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편
<-- Chapter 4 : 파륜의 기사 -->
“가웨인….”
나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새하얀 코트를 입은 채, 옆의 기둥에 기대어 서있던 그가 이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내 쪽으로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수많은 인파를 헤치며.
미소를 머금은 얼굴 그대로.
거기에 녀석은 담배까지 피우고 있었다. 비틀어진 입술 사이에 물린 그것이 연기를 피워 올려, 주변의 사람들이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어떻게 하지.
짜증, 아니 증오에 가까운 감정을 느낀 것과는 달리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눈앞에 있는 남자에게 왠지 모를 압박감을 느꼈다.
녀석이 뭔가 저지를 것 같았기에.
“….”
아니 그건 좀 어딘가 이상한 광경일 터였다.
남이 본다면.
분명 할 킬러즈는 나름대로 국가 기관이다. 겉으로 드러난 목적 자체는 이 아서리안 사태를 진정시키고 그로서 시민들의 안전을 보호하는 것이다. 거기에 사태를 끝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런 식으로 선전되고 있다.
그럴 리가 없다.
녀석이 설마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불안한 감정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것을 느꼈다.
“배는 좀 괜찮아?”
그리고 다가온 녀석이 기분 나쁜 얼굴로 이야기했다. 지난번의 싸움을 상기해내는 듯한 말에 나는 벤치에 앉은 채 녀석을 올려다보았다.
“여긴 무슨 일이지.”
“그냥? 보고 싶어서.”
“….”
“하하, 농담이야. 농담. 하여간.”
“그럴 사이는 아니지 않나?”
“원래 그럴 사이일수록 해야 하는 법이지.”
너스레를 떨며 중얼거린 가웨인은 이내 몸을 빙글 돌려 내 옆에 앉았다. 순간적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으나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섣불리 행동할 수는 없었다.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면서?”
“….”
그걸 어떻게, 라고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예감이 없지는 않았으므로, 헥터가 말해주었다던가 그런 거겠지.
“힘들 땐 담배가 최고야.”
“….”
“아니지, 여자가 최고였나.”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걸까.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가웨인은 벤치의 등받이에 팔을 걸친 채 계속해서 연기를 피워 올렸다.
“아무리 그래도, 상도덕이란 게 있는 법인데….”
그리고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뭐?”
“남의 먹잇감을 건드리는 건 시궁창 들쥐들이나 할 법한 저열한 짓거리라는 거야.”
“헥터를 말하는 거군.”
“얼굴이 닮아서 알아차렸나보네.”
녀석이 킥킥 거리며 웃었다.
조금 그런가 싶다가도 나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래서 뭐, 지금 당장 결판을 내잔 거냐?”
“아니 그럴 리가.”
가웨인은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나를 잔혹한 눈매로 바라보았다. 희끄무레한 연기가 녀석이 물고 있는 짧은 담배
위로 솟아올랐다.
“빌드 업이 아직 덜 되었으니.”
“…?”
“원래 복수는 차갑게 얼려 먹는 음식이라고 하잖아.”
“핫.”
그런 이야기에 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이가 없는 걸 넘어서 기가 찼기 때문이었다.
“무엇에 대한 복수지?”
“내 여자에 대한.”
“단지 ‘내 여자’라고 부를 대상이 필요한 건 아니고?”
“….”
비아냥거리듯 묻자 가웨인의 표정이 슬쩍 굳어졌다. 녀석은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차가운 얼굴을 한 채 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로서 확실히 선을 그어둔 셈이었다.
녀석은 이제, 그 청개구리적인 성향으로 인해 행여나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전투를 거는 것만큼은 피할 터였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말을 이었다.
“저열하군.”
“그럴지도, 모르지.”
가웨인은 분노로 표정이 일그러뜨리는 걸 막으며 애써 중얼거렸다. 확실히 내 기준에서 틀린 말은 아니었다.
녀석은 저열했다.
단지 지키고 싶은 여자가 필요할 뿐이었으니까.
백시호가 지니고 있는 마음의 짐을 덜어내기 위해, 비비안은 단지 존재만 해주면 되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건데.”
하지만 어쨌든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나는 가볍게 중얼거리며 가웨인의 안색을 살폈다. 질문을 던졌음에도 한동안 녀석을 입을 다문 채였다.
“이 녀석을 통해서였지.”
그리고 이내 눈앞에 팝업창을 띄워보였다. 뭔가 싶었던 나는 고개를 슬쩍 틀었고 이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스톰….”
사진에 나온 것은 분명히 그였다.
검은색의 두건을 얼굴에 두른, 미국 갱스터 같은 불량스러운 사내. 나는 그 얼굴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그 옆에 있는 헥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
“좀 알겠어?”
“이 자식이….”
“헥터의 말에 의하면, 한창 약에 취해있는 와중에도 관리가 철저해서 주사하기 어려웠다던데.”
“그걸….”
“맞아, 이 친구가 도와주었다는 모양이야.”
가웨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는 분노를 숨기기 위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쪽, 회장님 때문에 혼란스러운 상황인 건 알겠는데. 그런 김에 주는 약간의 서비스랄까.”
그렇게 중얼거린 가웨인은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나는 이내 등을 돌리고 선 녀석을 향해 입을 열었다.
“왜 이런 사실을?”
“말했잖아. 난 먹잇감을 빼앗기는 걸 가장 싫어한다고. 그것도 내가 몰라서 안 쓴 게 아니었던, 아주 비겁하고 더러운 수단으로 말이지.”
가웨인의 얼굴은 침착했다.
하지만 복잡하게 굳어진 내 얼굴을 보고 거기에 이내 가학적인 미소가 담겼다.
“쓸데없는 짓거리였나?”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니 가웨인은 피식 웃으며 뒤로 돌아섰다. 코트 자락이 펄럭이고 붉은 머리가 가볍게 눈썹 아래로 흘러내렸다.
“고결하신 타나토스께는 말이지.”
“비아냥대는 거냐.”
“그럴 리가. 사실이잖아? 혼자 남들은 너무 거대해서 상상하지도 못하는 고행을 하는 게 네 일이지.”
“혼자 무슨 착각을.”
“그래줬으면 좋겠는데. 아니면….”
불쾌할 테니까.
너라는 고결한 남자에게 온갖 혐오 섞인 시선을 받았던 ‘우리는.’
그렇게 중얼거린 가웨인은 다시금 몸을 돌려, 천천히 눈앞에서 사라졌다. 나는 그 모습을 알 수 없는 감정인 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말인즉슨 그게 아닌가.
자신의 기대를 배신한다면, 녀석 역시 마찬가지로 ‘비겁한 수단’을 서슴없이 쓰겠다는.
◇
날카로운 칼날이 눈앞으로 날아들었다.
하지만 빙긋 웃은 트리슈는 거기에 대응하지 않고 기다렸다. 순간적으로 시간이 길게 늘어지며 그녀는 반대편에서 검을 내던진 우아랑을 바라보았다.
물론 예상대로 왕자님은 늦지 않았다.
“…!”
놀란 린슬렛이 달려들어 순식간에 방패를 내세웠다. 거기에 튕겨진 검이 날카로운 금속성 파편음을 내뱉으며 다시 주인의 곁으로 돌아갔다.
“뭐, 뭐하는 거야?!”
린슬렛은 어이가 없다는 듯 소리쳤다. 그리고 뒤를 이어 그녀가 입고 있던 옷이 원래의 재킷으로 검은 연기와 함께 돌아갔다.
“흐응….”
하지만 트리슈는 그 이야기를 듣고 있지 않았다.
입술에 손을 얹은 채, 반대편에서 검을 갈무리하는 우아랑을 미소와 함께 바라보았다.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나뉘어져 있던 퍼즐 조각이 맞아떨어졌다.
정보는 애초에 모두 모여 있지 않았던 거다.
신에 의해 의도된 것일까.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쪽에서서도 의아했겠네.”
“….”
물어보았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우아랑은 말없이 검을 들어 자세를 취했고 뒤쪽에 머뭇거리며 서있던 사서들이 이내 자리를 빠져나갔다.
“왜, 무슨 일인데.”
“린 언니, 이쪽 좀 잘 부탁해.”
“뭐…?”
의아해하는 린슬렛을 뒤로 한 채 트리슈는 믿고 뛰어올랐다. 물론 우아랑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어 그 주변을 맴돌던 검이 트리슈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하지만 린슬렛의 방패가 그것을 다시 튕겨냈다.
역시 믿음직스럽단 말이야.
허공을 가른 방패가 다시 주인의 품으로 돌아가는 걸 보며 트리슈는 거대한 책장을 박차고 올라섰다. 뒤를 이어 두 사람이 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슬슬 눈치를 챈 것일까.
우아랑과 함께 온 것처럼 보이는 남자가 책장 사이에서 빠져나왔다. 외부의 협력자인 걸까. 트리슈는 단숨에 몸을 회전시키며 패일노트를 장착했다.
그대로 두 발을 사격.
“큭?!”
남자의 코트자락에 두 발의 화살이 꽂혀 바닥에 고정되자 트리슈는 단숨에 하강해 그 앞에 섰다. 그는 가면과 모자를 쓴 트리슈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이~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그녀는 싱긋 웃으며 말을 걸었다.
“그쪽도 정보 가지고 있지? 갤러해드에 대한 ‘정보’ 말이야. 그쪽에서 조합할 수 있었어?”
“부, 불가능했는데….”
남자는 금세 상황을 파악하고 중얼거렸다. 입술을 비틀며 웃은 트리슈는 발렌타인에게서 받아온 정보의 조각들의 주변으로 늘어뜨렸다.
“시험 삼아 조합해볼까?”
그렇게 물은 순간,
“힉?!”
검이 날아드는 걸 느낀 트리슈는 곧바로 뛰어올랐다. 몸을 비틀어 뒤를 바라보자 린슬렛의 주먹에 얻어맞은 우아랑이 나가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린 언니! 제대로 좀 해!”
“내, 내가 뭘?!”
“트리슈의 곁으로 검 못 날리게 막으라고!”
“큭!”
검이 회전하여 다시금 우아랑에게 돌아갔다. 책장에 처박힌 채 쓰러져 있던 그녀는 린슬렛을 향해 몸을 낮춘 채 달려들었다. 두 사람이 다시금 부딪쳤다.
“자아, 그럼….”
안심하고 고개를 돌린 트리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화살이 바닥에 꽂힌 채, 남자가 사라졌던 것이다.
“아휴.”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쉰 그녀는 곧바로 치맛자락을 들었다. 그 아래에서 여러 대의 카메라가 빠져나왔다.
“트리슈로부터 도망칠 생각은 접어두는 게 좋을 텐데.”
빙긋 웃은 그녀는 곧바로 카메라를 날려보냈다.
========== 작품 후기 ==========
어제 개인 사정으로 연재를 멋대로 쉬게 되어서@..
음 죄송합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봐주시는 분들께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응원댓글이 정말로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