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편
<-- Chapter 5 : 이상의 기사 -->
“난 지지 않았어. 그 개자식이 비겁한 수단으로 밀어붙이지만 않았어도 말이지.”
“어쨌든 진 건 진 것이다.”
“…. 내 앞에서 한 번만 더 그딴 소리 지껄였다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죽일 거야. 알겠어?”
가당찮은 협박이다.
하지만 라이오넬은 굳이 싫다는 이에게 나쁜 말을 할 정도로 성격이 나쁘진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알겠다, 하지 않도록 하지.”
할 말은 많았지만…. 뭐, 애초에 정보를 간단히 빼낼 수 있도록 둔 게 실수였다던가. 아니면 상대의 의중을 꿰뚫지 못한 통찰력이 부족했다던가.
아니면 그저 그 남자를 너무 얕봤다던가.
“내가 죽일 거야. 그 개자식은.”
“듣자하니, 마지막에 패….”
다시금 살기가 등등해졌다.
“…. 비겁한 수단을 쓴 건, 모드레드였다고 하던데.”
“저기, 그거 알아?”
핫, 하고 헥터가 차갑게 웃었다.
“데코레이션 케이크를 짓밟는 놈보다, 가장 중요한 장식을 빼앗아 먹는 놈이 더 기분 나쁜 법이야.”
이해가 가지 않는 비유다.
“그런 마약중독자년은 언제든 낚아챌 수 있어. 간단하지. 뇌에 마약 한 대 놔주고 남자들 사이에 돌림빵 넣고 세 시간 뒤면 뭐든지 불 년인데.”
“…. 헥터.”
“뭐? 거 참 명예를 중시하는 기사님 납셨네. 저기 있잖아. 흑인 아저씨. 인생이라는 건 승리하는 거야. 남을 짓밟고 조지기 위해 존재하고 있는 거라고.”
조금 나무라는 듯한 라이오넬의 목소리에 헥터는 분노해 제멋대로 말을 지껄이기 시작했다. 인종 차별이 아무렇지도 않게 섞여 라이오넬은 어깨를 떨었지만 침착하게 벽에 기대어 섰다.
“그거 알아? 네가 그토록 숭상해 빠진 그 기사도도 사실은 갑옷 매고 다니는 씹새들 잡아
놓기 위해서 만들어진 거였다는 걸…. 너희들은 모두 야만인이야. 스스로 깨끗한 척 하고 있을 뿐인 개새끼들이라고!”
그렇게 소리치고 다음 순간,
“케, 엑…!”
라이오넬은 단호한 행동으로 분노를 대처했다. 제멋대로 말을 지껄인 헥터의 목을 잡고 들어올린 그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 피부색으로 날 평가하는 말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들을 가치조차 없는 말이니까.”
“라이, 오, 넬…!”
“하지만 한 가지 정정하고 싶군. 기사가 아니라 전사, 그렇기에 사자. 그 의미가 나의 의지이자 강철.”
헥터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며 그녀는 검은 팔을 제멋대로 쥐어뜯으며 저항하기 시작했다. 붉은 피가 흘렀지만 라이오넬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전사는 말을 하지 않는다. 사자는 변명하지 않는다. 싸움에 법도는 없다. 각자의 정의가 있을 뿐이다.”
검은 눈동자는 단단한 바위처럼 헥터를 노려보았다.
“내 이유는 내 조국과 사랑하는 국민을 위하여.”
“씨, 팔…. 그래서 너 여기 노예 새끼들한테 까까 주는 거구만…? 병신 휴머니즘 좆만이가….”
눈에 핏발이 서 푸른 눈동자의 주변을 수놓았다. 그런 와중에도 지지 않겠다는 듯 사악하게 웃은 헥터는 이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근, 데 그거 알아…?”
즐겁다는 얼굴이 돌아왔다.
라이오넬은 조금 불안한 기분에 휩싸였다.
“저 방안에서, 계속 머리 박고 있는 게…. 누굴까?”
“…!!”
그리고 그게 한 가지 예감을 하게 만들었다.
목을 놓고, 라이오넬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돌아섰다. 당황한 그는 입술을 꽉 다문 채 잠가진 문을 비틀고 당겼다. 단단한 잠금장치가 단숨에 부서지며 그는 안에서 드러난 광경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피 칠갑인 방이다.
“우읍…. 웁!”
그 안에 군복을 입은 병사가 있다.
입술에 재갈이 물린 채, 이마가 피투성이가 된 채 병사는 괴로워 날뛰고 있었다. 손톱이 부러져 피가 맺힌 손가락을 보며 라이오넬은 가까이 다가갔다.
“어쨌든, 사람이 있는 시늉은 해둬야 하니까요.”
뒤에서 헥터가 피식 웃었다.
“이 광경이, ‘일반인’에게 어떻게 보이는 건지 알고 하는 소리인가!”
발광하는 병사의 뒷목을 쳐 기절시킨 라이오넬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쓰러지는 병사를 받아냈다.
“그러게요. 미치지 않았을까 걱정이네.”
하지만 그런 그의 말과는 달리 벽은 평범한 감방의 분위기를 갖추고 있다. 두꺼운 벽과 쇠창, 바깥의 풍경까지 보여 다들 머릿속으로 떠올릴 만한 감방이었다.
하지만 아니다.
실제 이 방은, 구멍이라고는 없다. 정보량 송신 합금이 검은 벽으로 변해 꿈틀거리며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플레이어의 뇌와 감각기관을 속이는 곳이었다.
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그곳에 하루.
병사는 헥터를 대신해 있었던 것이다.
“…. 기억해둬. 그 새끼는 내가 죽일 거야.”
그조차 자신을 돋보이게 쓰는 헥터의 모습에, 라이오넬은 이를 빠득 갈며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큭…!!”
라이오넬은 분한 기분을 느끼며 병사를 안아들었다.
◇
달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 늦은 밤,
“지쳤어어….”
트리슈는 앓는 소리를 내며 테이블 위로 추욱 늘어졌다. 그 모습을 반대편에서 바라보던 린슬렛은 편의점에서 산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갈증을 풀었다.
확실히 조금 오래 다니기는 했다.
아침에 만나자마자 곧장 정보가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지역을 계속 돌았던 것이다. 서울 시내를 빠져나가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강남부터 시작해 노원구 근처까지를 빙글 도는 것은 상당한 체력을 필요로 했다.
“린 언니이…. 나 맥주우우….”
반대편에 앉은 트리슈가 눈치를 살피며 계속해서 애교를 부렸다. 잠시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린슬렛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트리슈.”
“으응?”
“정신 차려.”
“…. 히잉.”
린슬렛의 강한 목소리에 트리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빨대를 꽂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아저씨처럼 소리를 냈다.
“크으, 역시 이거지이!”
빨대에 립스틱 자국이 살짝 배었다.
“요새 관리 안하니?”
“아니, 그래서 집 가면 운동해야지.”
“…. 그럴 바에야 안 마시는 게.”
“린 언니, 인생이란 쾌락이라는 이름의 단 이슬을 마시기 위해 살아가는 게 아닐까?”
갑자기 철학적인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그 이슬은 칼로리가 3,000인 거야.”
“…?”
“책임을 지지 않으면 뚱보가 되어버리고 말아.”
트리슈의 표정은 진지했다.
지금 자신만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싶어, 린슬렛은 당황해 옆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미네랄워터를 입에 댄 채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모드레드를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모드레드.”
“아,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갑자기 제 이야기를 하시는 건가 싶어서….”
당황한 모드레드가 별안간 큰 소리를 냈다. 대학가 근처의 편의점 앞이라 소리는 금방 묻혔지만, 린슬렛과 트리슈는 조금 어안이 벙벙해지는 걸 느꼈다.
“어떤 부분이…?”
라고 물었지만 대답은 없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 모드레드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을 잇질 못했다. 잠깐 그 모습을 바라보던 린슬렛은, 신경 쓰지 말자고 생각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쨌든 오늘 성과는 없는 거지?”
“뭐, 그렇지. 오빠랑 발렌타인도 서울 시내 돌면서 찾아봤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거의 남아있는 게 없었던 모양이야.”
“으음….”
골치가 아프다는 생각에 린슬렛은 가볍게 신음을 흘렸다. 다른 두 사람도 조금 지친 눈치였다.
“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그 갤러해드란 사람.”
끄응, 하고 숨을 삼킨 트리슈가 다시금 맥주를 마셨다. 그 말을 따라 린슬렛 역시 조금 생각에 잠겼다.
적어도 3년 전인가.
린슬렛은 먼 과거에 서있는 그 기사를 상상해보았다. 완벽하고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말에 따라 머릿속에 모습을 그리니 어쩐지 한 사람밖에 떠오르지 않았지만.
“확실히…. 걔가 어울리긴 하네.”
외모적으로는.
“응? 뭐가.”
“아, 아무것도 아니야.”
트리슈의 물음에 린슬렛은 당황해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잠시 그런 모습을 보며 의아해하던 트리슈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좀만 놔두면 금세 야한 생각하고 말이야~.”
“아니거든!”
“그럼 무슨 생각했는데?”
“음….”
“봐봐, 트리슈 말이 맞지? 남들이 기껏 열심히 생각하고 있는데 자기 혼자서만! 얼른 잘못했다고 하시지!”
“자, 잘못했습니다.”
거기에 대답한 것은 모드레드였다.
“?”
“…?”
서로 대립해있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의아한 기색이 깃들어 모드레드를 돌아보았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못난 자신을 용서해달라는 듯 면목 없어 하는 모드레드의 모습에 두 사람은 멍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그, 그으…. 모디모디야?”
그리고 먼저 입을 연 것은 트리슈였다.
아니 모디모디라는 별명은 대체 뭘까.
그것이 무척이나 신경이 쓰이는 걸 느끼면서도, 린슬렛은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녀가 무엇을 물어보려 하고 싶은 건지 대충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우, 우리 어린이 몇 살?”
“…. 뭡니까? 그 말투는.”
모드레드는 불만스럽다는 듯 반문했다.
“아, 아니 일단 우리가 언니는 맞는 거지?”
“그러는 두 분은 연세가…?”
“빼앵! 연세라고 하지 마! 연세라고!”
트리슈가 흥분해 소리를 질렀다.
“아, 아니 그걸 물어보고 싶었던 게 아니잖아?”
생각과는 달랐던 트리슈의 질문에, 린슬렛은 어깨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두 사람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
아니, 이러면 또 곤란한데.
“누구일 거라고 생각해? 갤러해드.”
결국 린슬렛은 질문을 하고 싶었던 부분을 교묘하게 넘겼다. 그것을 알아챈 트리슈는 요염하게 웃었지만 모드레드는 알아차리지 못한 듯 대답했다.
“너무 예전의 사람이었기에….”
곤란하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녀다운 현실적인 대답이었고, 린슬렛은 그래서 더욱이 한숨이 쉬어지는 것을 느꼈다.
실제 전설상의 갤러해드가 가장 나중에 나타난 기사인 것과는 달리…. 그는 다음 기사가 나오기도 전에 사라진 최초의 기사였다. 이 아서리안이라는 게임의 태동기를 함께 했던 존재였던 것이다.
때문에 커뮤니티에서도 그 정보를 찾아보기가 극히 까다로웠고, 거의 신이나 다름없게 부풀려진 면이 있었다. 혼자서 할 킬러즈의 본부를 초토화 시켰다던가. 아니면 레이드 몬스터를 주먹 한 방에 때려 눕혔다던가.
말도 안 되는 일화들뿐이었다.
하지만 세 사람은, 오늘 그 말도 안 되는 일화가 일어났던 장소들을 탐색하느라 하루를 꼬박 소비했다. 그리고 모두 비슷한 마음을 품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퀘스트를 얻어낼 순 없겠다고.
========== 작품 후기 ==========
병신 휴머니즘 좆만이...
대체 누구 머리에서 나온 욕인 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