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편
<-- Chapter 5 : 이상의 기사 -->
“꺅?!”
깜짝 놀란 넬이 비명을 지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마찬가지로 깜짝 놀랐던 나는 그 뒤에서 눈을 비비며 모습을 드러내는 인영을 발견했다.
“유, 유하…?”
“아, 넬도…. 어서와요, 어서와…. 음냔….”
잠이 덜 깬 듯, 몽롱한 얼굴로 중얼거린 유하는 옆의 넬을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계단 앞에 놀란 얼굴로 서있던 녀석을 안으려고 들었다.
“유, 유하님!”
물론 넬은 실재하지 않기에,
“움냐안….”
유하는 비틀거리다 계단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큭?!”
나는 순간적으로 몸을 날려 그것을 받아냈다. 안전하게 내 품에 안긴 유하는 졸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 이내 볼에 입술을 맞췄다.
“유, 유하….”
“후후, 수염이 까끌까끌하네요.”
멍한 채 있던 그녀는, 내 볼을 매만지며 부드럽게 웃었다. 하나로 묶은 머리, 가벼운 네글리제 차림인 채 유하는 도무지 내려올 생각을 하질 않았다.
무겁다거나 그렇진 않았지만.
“….”
문제는 유하가 잠이 조금 깼을 때 발생했다.
“아, 미, 미안해요, 준.”
얼굴이 목으로부터 새빨갛게 물들어, 가볍게 헛기침을 한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중심을 잡고 계단에 선 유하는, 반쯤 벗은 채였던 카디건을 다시 두르고는 말을 이었다.
“어, 언제 왔어요?”
“아까 전에.”
일부러 조금 거짓말을 했다.
“…. 커피라도?”
“조금 더 자두는 편이 낫지 않겠어?”
“후후, 준은 아침이 되면 또 나갈 테니까요.”
“미, 미안.”
“사과를 해도 바뀌지 않으면 사과를 하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오.”
유하는 조금 장난스럽게 이야기했다.
“어쨌든, 바람이라도 좀 쐬면서 이야기할까요?”
“아, 그럴까.”
“커피는 오랜만에 믹스로 하죠.”
“…. 그렇다면 제가 타는 것으로.”
“후후, 부탁할게요.”
노린 거였을까.
미소를 지으며 윙크를 한 유하는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그 모습을 조금 멍해져 지켜보던 나는 1층으로 내려가 주방으로 들어섰다.
커피 포트 정도라면 당연히 있다.
티아모는 기본적으로는 카페였지만 어쨌든 가정집을 겸하기 때문이었다. 적당히 물을 받고 스위치를 올린 나는 길게 하품을 하고 뻐근한 기색을 느꼈다.
확실히 피곤하긴 한 모양이다.
“네크로맨서 재킷, 기동.”
재킷을 입자 금세 괜찮아졌지만.
“….”
뒤를 이어, 나는 함께 있던 넬이 어쩐지 당황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느꼈다.
“재킷을 그렇게 활용하시는 건 주인님이 처음이세요.”
“별 수 없잖아? 일이 있으니.”
그렇게 되받아친 나는 두 잔의 믹스커피를 타서 들고 주방을 빠져나왔다. 한결 몸이 가벼워져 피로감이 날아갔다. 사실 하고자만 한다면 단숨에 천장을 뚫고 날아오르는 것도 가능할 정도의 몸 상태였다.
계단을 올라 옥상에 도착했다.
“아, 고마워요.”
커피를 건네자 넓은 평상에 앉아 있던 유하가 미소를 지었다. 카디건 위에 숄까지 걸친 채, 새하얀 손가락이 긴 소매 너머로 뻗어져 나와 잔을 붙잡았다.
“날씨 좋네.”
아직 아침 해조차 뜨지 않았다. 옥상 문 위로 켜든 미등이 그림자를 지게 만들어 나는 조용한 세계를 느끼며 일부러 너스레를 떨었다.
“분위기 있네요.”
조금 잠이 덜 깬 듯한 목소리.
뒤를 이어 나는 어깨에 유하가 머리를 기대는 듯한 감촉을 느꼈다. 믹스커피처럼 달콤한 연갈색의 머리가 흘러내려, 나는 저도 모르게 그것을 손에 쥐었다.
“왜요?”
유하는 그게 조금 부끄러운 눈치였다.
“아니, 머리카락이라는 게 원래 이렇게 부드러운 건가 싶어서.”
“…. 으음.”
나는 애써 솔직한 감정을 이야기했지만 유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떨어졌다. 나는 당황해 그녀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술 마셨어요?”
“아, 아니?”
“으음, 그럼 왜….”
“?”
“왜 여행 때처럼 말하는 거죠.”
“뭣…?!”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나는 당황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각 외의 반응이었는지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유하는 이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컵을 내려놓았다.
“저는 남자다운 준도 좋은데.”
“유, 유하….”
조금 더, 향기가 진해졌다.
무릎을 꿇은 채 유하는 허리를 내밀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새하얀 얼굴이 붉게 물든 채, 그녀는 그런 부끄러움을 장난기로 감추고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준은 어때요?”
“으, 음….”
“어떤 누나가 좋은가요.”
“구, 굳이 누나라고 하는 이유는…?”
“어머, 당연히 연하보다 연상 아닌가요?”
“네?”
“아닌가요?”
“…. 네.”
나는 조금 압도되어 대답했다.
“좋아요. 후후.”
만족을 하신 건지, 유하는 가볍게 웃으며 물러났다. 다시금 머그잔을 들어 그 안의 믹스커피를 조금 마신 그녀는 조금 멍해져 있는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친구랑은, 잘 해결됐나요?”
“아, 그 자식….”
뭐라고 설명을 하면 좋지.
머릿속이 복잡해져 나는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유하는 물론, 그 부드러운 통찰력으로 대강의 관계정도는 꿰뚫어보고 있을 터였다. 결국 해답은 다시금 나의 어설픈 거짓말로 대화를 회피하는 것이겠지만.
“딱히, 친구는 아니야.”
왠지 지금은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냥 털어놓고 싶었다.
유하에게,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보면 적이지.”
나는 조금 어려운 이야기라는 생각을 했다.
확실히 이 악연의 시작은 내가 라쿠스 기사단에 들어가면서였다. 그 당시의 나는 이 게임에 막 적응을 하기 시작한 초보로서 하나의 가이드라인이 필요했다.
린슬렛과의 첫 만남은 최악이었다.
하지만 하나로 엮이게 되었지.
우정현 회장, 모드레드.
라쿠스 기사단과 그 뒤에 숨겨져 있는 거대한 음모의 실체를 알게 되고, 나는 녀석을 혐오하게 되었다.
“해서 조금 음…. 좀 심하게 말을 했는데.”
“아,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아요.”
중요한 부분을 어설프게 넘어간 설명에도 유하는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가만히 미소를 짓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준은 한 번 화나면 물불을 안 가리는 성격이니까요.”
“뭐, 뭐?”
“트라우마가 될 정도로 몰아붙인 거죠?”
“아니, 아무리 그래도….”
아니 그 정도쯤 되나.
“….”
“후후, 너무 착한 성격이어서 그래요.”
“그럴 리가 있나.”
나는 뻗어져 오는 유하의 손을 슬쩍 피하며 피식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콩깍지가 씌었다.
“어머, 제 말이 언제 틀린 적이 있었나요?”
“연상이 최고인 부분….”
“…. 준?”
“은 물론 진리이지요.”
“아♡ 역시 그렇죠?”
심장을 파고드는 저릿한 살기(?)를 느낀 내가 서둘러 말을 정정하자, 유하는 또 금세 웃었다.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었는데.”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걸…. 방해를 하려는 건지 뭔지 애매해서 말이야. 최근 들어 자꾸 앞에 나타나서 고민이 되네.”
“무시하면 되지 않나요?”
“그럴 수도 없어서.”
녀석은 유일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다.
내 가장 소중한 가족에 대해.
“….”
“준?”
“아, 아무것도 아니야.”
빤히 바라보자 유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순수함과 통찰력을 그대로 간직한 듯한 그 두 눈동자에 나는 이내 피식 웃으며 손을 뻗었다.
“유하한테 말하기를 잘했어.”
“후후, 마음이 좀 풀렸나요?”
“아, 후련해졌어.”
어쩐지 상황을 정리하듯 되어버린 꼴이었다. 일부러 이런 걸까 싶어 나는 유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 아까부터 제 얼굴을 왜 계속….”
그 두 뺨이 붉게 물들었다.
“예뻐서, 라고 이야기하면 이상해?”
“….”
“그런 내가 멋있다고 했잖아?”
“주, 준….”
나는 조금 멀찍이 떨어지려는 유하의 어깨를 잡고 당겼다. 못 이기는 척 내 옆으로 다가온 유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좀처럼 말을 잇질 못했다.
“이런 건, 이상해요….”
“왜?”
되묻자 그녀는 부끄러운 듯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이런 준이 이상하다는 거죠.”
“그, 그 말은….”
“이 누나를 놀리려 들다니.”
역시 알고 있다.
유하는 내 저급한 의도를 금세 알아채고 이마를 슬쩍 튕겼다. 하지만 나는 그러며 빠져나가려는 유하의 허리를 붙잡고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주, 준?!”
이건 예상치 못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유하.”
나는 입술을 맞췄다.
“…?!”
순간 당황해 눈을 동그랗게 뜬 유하는, 이내 나를 받아들였다. 가볍게 숨을 삼키며 나는 유하의 입술을 느꼈다. 조금 긴장을 한 그녀가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하읏…. 웁?!”
떨리던 턱이, 참지 못하고 신음을 뱉었다. 틈을 노려 나는 혀를 밀어 넣었다.
“아…. 준….”
그녀는 조금 젖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혀가 뒤섞이며, 우리는 하늘이 푸른빛으로 물들 때까지 오래도록 키스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