테니까.”
“뭐…?”
“아까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뭐라도 좀 먹고 기운 차려야지.”
“아, 아니….”
침대에 누운 우아랑의 얼굴이 다시금 붉어졌다. 이불을 올려 얼굴까지 뒤덮은 녀석이 당황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녀석의 이마를 쓸어, 땀에 젖어 달라붙어있는 머리를 넘겨주었다.
“무, 무슨 짓이냐…!”
“기운도 없으면서 무리하지 말란 말이지.”
“우으….”
이마까지 새빨개졌다.
어쨌든, 나는 그런 녀석을 침대 위에 두고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예기치 못한 상황이었지만 바닥에 넘어진 녀석을 보고는 좀 복잡했던 기분이 가시는 기분이었다.
일단 오늘 밤을 무사히 넘긴다.
오직 그것만 생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