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편
<-- Chapter 6 : 이상의 기사 : 각성 -->
◇
딱히 의미가 없는 짓이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중환자실을 보며 아랑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저 겉치레에 불과한 행위라고.
하지만 그는 굳이 그렇게 행동했다.
왜일까. 체면을 차리기 위해서? 아니면 선전에 이용하기 위해서? 아마 양쪽 다 해당되겠지. 그는 깨어나지 않는 아들에 대한 걱정은 단 한 줌도 없는 냉혈한이니까.
모르고 있었다는 말로 자신을 변호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랑은 어두운 복도에서 희미한 미등이 들어온 채로 있는 중환자실을 바라보았다.
“….”
가웨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실제로 찔린 것은 물론 아니다. 그렇다고 찔리지 않은 것도 아니다. 검이 찌르는 순간, 파고드는 부분이 사라지며 찌른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하지만 그 통증은 진짜다.
재킷을 벗으면 금방 없어지지만.
하지만 벗을 수 있는 걸까?
인간은, 재킷을? 그리고 디멘션 커넥터를? 현실과 가상이 융합된 이 세계를 버리고 돌아갈 수 있는가?
모르겠다.
“후우.”
스스로 이야기하고도 복잡한 기분에 아랑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무엇이 진짜인 걸까 싶은 마음이었다.
지금 그녀가 할 킬러즈에게 느끼는 감정처럼.
정의라고 믿지는 않았지만, 차악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부서져 내렸다. 믿었던 진실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먹먹한 통증만이 아로새겨진 채였다.
결국 없는 게 아닐까.
진실이란 것은.
“아니….”
그녀는 인상을 찌푸린 채로 중얼거렸다.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랑은 두터운 유리벽을 손으로 짚고는 분노로 말을 이었다.
“나는, 당신 같은 머저리하고는 달라.”
아랑은 눈앞에 잠든 남자를 향해 중얼거렸다.
스스로 악당이란 것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무너져 내린. 그리고 결국 거대한 악의에 굴복해 가장 사랑했던 사람을 상처 준 남자에게.
“타협 따위는 없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에리니스와 협상해 이 게임을 통제할 수 있는 선에서 바꾼다니. 그게 되느냐는 둘째치고서라도 결국 폭탄을 다른 곳에 떠넘기는 짓밖에 되지 않았다.
결국 끝내는 길뿐이다.
이 게임을 끝내지 않으면, 이런 문제는 계속 발생할 것이다. 권력자는 부패하여 그런 혼란을 이용하고, 죄 없는 시민들만 계속해서 그 고통을 나눠받는.
그런 상황을, 아랑은 지금까지 ‘원만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결국 권력자는 이해하지 못하고 관심 또한 없는 것이었다.
거기에서 진정한 해결법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타나토스가 옳다는 말은 절대 아니었다. 그들은 무모하고 급진적인 멍청이들이었다. 희미하다 못해 없다시피 한 확률에 기댈 뿐인.
결국은 이상론자에 불과했다.
“….”
얼굴에 호흡기를 달고 있는 가웨인을 힘껏 노려본 아랑은 천천히 등을 돌렸다. 어둠속에서 갑작스레 인기척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라이오넬…. 대위님.”
그녀는 침착하게 목소리를 냈다.
어둠 속에서 강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뒤를 이어 바닥이 진동한다고 느껴질 정도로 강한 발소리와 함께 라이오넬이 천천히 다가왔다.
“대장님께서 찾으신다.”
그리고 그는 유창한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백 대령님께서…?”
“중요한 협의에 갤러해드 후보자의 자격으로서 함께 해주었으면 한다는 모양이다.”
“알겠습니다.”
무슨 협의인지 순간적으로 의문이 들었지만 아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뒤를 이어 라이오넬이 데이터 조각을 휙 내던졌다.
“이곳으로 가면 된다.”
장소 정보였다.
“…?”
하지만 꾸욱 짓눌러 그것을 확인한 아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눈앞에 서있는 라이오넬을 바라보았다.
“저, 대위님 이곳은….”
식당이다. 위치만 보아도 비싸 보이는.
설마 하는 심정에 그녀는 눈썹을 찡그렸다. 하지만 라이오넬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우한의 회장과 만난다고 하더군.”
거기에 아랑은 동요를 감추지 못하고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랑은 그렇게 생각하며 돌담 앞을 걸어 가게의 정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차량 한 대 없이 조용한 길에는 요원들을 비롯해 수십 명이 넘는 검은 양복의 사내들이 철통 같이 경비를 서는 중이었다.
확실히 심상찮은 냄새가 났다.
뭔가에 대한 협의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만큼, 아랑은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다.
뭐지?
분명 우한 쪽에 대한 압박은 헥터의 삽질로 인해 잠시 중단된 게 아니었던가? 엘레노어에게 대응할 확실한 계획이 잡힐 때까지는 분명히….
“아.”
역시 그것인가.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어 아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확인을 해봐야겠지만 아마도….
거대한 문 앞으로 다가가자 자동으로 문이 열렸다. 그 앞에서 한복을 입은 여성의 모습을 한 홀로그램이 기다리고 있어 그녀를 알아보고는 안내를 시작했다.
아랑은 그 뒤를 따라 정원을 걸었다. 소란스럽지 않고 조용하다는 것은 손님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은밀한 사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일 터였다.
“이쪽입니다. 우아랑님.”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올라서자 홀로그램이 예의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아랑은 시선을 보내 마루의 가장 안쪽에 있는 문의 자리가 빛나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
눈앞에서 정보를 표시하던 창이 사라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우아랑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물러간 건가?
아니 그건 아닌 듯했다. 디멘션 커넥터가 강제로 작동을 중지하며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이었다.
“이건 대체…?”
“거기 서있지 말고 들어오게.”
목소리가 이어졌다.
다시금 뒤를 돌아보자 드르륵 하고 장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길게 뻗은 툇마루의 너머로부터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백 대령의 목소리.
그 뒤를 이어 나타난 것은 한복의 여인이었다.
“이쪽으로.”
금발의 서양인 여성.
헥터다.
“…?”
우아랑은 그 광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홍치마에 흰색의 저고리. 고름을 보기 좋게 매듭진데다가 버선까지 신은 것이 퍽이나 본격적이었다.
화려한 걸 좋아하는 여자다.
아랑은 그렇게 생각하며 굳이 스스로의 표정을 감출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지금의 이 충격이, 백 대령의 곁에서 마녀처럼 모든 것을 계획했던 헥터에 대한 혐오를 이겨낼 정도였으니까.
그만큼 어처구니가 없었다.
“요염한 선이로군요.”
가까이 다가가자 헥터가 빙긋 웃었다. 아랑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헥터는 천천히 손을 뻗어 어깨가 드러난 채 있는 그녀의 상반신을 가리켰다.
“….”
디멘션 커넥터가 강제적으로 종료되고, 그 영향에 따라 게임의 영향을 벗어나게 된 것이었다. 흔한 일은 아니었던 터라 아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이내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군복이….”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은 그녀의 어머니였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한 기업체의 대표로서 이곳에 와있다. 우정현 회장. 되새기듯 그렇게 생각한 우아랑은 백 대령에게 경례를 붙이고 옆으로 물러섰다.
반응하지 않았다.
정현의 말이, 순간적으로 당황해 나온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그 말대로 그녀가 군복에 대해 언급한 것은 어머니로서 걱정해서 하는 말이었다.
사실 스스로는 거의 의식하지 못했으나, 민소매 차림인 아랑의 군복은 보기에 약간 여성스러운 색기가 묻어나오는 편이었다. 그녀로서는 검을 조종하는 스킬을 쓸 때 편해서 그런 식의 개조를 택한 것이었지만.
“앉게. 우 대위.”
“알겠습니다.”
디멘션 커넥터의 작동이 끊어지자 조금 의아한 기분이 들었으나 아랑은 굳이 묻지 않았다.
어둠에 잠긴 방, 조그마한 호롱불 하나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전통적인 방에 어울리지 않는 기계가 한 대 작동 중이었다.
아마 저 기계가 가상과 현실 간의 이음을 강제로 끊어버린 것이리라.
“계속해도 괜찮을까요.”
가볍게 미소를 지은 백 대령이 정현을 바라보았다. 주름이 진 입가, 히끗히끗한 머리카락과 다부진 어깨를 보자면 그야말로 군인의 정석 같은 인물이었다.
“그러시죠.”
정현은 거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전통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녀로서는 이런 곳에 불려서 온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도리어 예상했다는 반응이었다.
“부탁하네, 헥터.”
“네, 대령님.”
뒤쪽에 서있던 헥터가 치맛자락을 들며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그리고 뒤를 이어 그녀는 테이블 위에 종이를 꺼내 늘어놓았다. 아랑은 눈썹을 치켜떴다.
종이라.
오랜만에 보는 물건이다.
“처음부터 다시 설명할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마음대로 하시죠.”
회장이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일단 현재 네트워크 세계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헥터는 비릿하게 웃었다.
현대에 이르러 네트워크는, 그런 세계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있어서 아주 당연한 것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엘레노어 사태는 그만큼 성가신 것이었다.
엘레노어는 언제 어느 때라도 전 세계에 있는 네트워크를 장악해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그리고 현실에서 사용되는 수많은 물건들은 이 네트워크의 영향 아래에 놓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현실 세계에 영향력을 끼치는 신이라 불리는 것이다.
“하지만 약점이 아예 없지는 않죠.”
결국 그녀 역시 네트워크에 속한 존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역으로…. 네트워크 내에 바이러스를 침투시키면 격퇴가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 하지만 그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이어진 설명에 아랑은 저도 모르게 반박했다. 하지만 이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주변을 살폈다.
회장, 백 대령, 헥터. 세 사람이 뭔가 말해보라는 듯 그녀에게 시선을 보냈다.
“아니…. 현장 요원으로서 말씀드리자면, 언제나 엘레노어는 대응이 너무 빠르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랑은 조금 얼굴을 붉힌 채 말했다.
결국 문제는 그것이었다.
그녀는 가상을 완전히 통제하며, 현실에 영향을 끼친다. 거기에 인간이 대응을 하려고 해봤자 통하질 않는다. 반응 속도 자체가 다른 것이다.
“헌데 뭔가 방법이라도….”
“이에는 이라는 말이 있죠.”
헥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녀가 수많은 데이터를 통제하고 관리한다면, 저희는 그게 과부화를 일으킬 때까지 데이터를 쏟아 넣으면 되는 거예요.”
“어떤 데이터를…?”
“물론 더미 데이터죠. 그녀는 현실을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니까요. 저희 쪽 연구원 30명이 1개월에 걸쳐 계산한 바에 따르면 리비타바이트 단위의 더미 데이터를 쏟아부어야 할 것 같지만요.”
“리비타바이트?”
아랑은 다시금 눈썹을 찌푸렸다.
“2의 160승에 해당하는 숫자에요. 무려 0이 49개가 넘게 붙는…. 인지의 범위를 벗어난 단위죠.”
“그걸….”
“물론 저희 쪽에 제대로 된 물건이 준비되어가는 중이죠. 그게 엘레노어를 혼란시키고 그 심장을 정확하게 찌를 겁니다. 그녀가 현재에도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발달하고 있다는 것을 제외한 결과 값이지만.”
쓰게 웃은 헥터가 다시 종이를 올려놓았다.
그것은 좀 이상했다.
종이 위에 그려진 것은 어떠한 데이터의 결과 값이 아니었다. 현재까지 이어진 어려운 이야기에 어울리는 어떠한 과학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검이었다.
“엑스칼리버.”
신화와 전설상에 내려오는 최강의 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