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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크로맨서 재킷-187화 (187/321)

187편

<-- Chapter 4 : 파륜의 기사 -->

눈앞에 있던 영국의 가정집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네모난 픽셀 조각으로 변해 점차 모든 것이 사라졌다. 가족사진과 안락의자, 계단과 복도, 벽난로와 양탄자. 마지막으로 벽에 이르기까지. 마치 연극 무대가 끝나고 다음 무대를 위해 배경이 변하는 듯했다.

나는 그것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조금, 쉴까요?”

넬이 조금 착잡해진 얼굴로 물어왔다. 하지만 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괜찮으시겠어요?”

그런 건 아니다.

솔직히 말해, 조금 충격적이었다.

모드레드의 아버지, 칼 후퍼가 엘레노어를 개발한 장본인이었다니. 조금 현기증이 몰려들었다.

거기다 그 남자는 대체 누구지?

한성진.

검푸른 양복을 빼입은 근사한 미소를 지닌 30대의 남자. 얼핏 보기에는 평범한 사람처럼 보였으나, 나는 어쩐지 그에게서 불쾌한 기분을 느꼈다.

뭔가 전지전능해 보인다는 느낌이었다.

단지 그런 시늉을 하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그런 존재인 걸까.

“…. 젠장.”

앞머리를 매만지며, 나는 다시금 새하얀 공간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길게 심호흡을 한 뒤 고개를 들어 바로 옆에서 눈썹을 찡그리고 있는 넬을 바라보았다.

“미안.”

“네넬?”

사과를 하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애써 침착하게 생각하고 있는 바를 내뱉었다.

“너도 그렇게 좋은 기분은 아닐 텐데 말이야.”

“….”

“안 그래?”

“새, 생각해본 적이 없네요오….”

넬은 얼굴을 붉힌 채 중얼거렸다.

“왜?”

“아뇨, 하지만 주인님이 말씀하시는 걸 들으니…. 어쩐지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을 알 것 같아요.”

“어떤 기분인데.”

“제가 조금, 쉬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이야기한 넬이 쓴웃음을 지었다.

“저로서는, 어머니이자 저인 존재의 탄생을 지켜보게 된 것이니까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군.”

“헤헤, 사실 넬도 잘 모르겠어요.”

그런 대답에 내가 조금 짓궂은 얼굴로 바라보자,

“하지만, 주인님은 정말 대단해요.”

그녀는 다시금 얼굴을 붉혔다.

“아부 떨어도 아무것도 없어.”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저 같은 존재에게도 신경을 써주시는 부분이….”

“너 같은 존재가 뭔데.”

나는 약간 기분이 상하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그러자니 그 상태로 굳어진 넬이 고개를 푹 숙였다.

“…. 어려운 말씀을 하시네요.”

“별 거 아니잖아. 난 너를 동등한 존재로 보고 대하고 있는 건데. ‘저 같은 존재’는 입맛이 안 좋아.”

“너, 너무 쉽게 생각하시네요.”

“어려운 문제일수록 쉽게 생각하는 게 좋으니까.”

짧게 이야기한 뒤, 나는 그대로 넬의 반응을 살폈다. 잠시 멍한 채로 있던 그녀가 이내 부드럽게 웃었다.

“너 역시 변한 것 같아.”

“넬이요?”

“응, 네가 나보고 그랬잖아. 변했다고.”

“…. 그랬었죠.”

“너 역시 변한 것 같다고.”

“그건 분명, 주인님 때문일 거예요.”

주인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변할 수 있었을까요?

그런 뒷말을 짧게 읊조린 넬이 이내 다시금 인터페이스와 팝업창을 띄웠다. 그리고는 한껏 진지해진 얼굴로 그것들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일단, 칼 후퍼 씨가 기록한 데이터는 여기까지예요.”

중얼거린 그녀가 몇 개의 영상 기록을 저장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디님의 디멘션 커넥터에 남아있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준비되었으면, 바로 재생해줘.”

“네, 주인님.”

그녀가 이야기를 하고 뒤를 이어, 새하얀 공간이 한껏 좁아졌다. 나는 허공에서 픽셀 조각이 이어지며 떠오르는 좁은 길을 보고 숨을 삼켰다.

비행기의 안이었다.

[음료, 드시겠어요?]

좌석이 펼쳐지고, 그 사이의 길로 스튜어디스가 카트를 끌고 돌아다녔다. 성큼걸이로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이내 한 남자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서, 성진 구우우운….]

[괜찮아. 괜찮아.]

한성진이다.

옆에는 연한 갈색 머리를 묶은 여자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비행기를 무서워하는 걸까? 그녀는 한성진의 손을 꾹 잡은 채 거기에 기대어 있는 모습이었다.

[진아 누나 진짜 겁쟁이라니까.]

[쇠, 쇳덩이가 어떻게 하늘을 날아!]

“….”

그리고 그 뒤에는,

칼 후퍼와 클레어 후퍼가 나란히 앉은 채였다. 조금 행색이 나아져 칼 후퍼는 멍하니 앉은 채였고 클레어는 그런 그의 옆에서 디멘션 커넥터를 두드렸다.

어디로, 가는 걸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이내 한국일 거라는 결론을 어렵지 않게 내렸다. 엘레노어는 한국의 한 IT 기업에서 개발을 하였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칼 후퍼는 이 한성진이라는 남자에 의해 스카우트 되어 한국으로 가고 있는 거겠지.

“넬.”

“네, 주인님. 아마 모디님이 한국으로 가는 영상을 촬영하신 것 같아요.”

힐끔 돌아보며 묻자 거기에 넬이 대답했다.

풍경은 다시금 뒤바뀌었다.

[여기, 계약서입니다.]

“…?”

익숙한 풍경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한 그룹의 회장실, 아까 그 연갈색 머리의 여자와 젊은 시절의 우정현 회장이 눈에 들어왔다.

[개발에 필요하신 자금은 모두 원조를 해드리겠습니다. 자유롭게 저희 측 개발자들과 소통을 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 그럴 마음은 없어.]

“잠깐, 넬.”

칼 후퍼가 차갑게 중얼거린 순간, 나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들었다. 영상이 돌처럼 굳어지고 나는 옆에 있던 넬을 돌아보았다.

“모드레드가 없는데 영상은 어떻게 촬영된 거야?”

“회장실의 CCTV를 해킹하신 것 같아요.”

“해킹? 이거 날짜가….”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눈앞에 팝업창을 띄우고 재생 중인 영상의 기록을 확인했다.

지금으로부터 11년 전.

그 말인즉슨….

“모드레드가 7살일 때라고?”

“아마, 도요.”

“유치원 다닐 나이의 여자애가 무슨….”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나는 놀라 중얼거렸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자 영상이 다시금 재생되기 시작했다.

[나는 혼자 일해.]

[그건, 왜죠?]

한성진이 물었다. 거기에 칼 후퍼는 입술을 비릿 다물며 인상을 찌푸렸다.

[내 아이를 가지고 싶기 때문이야.]

[….]

[당신에게는 설명을 하더라도 모르겠지.]

인상을 찌푸린 채 입을 다물고,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회장실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하지만 영상은 끝나지 않았다.

[성진 씨….]

우정현 씨가 다가와 한성진의 옆에 앉았다. 착잡한 얼굴로 있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교통 사고 당시, 안느 후퍼는 다른 남자의 차에 타고 있었던 모양이야.]

그는 한껏 차가워진 눈동자로 생각을 하듯 입술을 다물었다. 나는 흠칫 놀라며 무언가를 깨달았다.

“잠, 말하지 마!”

하지만 그게 닿을 리는 없다.

자신의 부인이 다른 남자의 차에 타고 있었다.

칼 후퍼는 자신의 아이가 가지고 싶다고 했다.

그 두 가지가 결합되며, 어떤 불길한 상상이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그건, 지금 이 영상을 촬영하며 듣고 있을 7세의 클레어가 듣기에는 너무나도 가혹한 내용이다.

“말하지 말라고!!”

[아마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하지만 한성진은 잔혹했다.

안네 후퍼는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가족, 자신의 남편엑게 통보하듯 죽었다. 미치광이가 된 칼은 자신의 아이마저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씨발…!!”

한성진에게 다가가, 나는 녀석의 멱살을 쥐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영상 속의 그에게 닿을 리는 없다.

순식간에 그 풍경이 멀어져,

[테스트, 원.]

모드레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저히 어린 아이가 지을 법한 표정이 아니었다. 어두운 방안, 어린 아이의 방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참혹했다. 그녀는 팝업창과 인터페이스를 띄우고 무언가를 잔뜩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클레어.]

그리고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상의 존재인, 가상의 존재인 클레어의 어머니가.

“….”

뭐지, 무슨 짓을 하는 거지.

[엄마, 나 배고파.]

[클레어.]

[나, 배고파.]

[클레어]

모드레드가 물었으나 대답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테스트 종료.]

목소리와 함께, 풍경은 계속해서 뒤바뀌었다.

모드레드는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자신의 어머니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말을 몇 마디 할 때마다 활짝 웃었고, 안기기 위해 달려들었으나 그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마치 어머니를 되살려내려는 것처럼.

일곱 살의 아이가 여덟 살이 되고.

[파파….]

다시금 영상이 전환되었다. 모드레드는 수많은 팝업창으로 가득한 방안에 천천히 들어섰다.

[클레어….]

그 안에는 칼 후퍼가,

[안녕, 꼬마 아가씨.]

그리고 한성진의 모습이 보였다.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지금 좀 바쁜데…. 나중에는 안 될까.]

[그거, 벌써 열두 번째야….]

[후우….]

모드레드의 애원에 한숨을 내쉰 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무지 자신의 딸에 대한 태도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웃으며 서있는 한성진을 놔두고 딸이 이끄는 곳으로 장소를 이동했다.

모드레드가 테스트를 하는 동안 계속해서 비춰졌던 좁은 방. 그 중심에 선 그녀가 머뭇거리다 인터페이스를 조작했고, 이내 사람의 형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 안네.]

그것을 본 칼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녕, 칼.]

[왜….]

안네의 인사에 칼은 그렇게 대답하며 모드레드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겁을 먹고 어깨를 움츠린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마의 디멘션 커넥터를 바탕으로 내가 만들어낸…. 인공 지능이야.]

[왜 이런 걸….]

[파파가, 마마의 사진을 볼 때마다 자꾸만 왜 그런 거냐고 물어서….]

[…. 그래서 이런 걸?]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물어봐도 돼.]

그렇게 대답한 모드레드는 어설프게 웃으며 물러섰다.

그녀는 엄마를 다시 만들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어린 마음에,

단지 아버지를 다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

하지만 칼 후퍼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지워.]

[뭐…?]

[지워, 클레어. 지우라고…. 지워!!!]

버럭 소리를 지른 그가 모드레드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싸늘한 눈을 한 채 노려보았다.

[켁…!]

[지워, 클레어. 당장. 내 눈앞에서. 모두.]

[…!]

겁에 질린 모드레드가 인터페이스를 조작했다. 그러자 안네 후퍼의 모습은 이 세계에서 사라졌다.

그로서 만족한 걸까.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

차갑게 중얼거린 칼 후퍼가 돌아섰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 추욱 늘어진 자신의 딸을 뒤로 한 채 사라졌다.

[흐윽….]

어둠에 잠긴 방안, 모드레드가 눈물을 참는 소리만이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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