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편
<-- Chapter 5 : 이상의 기사 -->
◇
거리는 처참했다.
“크윽…!”
아랑은 분한 기분에 이를 악 물었다.
아니, 사실 알고 있다. 그들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않았음을, 하지만 그것에 수십 명이 넘는 전경들과 열 사람에 가까운 요원들은 완벽하게 농락당하고 말았다.
베디비어의 의수가 내리친 아스팔트 바닥은 금이 가 나무의 나이테와 같은 흔적이 남은 채였다. 거기에 건물의 콘크리트 벽에는 아직까지 트리스탄의 화살이 꽂힌 부분이 남아있을 지경이었다.
“위선이다…! 타나토스!”
그런 광경에 아랑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신음하며 쓰러져 있는 전경들, 거기에 반대로 요원들은 대부분이 멀쩡한 상태였다.
거기에 그녀는 비루한 감정을 느꼈다.
그런 상황에서 멀쩡한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이런 사태, 이런 세계에 가장 연관된 인물로서.
“빌어먹을….”
“그렇게 분하심까?”
바로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먹을 꾹 움켜쥐고 있던 아랑은 고개를 들어 옆으로 다가온 남자를 바라보았다. 붉은 머리를 흩날리며 담배를 문 가웨인이 거기에 불을 당겼다.
“놓쳤다는 사실이.”
“대위님은 멀쩡해 보이시는군요.”
그런 모습은, 도리어 사람을 진정시키는 힘이 있다. 거기에 휘말린 듯하면서도 아랑은 분노의 레벨을 한 단계 낮춰 가볍게 눈썹을 찡그리는 선으로 돌아왔다.
“…. 나름대로 짜증은 나있는데 말이죠.”
그리고 가웨인은 피식 웃어보였다.
“그래도 뭐랄까. 티가 나지 않는 모양이군요.”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으며 연기를 뱉어냈다. 자세히 보니 미세하게 주먹이 떨리고 있어 우아랑은 나름대로 그 분노에 공감했다.
“항상 방해만 하는군…. 여자란 건.”
뒤를 이어 가웨인은 파르스름하게 말을 중얼거렸다.
“네?”
조그마한 목소리에 제대로 말을 듣지 못했던 아랑은 되물었다. 하지만 가웨인은 고개를 내젓고 이내 담배를 문 채로 상쾌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
“일단 복귀하도록 하죠.”
“알겠, 습니다.”
조금 그 미소가 사람의 형상을 벗어났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과민일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랑은 담배를 내던진 채 돌아보는 가웨인의 모습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
뺨을 얻어맞았다.
코트를 기동 해제 시켜두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직도 남자의 주먹에는 힘이 실린 채였다. 충분히 늙지 않았기에 그런 것이리라.
“무능한 놈.”
검은 머리를 포마드를 발라넘긴 사내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바닥에 나가떨어진 자식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거기에서 부정(父情)은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네놈에게 맡겨둔 내 실수였군.”
“큭…. 언제부터 그랬다고. 영감탱이.”
가웨인은 지지 않고 받아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핏기가 머무른 입가를 닦아내며 그는 차가운 얼굴로 자신의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제대로 처리를 해두라고 분명히 말해두었을 텐데.”
“그렇게 말해도…. 그 자식들, 존나게 쎄단 말이지. 거기다가 현재 우리 기술력으로 엘레노어가 일으키는 헛짓거리에 대응할 수가 없잖아?”
“그건 아무런 상관이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이란 말이다.”
그게 안 되니 이러고 있는 건데.
가웨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이마에 깊게 주름이 팬 아버지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세계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죽어가는 노인을 가여이 여겼다.
결국 간단한 이야기였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지금의 이야기에, 이런 거대한 흐름을 쫓아오지 못하고 동 떨어진 채다. 오래된 식을 고집하여 그것으로 언제까지나 자신과 부패한 악당들이 지배하는 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 않은데 말이지.
애초에 그걸 파악하지 못해 헥터가 저지른 일도 미리 손절해두지 못하였으면서, 말이 많다.
눈앞의 무능한 노인은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모르는 일이 있으면 체면을 차리고, 타인을 속이고 버리는 형태로 자신의 추잡한 권력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세상은 변화하고 있다.
새롭게 탄생한 가상의 신으로 인해.
“언론을 통해 속이는 것도 한계야.”
“사람에게는 눈과 귀가 있으니 말이지.”
“…. 미친 게냐?”
계속된 비아냥거림이 이어지자 노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 가웨인을 바라보았다.
“지금 네 처지를 모르는 건 아니겠지?”
“글쎄.”
“내가 지금까지 네놈의 뒤치다꺼리에 얼마나 많은 힘을 써주었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래놓고 지금은 그런 뒤치다꺼리에 이골이 나서 협박거리로 삼고 있지. 안 그래?”
가웨인은 지지 않고 받아쳤다.
그리고 뒤를 이어, 다시금 가웨인의 얼굴에 주먹이 꽂혔다. 비틀거리며 물러난 그는 분노로 이빨을 빠득 갈며 백 대령을 노려보았다.
“큭….”
“그렇다면 슬슬 좀 어른이 되지 그러냐.”
이어진 일침.
“책임을 져야할 것은 지지 않고, 책임을 질 수 없는 일에 집착하지. 그것이 지금의 너다.”
“당신 정자야. 근본이 썩어서 그런 거겠지.”
“한심해 빠진 저열한 욕설뿐이군. 뇌가 자라지 못했어.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할 줄 아는 전부지.”
가웨인을 비웃으며 가까이 다가온 백 대령은 이윽고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어설픈 손으로 팝업창을 띄워 무언가 메시지를 하나 보여주었다.
헥터로부터였다.
“네 여자가 사라졌다.”
“…?!”
가웨인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리고 그는 활활 불타오르는 눈으로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메시지를 읽을 생각도 들지 않아, 그는 저도 모르게 백 대령의 멱살을 쥐고 들어올렸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일단 추적을 전개하고 있지만….”
“이 개새끼가!! 혼자 제대로 밖에 나다니지도 못하는 애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게 말이 돼?!”
“그래서 나도, 외부의 개입을 의심하고 있다.”
“뭐…?”
“누군가 데려가진 않았을까 한다는 거지.”
“그게, 대체 무슨….”
“글쎄, 누구일까.”
백 대령은 일부러 라는 듯 입술을 비틀며 중얼거렸다. 가웨인은 현기증을 느끼고 뒤로 물러섰다.
물론 그 말을 듣자 한 가지 예감이 일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과, 거기에서 느껴진 배신감이 충돌을 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원하는 게 있다면 확실하게 지원을 해주지. 전투 헬기의 사용 허가 또한 떨어졌다.”
“뭐…?”
말도 안 되는 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백 대령은 길쭉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가웨인은 그런 그가 불을 붙이고 연기를 뱉을 때까지 멍해져, 자신이 대체 무슨 소리를 들은 걸까 고민에 빠졌다.
“그만큼 우리도 필사적이라는 거야.”
“아니, 아저씨. 우리는 명색이 평화를 지키고 있는 정의로운 공권력 집단 아니었어?”
“그걸 회장과 그 산하의 집단이 방해하고 있는 시점에서 성립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백시호.”
백 대령은 단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때문에 곪아가는 상처를, 뒤집어 들어내서라도 치료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거다.”
“…. 당신 미쳤어.”
느닷없이 서울 시내에 무장 헬기를 출동 시켜? 그리고 그걸 통해서 타나토스를 붙잡는다고?
“악당이나 할 법한 발상이야.”
“세상에 악당은 없지, ‘정당’이 있을 뿐.”
“….”
“정당하냐 아니냐. 그리고 그것이 많은 사람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느냐. 강자를 대변하는가.”
“그렇군.”
“만약 정당성을 찾고 있다면 말이지, 아들아.”
가까이 다가온 백 대령은 아들의 코트 사이에 있는 넥타이를 잡았다. 그리고 으레 ‘사이가 좋은’ 아버지와 아들이 그러하듯 제대로 형태를 다듬어주었다.
“만들어내면 되는 거야. 그런 건.”
“….”
“뭔가 알고 있지 않나? 아들.”
눈치를 채고 있었던 건가.
“아무것도 몰라.”
“정말로? 그런 것치고는 이것저것 들쑤시고 다니는 곳이 많던데. 붙여둔 감시도 뿌리쳐가면서.”
교활한 눈동자를 하고 있다.
일부러 유도 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가웨인은 이쪽의 목을 툭툭 두드리는 백 대령의 행동에서 분노보다는 유혹을 느꼈다.
“악당으로 남고 싶지 않다면 정당해지면 돼.”
“…. 당신이 한 짓이지?”
가웨인은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자신이 타나토스를 붙잡도록 만들기 위해, 이 교활한 악당은 또 다시 협박의 소재로서 그녀를 이용한 것이다.
하지만 모르겠다.
머리가 새하얗게 물드는 듯했다.
그것도 눈앞의 남자가 의도하는 바겠지만,
“만약…. 비비안이 정말 녀석들과 함께 있다면.”
가웨인은 이겨낼 수가 없었다.
카페에서 보았던 갈색 머리의 여성.
그 친절했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린 그는, 백 대령의 참혹한 시선을 피했다.
거기에 자신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집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진 뒤였다.
“후후, 많이 피곤해 보이네요.”
평소와 다름없이 유하는 웃으며 우리를 반겨주었다. 그 말대로 완전히 지쳐 있던 나를 필두로 일행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안으로 들어섰다.
“유하니이이임~.”
넬이 달려들어, 유하의 얼굴에 볼을 비비기 시작했다. 어리광을 부리는 모습은 무척이나 귀엽다는 느낌이었지만 우리는 모두 거기에 반응할 기력이 없었다.
“후후, 재미있었어요?”
“우으 솔직하게 말씀드릴 수 없는 게 아쉽네요.”
“…?”
유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하, 연락도 없이 미안해.”
나는 당황해 앞으로 나서며 말을 걸었다. 그러자 내 쪽을 돌아본 유하가 볼을 약간 붉히며 활짝 웃었다.
“준.”
“저녁은 먹었어?”
“후후, 사실 아직이에요.”
“어째서…?”
“준이 왠지 올 것 같았거든요.”
‘사실 모디모디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런 말을 바로 뒤에 조그맣게 덧붙인 유하가 미소를 지으며 모드레드를 돌아보았다. 모드레드는 조금 부끄러움을 느끼는지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앞으로 나섰다.
“다, 다녀왔습니다.”
“후후, 모디모디가 먹고 싶다던 떡갈비 해놨어요.”
“유, 유하 언니…!”
조그마한 녀석이 당황해 소리쳤다. 하지만 유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고 다른 일행도 그 모습을 훈훈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다른 분들도 어때요? 식사 안 하셨으면….”
“아뇨, 각자 일이 있어서….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거기에 제일 뒤쪽에 서있던 베디비어가 대답했다. 고개를 꾸벅 숙인 그는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중에 봐요, 타나.”
“아, 응. 오늘 고마워.”
“몸 조리 잘하세요.”
발렌타인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베디비어와 함께 가게를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이내 누군가 다가와 얼굴을 감싸는 걸 느꼈다.
“그럼 오빠…. 몸 조리 잘해♡”
쪽, 하고 볼에 입술이 닿았다.
“고, 고맙다.”
“티티.”
마지막으로 린슬렛이 다가와,
“나중에 잠깐 이야기 좀 해.”
“…? 아, 알았어.”
조금 진지한 얼굴에 나는 당황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눈인사를 하고도 돌아서지 않고 머뭇거리던 그녀는 이내 유하를 힐끔 돌아보았다.
“걱정이나 시키고 말이야.”
그리고는 내 손을 슬쩍 쥐었다.
조금 미묘한 기류가 흐르지 않을까 싶었지만,
“다연 양.”
뜻밖에도 유하의 목소리는 꽤나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린슬렛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유하를 돌아보았다.
“네?”
“역시, 하루 정도는 주무시고 가지 않으실래요?”
그리고 유하의 입에서는 더욱이 예상을 하지 못했던 말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