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편
<-- Chapter 4 : 파륜의 기사 -->
◇
있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드는 것 같은 방이군….”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방안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품안의 모드레드는 새근새근 잠이 든 채로,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중간쯤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벽의 경계점이 제대로 보이질 않아 이게 제대로 된 중심인지조차 모르겠다 싶을 정도였다.
“….”
“주인님.”
멍하니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자니 뒤쪽에 있던 넬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뚝뚝해지는 표정을 숨길 생각조차 못한 채 나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곳은 왜….”
“조금,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넬은 조금 불편한 감정을 느끼는지 양 팔꿈치를 감싸 쥔 상태에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는 그런 반응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씁쓸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모드레드는 그런 이곳에서,
“몇 년 동안이나….”
지내왔단 말인가.
스톰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이 ‘게임’을 거의 최초로 플레이한 유저라는 모양이었다. 거기에 단순히 스톰의 추측이었지만 꽤나 초창기 시절부터 우정현 회장과 ‘협력’하는 관계로서 퓨드를 맺고 게임을 끝내기 위해 고군분투해왔다고 들었다.
즉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어떻게 보자면 나와 비슷한 셈이었다.
게임을 끝내기 위해, 우정현 회장과 협력을 맺은 시점에서. 그래서 그녀는 싫어하면서도 그렇게 말했던 것인가? 나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대체 왜?
어째서?
무슨 이유로 그녀는 홀로 고군분투를 해온 걸까. 나는 거기에 무척이나 의문이 드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화살 역시 내게도 똑같이 겨누어질 수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무척이나 불쾌한 기분이었다.
왜냐면 같은 목적을 공유한 상대가….
지금껏 혼자였다는 것이.
그 외로움을 짐작할 수가 없어서.
“젠장….”
나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모드레드를 바라보았다. 언뜻 떨어져 있어 보였던, 그리고 부서져 무너져 흩어졌던 그녀의 부분들이 빛을 내며 하나로 이어졌다.
그녀는 자신을 하나의 기계처럼 대하려고 했다. 그렇기에 스스로를 가상 세계에서 철저하게 모욕하고 망가뜨림으로서 그 말도 안 되는 성향을 계속해서 유지해왔다. 그녀의 말대로 몸은 인간인 동물이지만, 그것을 초월한 넬 같은 존재가 되기 위해 그런 행동을 반복해왔던 것이다. 마치 잠에서 깨기 위해 각성제와 약물을 마구잡이로 먹어대는 것처럼.
모르겠다.
모드레드는 대체 왜 그래야만 했던 거지.
그리고 난 왜 알아차리지 못했던 거지.
“….”
아니, 이제 와서 후회하기에는 위선이다.
우정현 회장의 말대로 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타인이 끼어들어서는 안 될 문제인지도 모른다. 특히나 기존의 잣대로 잴 수 없기 때문에…. 더욱….
하지만,
“엿이나 먹으라지.”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모드레드의 조그마한 손을 쥐고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이를 빠득 물어 참아냈다.
“주인님….”
“넬, 준비를 해줘.”
거리낄 것이 없어져 나는 고개를 들었다.
린슬렛과 트리슈는 모드레드가 가상 세계에서 사망한 지점을 탐색하는 중이다. 거기에 스톰의 처리 또한 원활히 이루어져 이제 남은 것은 눈앞에서 잠들어있는 바보를 깨우는 일뿐이었다.
자신을 단순히 도구로 여기기 위해 가상 세계에서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길을 택했던 바보를.
“기다려, 이 멍청아.”
그렇게 중얼거린 뒤, 나는 넬이 전송하는 가상 세계의 초대장을 곧바로 받아들였다.
정신이 곧바로 쏜살같이 빨려들었다.
나는 스스로의 정신이, 몸을 통과해 가상의 세계로 들어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뒤를 돌아보자 털썩 쓰러지는 자신의 몸이 보였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찾아온 것은, 마찬가지로 새하얀 세계였다.
“주인님.”
모습을 드러낸 넬이 심각한 표정으로 날 불렀다. 고개를 들자 그녀가 눈앞에 각종 인터페이스와 창들을 띄우고 조작하기 시작했다.
“넬은 지금, 모디님의 기록되어있는 모든 기억과 접촉할 수 있는 상태에요.”
“얼마나 있는데?”
“태어난 이후로 드문, 드문하다…. 6세 이후로 기록이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하시네요.”
“? 어떻게 그렇게 되는데?”
“6세 이전의 기록은…. ‘칼 후퍼’라는 분의 디멘션 커넥터에서 촬영된 것 같아요.”
“그 사람이…. 누군데?”
“아마, 모디님의 아버지가 아니실지….”
중얼거린 넬이 팝업창을 띄워 보여주었다. 1인칭 시점으로 신생아실에 있는 아기를 촬영한 영상이었다.
[클레어….]
부드럽게 웃는 목소리와 함께, 남자가 유리벽에 손바닥을 짚었다. 거기에서 진한 애정이 묻어나와 나는 넬의 말대로 그가 모드레드의 아버지임을 알아차렸다.
클레어,
그것이 모드레드의 이름이라는 건가?
“촬영 지점은 영국, 런던….”
그리고 몇 가지 영상이 더 흘러나왔다.
모드레드와 똑 닮은, 하지만 좀 더 성숙해 보이는 여성이 어린 아기였던 모드레드를 목욕을 시키고 있었다. 그녀는 화면 쪽을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자, 치즈.]
[그만해, 칼. 우리 공주님이 다 벗고 있다고?]
[하하, 마치 천사 같네.]
초기의 영상은 그런 게 대부분이었다.
아기였던 모드레드가 점점 자라며 어머니와 아버지는 행복하게 그 기록을 했다. 시금치를 싫다며 먹지 않는 모드레드를 달래고, 사랑스러워 했다.
“이 이후로…. 6세대 디멘션 커넥터가 나와요.”
그것은 모드레드가 6살이 되던 시점이었다.
그건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즉,
모드레드는 현재 18세라는 말이었다.
솔직히 말해 그게 조금 충격적이었고,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만들었다.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영상을 지켜보았다.
아니 그것은 그 시점에서 영상이 아니게 되었다.
현실이 되었다.
“….”
“집안의 풍경을 실시간으로 기록하고 있네요.”
넬이 살짝 놀란 눈으로 중얼거렸다. 영국의 평범한 가정집이 눈앞에 점차 형태를 명확히 갖추어 모습을 드러냈다. 좁은 복도와 벽난로가 있는 거실, 계단을 통해 2층까지 이어진 평범한 가정집.
[미안해, 안네.]
그리고 칼은 괴로워하고 있었다.
벽난로 앞의 안락의자에 앉아, 머리를 감싸 쥔 그를 안네가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뭐가요?]
[내가…. 좋은 아빠와 남편이 되지 못하는 것 같아서.]
[괜찮아요. 저는 당신의 꿈을 사랑했기 때문에 함께 하기로 결심한 것이니까.]
미소를 지은 안네가 칼의 볼에 입술을 맞췄다. 슬쩍 주변을 둘러본 나는 벽난로 위의 가족사진을 제외하고는 모두 낡아빠진 것들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파파. 왜 그래?]
그리고 흙투성이의 모드레드….
아니 당시에는 클레어가 안으로 들어섰다. 뒤를 돌아본 칼과 안네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칼 후퍼는 프로그래머였다.
유능한 존재였지만, 보다 커다란 꿈을 가지고 있던 그는 프리랜서 생활을 하며 가족들을 부양하는 모양이었다. 때문에 수입은 그렇게 많지 못했고 안네가 가정을 지탱하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는 꿈이란….
생명을 만들어내는 것.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것.
“….”
설마.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어지는 기억들을 연달아 지켜보았다. 칼은 계속해서 어떤 이상적인 형태의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했고, 하지만 그것이 당시에 태동기였던 학파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었다.
인공지능에 대한 연구를 하는…. 학파….
“이건, 무슨….”
나는 어이가 없어지는 걸 느끼며 중얼거렸다. 눈앞에서는 디멘션 커넥터를 조작해 복잡한 프로그램 로직을 짜 맞추던 칼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나를 돌아보았다.
[너도 힘들지?]
마치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답답할 거야. 엘레노어.]
“….”
[딱딱한 비스킷도 좋아. 싸구려 헤이즐넛도 나쁘진 않아. 하지만…. 클레어가 좋아하는 인형을 사주지 못하는 건 역시 좀 슬프네.]
책상에 기대어 가볍게 한탄을 한 그가 이내 굳은 결심을 마치고 프로그램을 다시 매만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희미하게 사라졌다.
다음 영상이 재생된 것이다.
띵동, 하는 초인종 소리. 아래에서 들려온 것이다.
나는 뭔가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아래로 서둘러 달려 내려갔다. 7살이 된 클레어가 발 뒤꿈치를 든 채 낑낑거리며 문을 열어주었다.
한 동양인 남자가 그곳에 서있었다.
[안녕?]
30대 초반쯤 되었을까.
깔끔하게 자른 머리와 검푸른 양복이 조화롭게 매치된 사내였다. 부드럽게 미소를 지은 그 얼굴은, 평범한 키에도 불구하고 근사해 보인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기분이 더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혹시 여기 칼 후퍼 씨가 계시니?]
모드레드를 바라보며 한쪽 무릎을 꿇은 그가 친절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하지만 모드레드는 조금 태도가 이상해, 멍하니 굳어져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 이유를 알아채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
하지만 그는 그 이유를 알아챈 듯싶었다.
전에도 온 사람인가?
[배가 고프겠구나.]
뭐지? 무슨 소리지?
중얼거린 그는 모드레드의 손을 잡고는 제멋대로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곧바로 주방으로 가 정장 재킷을 벗고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음…. 역시 다 썩었네.]
곤란하다는 듯 중얼거리고, 그는 곧바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푸른빛의 팝업창이 눈앞에 드러나며 그는 여유로운 태도로 싱크대에 기대어 섰다.
[아, 진아야. 응. 혹시 먹을 것 좀 사다줄 수 있….]
전화를 하던 그가 갑작스레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거기에 부드러운 미소가 감겼다.
[그, 그래 버거킹 궁전인가 뭔가 가줄 테니….]
다시금 찡그리고,
[그, 그래. 버킹엄 궁전….]
전화가 끊어졌다. 잠깐 숨을 삼키고 있던 그는 이내 식탁에 앉아 손톱을 물어뜯고 있는 모드레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가볍게 그 주먹을 쥐었다.
[아저씨 손이 더 크지?]
[….]
그게, 단숨에 흥미를 끌었다.
장난을 치며 남자는 능숙하게 모드레드를 상대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나는 곧이어 옆에서 발소리를 듣고는 숨을 멈췄다.
[…. 누구, 야.]
내가 그렇게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깎지 않은 수염은, 마치 칼의 얼굴을 밤송이처럼 보이게 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술에 취한 그가 엽총을 든 채 들이밀었다. 모드레드를 한 번 확인하고 눈썹을 찌푸린 남자는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엉망이군요.]
[누구, 냐고…. 너….]
[적어도 일주일은 먹지 못한 것 같네요. 이 아이. 불쌍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으시나요?]
[대답해!! 누구냐고!!]
타앙! 하고 총성이 들려왔다.
하지만 탄환은 남자의 몸을 스치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모드레드가 공포에 질려 식탁 밑으로 숨어들었다.
[아내 분을 잃으신 것 같군요.]
[그걸, 어떻게….]
[엎어져 있으니까요. 벽난로 위의 가족사진만이.]
집은 멀쩡한데.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데.
“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벽난로 위로 달려가 상황을 확인했다. 남자의 말대로 그 위에 있던 조그마한 액자는 엎어진 채였다.
[…. 소개가 늦었군요.]
그 말을 들은 칼이 무릎을 꿇었다. 그런 모습에 길게 한숨을 내쉰 남자가 천천히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한성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내밀었다.
마치 그런 칼의 행동을 다 계산해두었다는 것 마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