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편
<-- Chapter 4 : 파륜의 기사 -->
◇
화려한 금발을 하나로 묶었다.
거기에 안경을 써, 인상을 의도적으로 조금 변형시킨다. 그녀는 그런 여자였다. 스스로의 모습을 항상 감추며 상대에 따라 의도적으로 변형시키는. 하지만 특유의 독사 같은 눈은 그대로였던 지라 가웨인은 얼굴을 볼 때마다 불쾌하다는 생각을 하고는 했다.
물론 자신도 만만찮았지만.
“스무디.”
쇼핑몰의 개방된 카페. 맞은편에 앉아 가웨인은 다짜고짜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 붉은색 시스루 원피스를 입고 있던 그녀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네?”
“딸기…. 로 할까 했는데. 바나나로.”
“재미있네요.”
“입맛 떨어지는 빨간색이 눈앞에 있어서.”
그렇게 이야기한 그는 빙긋 웃어보였다. 테이블 위에 턱을 괸 채 있던 헥터는 눈을 내리깔아 자신의 ‘붉은색’ 시스루 원피스를 바라보았다.
“딸기는 과일의 왕…. 아니었던가요?”
“그건 두리안이고. 뭐, 똥내가 난다는 건 비슷하군.”
“….”
표정이 굳어졌다.
안 그래도 가웨인으로 인해 ‘작전’을 망친 시점에서 그녀의 분노는 들끓었을 터였다. 헌데 그 장본인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 하는 말이 바나나 스무디라니.
“하나 사와. 가래침도 타오고.”
하지만 이럴 거라고 예상했다.
단 한 마디를 지기 싫어하는 여자였으니 말이다.
헥터는 바로 뒤쪽에 앉아있던 평범한 차림의 남자에게 명령을 내렸다. 일어선 그가, 복잡한 얼굴로 가웨인을 바라보고는 이내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가래침 뱉는지 끝까지 지켜봐야지.
“그래서, 무슨 이유에서신지.”
하지만 뒤를 이어, 빙긋 웃은 헥터가 말을 걸어왔다. 가웨인은 카운터 앞에 서 점원에게 말을 거는 남자를 보며 입을 열었다.
“뭐가?”
“방금 접촉한 이유 말이에요. 타나토스와.”
“아 그거…? 걔가 미친 여자 상대하는 법 좀 가르쳐달라고 해서 말이야. 그래서 조언 좀 해줬지.”
“비비안 양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니 네 엄마.”
“….”
“미국 중년 여성 특유의 지방을 가지고 MILF 포르노에 다수 출연하신 그 분 말이야.”
“저급하시군요.”
“하긴, 좀 그렇지?”
가웨인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아무리 그래도 MILF라니 나도 저급하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런 이야기에, 씁쓸하게 아메리카노를 마신 헥터가 빙긋 웃었다. 역시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었다. 가웨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아르바이트생이 건네주는 스무디를 받는 남자의 모습을 확인했다.
“아니 그냥, 배알이 좀 꼴려서 말이지.”
“제가 타나토스를 궁지로 몰아넣는 게요?
다행히 침을 뱉는다거나 하지는 않는군.
“그것만이라면 넘어갈 수 있었을 텐데…. 그 자식의 약점을 아무렇지도 않게 건드는 게 싫어서.”
“그 약점이라는 건?”
“인질 잡기, 감정에 호소하기, 넌 정의의 편이니까 악당인 우리의 앞에서 비겁한 짓 하지 말라고 하기.”
“모두…. 당신이 쓰셨던 거군요.”
“알고 있네. 그렇다면 그게 통하지 않을 거란 사실도 잘 알고 있겠군.”
“아뇨 그때는, 당신 역시 인질을 붙잡혔으니까요.”
지금처럼.
중얼거린 헥터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에 머금었다. 가웨인 역시 가볍게 웃으며, 자리로 돌아온 남자가 건네는 바나나 스무디를 받아들었다.
가볍게 한 모금.
“어쨌든 뭐, 별로 심각한 이야기를 한 건 아니야.”
“그건 이제 차차 밝혀지겠죠.”
“뭐 또, 재미있는 짓이라도 하려고?”
“10시에 다시 이곳으로 모시려고요. 만약에 대위님께서 허튼 소리를 한 게 아니라면 만나러 오겠죠.”
“만약 안 온다면?”
“대령님께 정식으로 문제 제기를 할 생각입니다. 현 행동에 관하여. 당신의 행동으로 인해 모든 계획이 틀어졌다는 건 인지하고 계시겠죠.”
“쇼핑몰에 사고를 일으켜 그 죄를 타나토스에게 뒤집어 씌운다는 작전이 말이야?”
“….”
“백 대령과 네가 하는 생각은 잘 알겠어.”
아마 이를 통해 우정현 회장을 궁지로 몰아넣으려는 거겠지.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게.”
“그건…. 역시 당신의 집착 때문인지?”
“? 아니. 일반 시민들을 제물로 바쳐서 뭘 하려는 건가 싶어서 말이야. 또라이 새끼들.”
반쯤 거짓말을 한 뒤, 가웨인은 킹 사이즈의 스무디를 단숨에 마셨다. 그리고는 플라스틱 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천천히 일어섰다.
“어쨌든, 나중에 부대에서 보자고.”
테이블에 의자를 밀어 넣고, 그는 곧바로 몸을 돌렸다. 흰색의 코트가 펄럭이고 붉은 머리의 남자가 점점 멀어져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헥터는,
“대위님.”
하고 조용히 목소리를 냈다.
역시 이쪽으로부터 경계를 늦춰놓고 있지는 않았다. 우뚝 멈춰선 그를 보며 헥터는 피식 웃었다.
“가래는 맛있게 드셨나요.”
“…. 보니까 안 뱉던데.”
“아르바이트생이 뱉었죠.”
“아…. 그런 추가 주문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쿠폰 12장을 찍으면 나오는 추가 서비스인 걸로.”
“여자였어? 뱉은 거.”
“아마도요?”
“예쁜?”
“….”
“그거 참, 졸라 싱숭생숭한 기분인데.”
입술을 비틀며 웃은 그가 이내 다시 돌아섰다. 새하얀 코트가 펄럭이며, 이내 망설이지 않고 멀어져가는 그를 보며 헥터는 참아두었던 표정을 내비추었다.
불쾌함.
그리고 짜증이었다.
◇
밤 열 시. 쇼핑몰이 문을 닫은 뒤에 보자.
갑작스레 연락을 한 스톰은 일방적인 통보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뜬금없는 약속 변경에 나는 그 녀석이 왜 쇼핑몰로 날 불러냈는지를 알아차렸다.
할 킬러즈의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
즉, 녀석들은 쇼핑몰에 등장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가웨인이 예기치 못하게 모습을 드러내어, 계획을 다른 방향으로 급하게 변경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런 거겠지.
그렇게 되면 녀석이 10시에 보자는 말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시간을 벌려는 의도를 지닐 터였다. 가웨인이 타나토스에게 어떤 이야기를 했을지 확실하지 않았으므로. 거기에 대해서 파악을 해두겠다는 걸까.
가웨인이 솔직하게 말해줄 리는 없을 텐데.
“….”
그렇다면 여기서는 가지 않는 편이 낫겠지.
그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눈치를 까고 모습을 감춘다는 건 가웨인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다는 말이 되니까.
“후우.”
“주, 주인님?”
그리고 늦은 밤,
나는 다시금 쇼핑몰의 바닥에 발을 디디고 섰다.
그런 의도를 모두 들었음에도, 이와 같은 행동을 취하자 넬은 무척이나 당황한 눈치였다. 내 주변을 맴돌며 몇 번이고 말렸다.
“넬.”
“네, 네넬?”
“뒤를 부탁할게.”
“으, 으음. 의도는 알겠는데 너무 무모해요….”
“괜찮아.”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천천히 걸어 나갔다.
천장으로부터 비롯되어 벽면을 타고 내려오는 유리창이 달빛을 반사했다. 희미한 푸른빛이 물이 멎은 분수대와 그 주변을 깨끗하게 드러냈다.
“왔어?”
그 앞에는 스톰의 모습이 보였다.
검은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살짝 찢어진 눈동자가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는 천천히 녀석의 앞으로 다가가, 적당히 거리를 벌리고 멈춰 섰다.
“왜 시간을 바꾼 거지?”
“갑자기 할 킬러즈에게 쫓기게 되어서 말이야.”
녀석은 어깨를 으쓱하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왜 보자고 한 거야?”
“모드레드에게 문제가 좀 생겨서.”
그렇게 이야기한 나는 스톰의 안색을 살폈다. 내 이야기를 들을 요량이었는지 입을 꾹 다문 채였다. 원래대로라면 모드레드의 마지막 말, 녀석에게 연락을 하라고 했던 그 이야기에 따를 생각이었으나.
역시 들어두는 편이 낫겠지.
“주인님, 주변에 할 킬러즈가 가득해요.”
“몇 명이나 있지?”
나는 옆으로 날아든 넬에게 이야기를 하고 곧바로 스톰을 바라보았다. 녀석이 움찔 몸을 떨었다.
“뭐?”
“우리 쪽에 남은 멤버 말이야.”
나는 적당히 너스레를 떨었다.
“아, 아아…. 글쎄. 사실 우리가 그렇게까지 조직적으로 움직이지는 않기 때문에.”
“모른다는 건가?”
“우리는 용병 집단이니까. 모드레드를 필두로 하는.”
“…. 녀석이 널 만나보라고 했어.”
“그래? 이유는?”
“글쎄…. 나도 짐작이 가는 바가 없는데.”
나는 입술을 비틀며 그렇게 연기를 했다.
확실히 모드레드가 스톰을 만나보라고 한 것은 어딘가 설득력이 없지 싶었다. 기본적으로 우정현 회장의 휘하에 있는 녀석들이 돈을 받고 활동하는 용병 집단이라면, 그녀 역시 거기에 대해서 파악을….
아니, 정반대였군.
“도움을 받으라는 게 아니라.”
쓰러뜨리라는 거였나.
그리고 그걸 통해 헥터를 상대할 실마리를 찾아라.
그런 이야기였던 걸까.
“그렇다면 딱히 거리낄 바는 없군.”
나는 적당히 중얼거리며 앞머리를 매만졌다. 완전히 헛다리를 짚어 생각하고 있던 셈이었다.
“13명이에요.”
그리고 뒤를 이어, 넬이 돌아왔다. 나는 품안에서 스파다를 꺼내 쥐며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기사는?”
“없습니다!”
살짝 자신감에 차 소리치자 넬 역시 웃으며 대답했다. 반대편에서 고개를 갸우뚱하며 스톰이 일어섰다. 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 뭐야? 무슨….”
“아쉽게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거겠지.”
그리고 뒤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나는,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검은 코트의 요원들을 바라보았다. 검을 비롯해 각종 병장기를 갖춘 그들이 나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1 대 14는 너무 비겁하지 않아…?”
“테러리스트 주제에.”
뭐, 틀린 말은 아니군.
그 중심에 서있던 사내의 말에 나는 입맛이 써지는 것을 느꼈다. 통파를 꺼내든 스톰이 나를 노려보았다. 자세를 잡은 채, 나는 경계하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남자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기왕이면 2대 14로 하죠.”
오른손이 의수처럼 변한,
“베디비어.”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