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편
<-- Chapter 5 : 이상의 기사 -->
날카롭게 연마된 듯한 여성의 목소리에 나는 자리에 멈춰 서서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검푸른 머리를 하나로 묶은 여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나보다 늦을 줄은 몰랐는데.”
“….”
그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우아랑은 자신의 옆에 있던 붉은 머리의 사내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나는 상쾌하게 웃고 있는 가웨인을 돌아보았다.
“미안, 미안. ‘허위 신고’가 하나 들어와서 말이지. 그걸 처리하고 오느라….”
“적에게 이쪽의 사정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는 바보가 대체 어디 있습니까!”
“여기 있네요.”
“대위님!”
너스레를 떠는 가웨인의 모습에 우아랑은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가웨인은 그 더러운 성향을 드러내듯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저 녀석이 시간을 끌어준 걸까.
나는 여유로운 가웨인의 표정에서 어렵지 않게 그런 그림을 떠올렸다. 하지만 딱히 고마운 기분은 들지 않았고 도리어 불쾌한 기분이 몸을 휘감았다.
갤러해드가 되길 기다리겠다니.
변한 건 없고, 오히려 더 심해졌다.
저 자식은 결국, 이 가상의 세계를 이용해 자신의 비틀려진 자아를 채우려 하고 있을 뿐이었다.
“…. 하아.”
뒤를 이어, 한동안 가웨인을 노려보던 우아랑이 포기한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품안에서 검을 뽑아 나를 향해 겨누었다.
“말이 너무 많았군.”
그 눈빛에서 단호한 기색이 느껴졌다.
스스로의 연약한 부분을 쳐내듯 서있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마찬가지로 스파다를 뽑아들었다. 일단 퀘스트를 진행하기에 앞서 성가신 적을 제거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가웨인은 입술을 슬쩍 핥으면서도 딱히 거부하지는 않고 뒤로 천천히 물러섰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 상태 이상 : 봉인
“…?!”
그런 메시지와 함께, 나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작스레 손에 쥐고 있던 스파다가 불어온 검은 바람에 뒤섞여 사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뭐, 뭐야…?!”
놀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고개를 들어 반대편을 보자 우아랑의 검 역시 마찬가지로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그것과 더불어 ‘봉인’이라는 단어에 나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넬!”
“주, 주인님! 이건 대체?!”
넬의 모습이 희미해져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입술을 깨물며 손을 뻗으려던 나는, 갑작스레 현기증이 일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큭?!”
다리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다.
“주, 주인님! 아무래도 재킷의 능력이…!”
넬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시야 한 구석에 떠오른 아이콘을 보고 나는 숨을 삼켰다.
재킷의 기능이 마비된 것이다.
“젠장!”
아래를 내려다보자, 한순간 시야가 아찔해졌다. 볼썽사납게 철골에 매달린 꼴이 되어 나는 상황을 파악하고 칼날처럼 몸을 에는 바람을 느꼈다.
나는 평범한 인간으로 되돌아왔다.
“이건…!”
하지만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다.
철골 구조물 위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매달린 우아랑의 모습이 보였다. 그 옆의 가웨인 역시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불어오는 바람을 견뎌내고 있었다.
“역시, 마지막 기사라 그런지…. 스펙터클한데?”
“이런 상황에 대체 무슨 소립니까!”
녀석들 역시 처음 겪는 상황인 걸까.
나는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생각을 거듭했다. 대체 이런 상태 이상이 걸린 이유는 무엇이며, 해제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에 대해서. 하지만 중심을 잡기에도 벅차서 도저히 생각을 할 만한 여유가!
“뭐…?”
하지만 다음 순간, 강한 빛이 찾아들었다.
나는 놀라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송전탑의 강한 빛을 쳐내듯 새하얀 빛에 휘감긴 무언가가 우아랑과 내 사이에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그것은 기사다.
가장 완벽하고, 가장 고결한.
그리고 나를 이곳까지 도달하게 만들었던 기사.
새하얀 갑주로 온몸을 감싸고, 십자가가 새겨진 방패. 붉은 망토를 두른 기사였다. 날카롭게 연마된 검을 들고 투구를 쓴 그가 철골 위에서 5cm 정도 떠오른 상태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망토를 휘날리며 그는 철골 위에서 뛰어내렸다.
“저건…?”
“갤러해드….”
의아해하는 우아랑과는 달리 나는 상황을 파악하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며 나는 따라가야겠다는 생각만이 몸을 지배하는 걸 느꼈다.
인간의 몸인 채.
“윽…!”
나는 팔을 뻗어 반대편의 철골 끝을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망설이지 않고 뛰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중심을 잃을 뻔했지만 버텨내고 고개를 들었다.
지상으로부터 수십 미터의 상공.
촘촘하게 철골이 이어진 송전탑. 평범한 인간의 몸으로 내려갈 수 없는 구조는 절대 아니었다. 단순히 엄청나게 거대한 정글짐에 가깝다고 생각하면 될 터였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내 철골 구조물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폭이 넓은 계단을 타는 요령으로, 팔로 확실히 철골을 잡고 몸을 뻗어 내려갔다.
망설임은 없었다.
갤러해드를….
그 흔적을 쫓아가야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붉은 망토를 두른 기사가 눈앞에 나타나자 나는 인간으로서의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목적을 위해서 몸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큭…! 스컬!!”
뒤를 이어 우아랑이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질렀다. 철골 위에 내려앉아 고개를 든 나는, 입술을 비틀며 이쪽을 노려보고 있던 녀석과 눈을 마주쳤다.
“테러리스트 주제에…!! 앞서가지 말란 말이다!”
분노해 이를 빠득 깨문 녀석이 나와 마찬가지로 철골을 타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무시하려던 나는, 이어서 철골 위에 앉은 가웨인이 웃는 걸 발견했다.
“재미있는 게임이란 말이지.”
비릿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녀석은 바로 앞의 철골을 걷어찼다. 그것이 미세한 진동을 일으켜,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우아랑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추락했다.
“꺅?!”
“우아랑!”
나는 놀라 손을 뻗었다.
밑으로 떨어지던 녀석의 팔을 붙잡은 나는 강한 충격을 느꼈다. 잡은 팔의 무언가가 잘못된 감각을 확연하게 느끼며, 나는 이를 악 문 채 우아랑을 끌어올렸다.
“이 바보 자식!”
“윽….”
버럭 소리치자,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녀석이 내 쪽으로 쓰러졌다.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우아랑을 지탱한 채, 나는 기둥에 기대어 숨을 크게 물아 쉬었다.
“뭘 그렇게 겁먹고 있는 거야?”
바로 그때, 비웃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든 나는, 붉은 빛을 등진 채 앉아있는 가웨인을 올려다보았다. 바람에 머리가 흩날려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펼쳐보았다.
“잊었어? 이 게임에서 사람은 죽지 않는다고.”
“뭐…?”
“배짱을 시험하는 거야. 이 게임에서 사람은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라고. 여기에서 떨어져 지상에 도달할 쯤 해서 재킷의 힘이 돌아오는 거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아무런 안전 장비도 기술도 없이 이 송전탑을 내려가는 게 더 말도 안 되는 짓인 것 같은데.”
이어진 가웨인의 반박에 나는 입술을 빠득 깨물었다. 하지만 뒤를 이어, 내 가슴에 기대어 있던 우아랑의 몸에서 떨림이 멎었다.
“근거가, 없지는 않군.”
“우아랑…!”
“네놈은 여기에 있어라, 스컬.”
우아랑은 길게 숨을 내뱉으며 나를 노려보았다. 잠깐이었지만 적인 나에게 기대었다는 수치스러운 감정을 감추듯 입술을 빠득 깨문 녀석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테러리스트라고는 해도, 민간인인 네놈을 위험한 상황에 내몰 수는 없다.”
“아니, 그게 무슨…!”
“군인인 내가 하겠다는 말이다.”
“멋진 군인 정신이야.”
“가웨인!”
별 것 아니라는 듯 이야기하는 가웨인의 모습에 나는 분노를 담아 소리쳤다. 하지만 우아랑의 표정은 단호했다. 검푸른 머리가 제멋대로 흩날리는 가운데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걸음을 옮겼다.
아니, 자세히 보니 다리가 떨리고 있다.
“….”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이내 팔을 잡았다.
“그만해.”
침착하게 타일렀다. 다시금 순간적으로 내게 안긴 우아랑은 당황해 떨어졌다.
“네놈이야말로 아무런 이유도 없으면서…!”
“아까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나.”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우아랑을 위험한 상황에 내몰기는 어쩐지 꺼림칙한 기분을 느꼈던 것이다.
“하려면 확률이 좀 있는 쪽을 골라야겠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내 말에 우아랑은 차갑게 반응하며 떨어지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단련된 녀석의 팔을 놓아주지 않고 꺾어서 다시 안기도록 했다. 어쨌든 나 역시 우아랑에 못지않게 신체를 단련해왔기 때문이었다.
“큭…! 날 모욕할 셈이냐!”
“아니, 일단 여기 28미터쯤 위니까 좀 진정하라고.”
“윽?!”
내 말에 무의식중에 밑을 내려다본 녀석이 몸을 떨었다. 하지만 이내 그런 자신을 혐오한다는 듯 입술을 질끈 깨물며 나를 노려보았다.
“좋은 생각이라도 있는 거냐?”
“글쎄.”
그보다는 사실, 이 녀석과 이렇게 대화다운 대화를 한 게 거의 처음이지 싶어 조금 이상한 기분이었다.
아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만.
“후우.”
가볍게 숨을 내뱉은 나는 섣불리 우아랑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몸을 틀어쥔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 있다.
멀지 않은 곳에, 이쪽으로 날아드는 궤적이.
이쪽을 알아보지 못할 리는 없을 터다. 재킷을 통해 확실하게 시야가 늘어난 만큼, 더욱이 주변의 파악에 능숙한 트리슈가 있다면 나를 놓칠 리는 없겠지.
“믿는다, 트리슈.”
“무슨…? 윽?!”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우아랑은, 내가 손을 놓고 몸을 뒤로 눕히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놀란 상황에서도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간 이준을 생각했는지 손을 뻗어왔지만, 나는 그것을 쳐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스컬!!”
안색이 창백해져 철골 위로 털썩 주저앉는 우아랑.
그것이 점점 멀어져가는 것을 느꼈다.
차갑게 얼어붙은 바람을 느끼며, 나는 지상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낙하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