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편
<-- Chapter 5 : 이상의 기사 -->
◇
“젠장…. 나는…!!”
떨리는 무릎이 금이 간 아스팔트를 짚었다.
“나는!!”
남자는 이를 악 문 채 절규하며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거대한 절망이 그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분노해 뇌까리던, 가장 증오하고 동경하던 적의 시선이 단호히 의지를 내꺾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앗!!!”
하지만 일어서야 한다.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다. 쓰러질 수는 없다.
붉은 머리가 비참하게 흐트러진 채였다. 남자는 몇 번이고 팔뚝으로 바닥을 내리찍었다. 인간을 초월한, 가상이 뒤섞인 세계의 몸이 부서진 잔해를 흩날리게 했다.
그곳에서의 고통과, 현실에서 얻어맞은 흔적으로서 코피를 주륵 흘리며 남자는 몇 번이고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이내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라이오넬! 헥터!”
그리고 옆에 있던 다른 기사들을 불렀다.
피투성이가 된 채로.
“우아랑은! 다 어디에 있어!! 뭐하는 거야!”
그는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러댔다. 하지만 라이오넬과 헥터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각자의 일에 집중했다. 상황을 보고하고 ‘퇴각’을 준비했다.
그 가운데, 가웨인은 철저하게 혼자였다.
해가 반쯤 지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푸르게 빛나기 시작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는 멍한 얼굴로 계속해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패배감.
절망감.
무력감.
갖가지 감정이 소용돌이치며 내면을 헤집었다. 금방이라도 구토가 나올 것 같아 가웨인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렇게 계속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연기가 올라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
불에 타 전소한 가게에 대한 걸 머릿속에 떠올린 가웨인은, 그 희미한 회색을 따라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이내 그 끝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박살난 헬기의 잔해를 수거하고 있는 처리반의 너머에 서있는 두 사람을. 그리고 가웨인은 자신의 눈을 믿지 못하고 놀라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수, 현…?”
하지만 어째서?
그 옆에는 분명 린슬렛이다. 그건 알고 있는 바였다. 하지만 가웨인은, 어째서 비비안이 ‘서’있는가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고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환상을 보는 것일까.
“뭐야…? 저건.”
잠시 그렇게 생각했으나, 헥터 역시 두 사람의 모습을 알아보고 눈썹을 찡그렸다. 거기에 라이오넬과 인근에서 작업을 하던 병사들마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코트와 정복을 입은 자들의 사이에서, 린슬렛과 비비안의 모습은 그만큼 이질적이었다. 고양이의 얼굴을 본뜬 듯한 가면을 쓴 린슬렛을 호위하듯 두고 있는 푸른 원피스 차림의 비비안.
심장이 동작을 멈췄다.
멍하니 있던 가웨인은 저도 모르게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금 먼 곳에 서있던 그녀가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헥터와 라이오넬의 사이를 지나쳐,
“비, 비안….”
그는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갔다. 손에 찬란하게 빛나는 갈라틴을 움켜쥔 채로.
그저 스스로에게 취했을 뿐인가.
그 남자는 그렇게 말했었다. 자신은 그녀를 사랑한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감정에 취하기 위해 그녀를 위하는 척 했을 뿐이라고.
하지만 아니다.
절대로…. 그것은 아니다. 확언할 수 있다.
왜냐면 이렇게….
“커흑…!”
바로 그 순간, 몸이 멈췄다.
가웨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아해했다.
그녀가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이에 있는데, 더 다가갈 수 없다. 그것을 느끼고 다음 순간 그는 입술을 비집고 피가 한 줄기 흐르는 것을 느꼈다.
파르르 떨리는 손을, 천천히 뻗었다.
분명히 갈라틴이 들려있던 오른손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곳은 텅 빈 채로, 검은 의아하게도 자신의 복부에 꽂혀있는 상태였다.
“저는….”
그리고 비비안이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자유롭겠습니다.”
그제야 가웨인은 깨달았다.
그녀가 자신을 찔렀음을.
갈라틴을 들고서.
“비비안….”
그제야 그는 모든 상황을 납득했다.
떨리는 손을 당겨, 입술의 피를 엄지에 묻힌 그는 비비안의 얼굴을 향해 뻗었다. 둥그런 자국을 볼에 찍었다. 그녀는 눈썹을 잔뜩 찡그린 채였다.
그것은 슬픔일까, 분노일까.
“날, 용서하지 마라.”
더 이상 좋을 대로 해석하기에는 지쳐, 가웨인은 비루함에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거의 다 도착했습니다.
그런 목소리가 들려온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베디비어의 넓은 등에 업힌 채로 불어오는 바람의 냄새를 맡았다. 풀의 냄새가 희미하게 풍겨오고 바스락거리며 무언가 스치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것이 어쩐지, 사람 같다고 생각했다.
눈을 반쯤 감은 채, 웅성거리며 사람들이 병원의 1층 복도를 분주히 돌아다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에 발라둔 화상 연고의 냄새를 맡으며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천천히 병실로 향했다.
절망에 끌려들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며.
“[누, 나….]”
병실에는 그녀가 있었다.
무슨 말을 했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유하 누나는 절망에 잠겨든 채로 내게 상황을 물어보았다. 거기에 나는 떨떠름한 채 진실을 이야기했다.
도리어 말하지 않는 것이 기만이라고 생각했기에.
선의로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행동했던 사람에 대한. 그리고 그 끝에 수많은, 동료라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여 쓰러졌던 완벽한 기사에 대한.
그녀는 절망에 몸부림쳤다.
결국 아무것도 이루어내지 못했다며, 도리어 모든 것을 잃었다며, 그런 스스로에 대한 혐오와 분노로 괴로워하며 쉽사리 제정신을 되찾지 못했다.
결국 갤러해드는 스스로를 죽이는 길을 택했다.
자신은 죄인이라며.
결국 혼자서는 도달할 수 없는 곳이 있다며. 그곳에 도전했다 스러진 건방진, 스스로를 단지 갤러해드라고 착각했을 뿐인 바보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게,
[내가, 내가 아니게 되더라도…. 미워하지 말아줘.]
그런 말을 전했다.
[준은, 언제나 따뜻한 사람으로 있어줘.]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지만.
“….”
한때 이성으로서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없다. 그 사람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윽!”
갑작스레 충격이 몰려들어, 나는 격통에 저도 모르게 신음을 냈다. 베디비어가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바닥에 착지한 것이었다.
“괘, 괜찮으십니까?”
쭈욱 옆에 있던 모드레드가 그런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잠시 당황했을 뿐이라 나는 너스레를 떨듯 베디비어의 등에 더 매달렸다.
“사, 살살 좀 부탁한다고.”
“하하, 타나는 어려운 요구를 하네요.”
그것을 알아차린 베디비어가 짧게 웃었다. 편안한 기분을 느끼며 나는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제 도착했어요.”
“그래…?”
뒤를 이은 녀석의 말에 금방 고개를 들었지만.
한적한 시골인 것처럼 느껴졌다. 위치 정보를 불러올 수가 없는 걸로 봐선 엘레노어의 영향력이 끼치고 있는 장소인 걸까. 꽤나 오래 달렸던 것 같은데.
어디선가 파도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거기에서 어쩐지 나는, 유하의 냄새를 맡았다.
“…. 잠깐 다녀올게.”
그리고 나는 반쯤 뒤를 돌아본 채로 중얼거렸다. 모드레드와 베디비어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트리슈는 어쩐지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거기에 깨달았다.
그녀가 걱정하고 있음을.
“괜찮아, 트리슈. 이야기만 하고 오는 거야.”
“…. 정말이지.”
트리슈는 조금 어리광을 부리듯 입을 비죽 내민 채 다가왔다. 나는 웃으며 트리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나 혼자 하는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럴 테지만.
“저, 주인님.”
돌아서려던 순간, 넬이 나를 불렀다. 나는 바로 옆에 서있던 그녀를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아보았다.
“넬도 이곳에 있을게요.”
“…. 그래.”
나는 가만히 미소를 짓고 있는 넬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눈앞에는 조그맣고 세련된 전원주택이 보여 나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환기를 시키려는 요량인지 어두운 집안에는 창문을 모두 열어두어 불투명한 커튼이 후련했다.
속이, 기이하게도 후련했다.
“…. 일찍 끝나셨군요.”
그녀는 테라스에 서있었다.
발목에 이르는 주름치마, 셔츠에 검정색 숄을 두른 채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그녀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잔업은 필요 없다고 해서.”
피를 뚝뚝 흘리며.
하지만 그것이 그녀에게 보이지 않음을 자각하며.
“얼굴이 엉망이네요.”
하지만 알아차렸다.
가까이 다가가 서자 그녀는 눈썹을 잔뜩 찡그린 채 나를 바라보았다. 거기에서 나는, 소화기에 얻어맞다 못해 재킷을 벗은 상태에서 난투를 벌였음을 상기했다.
“…. 그 정도야?”
“네, 무척.”
그녀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손을 뻗어, 좋은 향기가 나는 그것으로 내 얼굴을 닦아주려고 했다.
“꺅?!”
하지만 나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주, 준?!”
“미안해, 걱정 시켜서.”
부드러운 향기가 풍겨왔다.
하나로 묶은 연갈색의 머리가 바닷바람에 흩날렸다. 나는 한동안 그녀를 끌어안은 채 말을 잇질 못했다.
모든 것을 놓았음에도, 그 누구보다 완벽한 그녀를.
“정말로 미안해.”
“…. 힘든 일이 있었나보군요.”
그리고 나는 마음이 편해지는 목소리를 들었다.
“괜찮아요. 말하면 마음이 편해지겠어요?”
“별 건 아니고, 친구랑 싸운 정도.”
“후후, 싸우면 안 되죠.”
그녀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그 녀석이….”
“네네, 천천히 말해도 괜찮으니까요.”
“집을 불태웠다고.”
“…?”
유하의 손이 어쩐지 멈춘 것 같았다.
“우리 집이, 완전히 불에 타서…. 새까맣게….”
“…. 준?”
어쩐지 목소리가 잔뜩 굳은 채다.
“응?”
“집이, 어떻게 됐다고요?”
그녀는 반쯤 멍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어색하게 웃는 모습에 나는 당황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불에….”
“대체 뭘 하고 싸운 거죠.”
“아니….”
“대답해주세요. 저 지금, 이성을 잃을 것 같으니까.”
“유, 유하님?”
당황해 존댓말까지 썼으나, 유하의 표정은 단호했다. 슬쩍 웃고 있었지만, 거기에서 묘한 압박감이 있어 나는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준?”
이걸 무어라 설명하면 좋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