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편
<-- Chapter 4 : 파륜의 기사 -->
◇
이만한 악당이 없다.
“큭!”
“케헥…!”
유치장을 빠져나와, 린슬렛은 대기실에서 쉬고 있던 사내의 목에 다리를 휘감아 조였다. 발버둥 치던 사내가 기절하자 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일어섰다.
“꺄악~♡ 역시 린 언니!”
“이게 편한 길이었으면 다른 쪽은….”
“아 편한 길이기는 했는데 트리슈한테 편한 길이야.”
“뭐…?”
“다른 쪽 루트로 진행했으면 트리슈가 고양이 주인을 심문하는 수밖에 없었거든. 근데 트리슈는 고양이를 좋아해서 그러고 싶지 않아서….”
죽이고 싶다.
“힝힝, 트리슈 마음이 약해서….”
“하아.”
린슬렛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끼고 섰다. 그러자 트리슈는 몸을 비틀어 다시 유치장이 늘어선 방안으로 들어섰다.
“어, 어디 가는 거야?”
슬쩍 당황해 뒤를 따르니,
“아, 이쪽에 비밀 통로가 있거든.”
트리슈는 열쇠가 걸려 있던 장식장을 각도에 맞추어 휙 내렸다. 그러자 유치장 구석의 벽이 진동과 함께 열리더니 비밀 통로가 드러났다.
“…. 저기, 트리슈?”
“흐음, 꽤 기네. 응, 왜? 린 언니.”
“입구와 손잡이가 안쪽에 있으면, 굳이 바깥에 있는 경찰들은 쓰러뜨리지 않고 넘어가도 되는 거 아니야?”
“그러게.”
“근데 왜….”
“린 언니 싸우는 거 너무 섹시한 걸….”
죽이고 싶다.
“자자, 어서 가자!”
한순간 아론다이트를 뽑아들려던 린슬렛은, 트리슈가 애교를 부리며 팔짱을 끼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참을성이 한계에 다다르는 부분을 정확히 파악해 이런 식으로 애교를 부리니….
도무지 화를 낼 수가 없단 말이지.
“아파파파파팟?!”
“이 귀여운 녀석….”
“리, 린 언니 정말로 아픈데에엥?!”
볼을 꼬집는 정도는 해줄 수 있지만.
힝힝, 우는 소리를 내는 트리슈를 바라보며 가학적으로 웃은 린슬렛은 그대로 통로 안쪽으로 들어섰다.
좁고 어둡고 길쭉한 전형적인 비밀 통로였다.
“이곳으로 나가면 어디가 나오는 거야?”
“왕궁 로비가 바로 나와. 경비병들이 가득하다던데.”
“또 싸워야 되니?”
“후후, 아무리 그래도 왕궁은 경비병 많을 테니까….”
가볍게 윙크를 한 트리슈의 옷이 이내 빛을 일으키며 변했다. 그 모습을 보고 린슬렛은 기가 차 헛웃음을 내뱉었다. 푸른 경찰복의 ‘흉내’를 낸 옷이었다.
“치, 치마 너무 짧은 거 아니야?”
“어머, 그래야 다들 여기에 정신이 팔릴 거라고?”
물론 그렇겠지, 남자들은 다 바보들이니까.
린슬렛은 앞으로 나아가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드는 트리슈를 바라보았다. 천 쪼가리 하나에 가까운 주름치마에 검은 부츠, 배꼽을 드러내며 코르셋처럼 허리를 꽉 조여들고 있는 상의와 경찰모, 선글라스까지.
“그, 그럼 나는 어떻게 할까?”
그래도 역시 묘하게 예쁘단 말이지.
경찰서보다는 스트립 클럽에 더 어울리지 않나 싶었으나 린슬렛은 그 모습을 힐끔 보며 물었다.
“아, 린 언니는 괜찮아.”
하지만 트리슈의 대답은 냉정했다.
“엑….”
“범인 시켜줄게.”
“그, 그래?”
“웅웅! 이런 역할은…. 트리슈 하나로 족하니까….”
“그게 어떤 역할인데.”
“성적으로 수치심을 느끼고 타나 오빠한테 매달리면서 위로해달라고 하는…? 근데 도리어 타나 오빠는 트리슈가 너무 예쁜 게 잘못이라면서 셔츠를 휙 벗더니….”
“….”
린슬렛이 환멸감을 담아 바라보았으나 트리슈는 이미 망상의 세계에 한참 빠져든 뒤였다.
하지만 나쁜 아이디어는 아닌 것 같은데….
나중에 한 번 써볼….
“아니 근데, 전제가 하나 있지 않아?”
생각을 이어나가던 린슬렛은 뭔가 걸린다는 감각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뭐뭐?”
“걔가 그럴까?”
“…. 응?”
“그 바보가 과연 그 ‘의도’를 알아챌까 싶어서.”
“린 언니, 갑자기 팩트로 공격하면 안 돼.”
“미, 미안.”
그녀는 침울해진 트리슈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사과를 했다. 하지만 이내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바보라니까, 걔.”
“맞아, 맞아. 진지해 빠져서.”
“근데 그게 없으면 걔라는 느낌이 안 들어서.”
“흐음…. 그래도 지난번에는 좀 재미있었는데.”
“여행갔을 때 말하는 거야?”
그렇게 이야기하자 트리슈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린슬렛은 쓰게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매일 그러면 좀….”
확실히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다 못해 과도하게 표현하던 티티도 나쁘진 않았지만, 계속 이어진다면 버텨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 린슬렛은 곧이어 바로 옆을 걷는 트리슈를 돌아보았다.
“….”
거기에 이 적극적인 여성까지 합쳐지면, 매일 같이 시달리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확실히 지난번에는 즐거웠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게 맞는 건가 싶기도 해서.
“왜애?”
생각을 거듭하던 중, 트리슈가 돌아보았다.
귀엽다는 생각 정도는 있다.
“트리슈가 예뻐?”
길게 뻗은 다리나 화려한 외양과는 달리 애교 많은 성격이 고양이를 연상 시켰다. 요새 들어서 부쩍 친해져서 그런 걸지는 몰라도 애정이 생겼다.
근데 사실 한 가지 문제로 인해…. 린슬렛은 조금 그녀에게 다가가기가 꺼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트리슈.”
“응?”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응, 뭔데?”
“너 정말…. 여자도 괜찮은 거야?”
고개를 갸웃거리는 트리슈의 모습에 린슬렛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행여나 그녀에게 그런 성향이 있다면…. 조금 혼란스러웠지만 존중해주고 싶었다.
친구로서…. 인데.
“응?”
고개를 든 린슬렛은 웃음을 참고 있는 트리슈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이내,
“푸훗…!! 아하하하하하핫?!”
그녀는 과격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굴처럼 뻗은 좁은 통로에 웃음소리가 울려퍼져 깜짝 놀란 린슬렛은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린 언니 진짜 순진하다니까아!”
“뭣?!”
“잘 들어. 린 언니.”
린슬렛이 당황해 눈을 동그랗게 뜨자, 트리슈는 한순간 표정을 굳히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어깨에 손을 두른 채 빙긋 웃어보였다.
“트리슈는 그냥, 린 언니가 너무 좋은 거야.”
“…?”
“알았지이?”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를.
“그, 그런 걸로 장난치지 말라고!”
하지만 대충 이해했다. 린슬렛은 뽀뽀를 할 것처럼 달려드는 트리슈를 피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라, 설마 계속 고민했었어?”
“아, 아니거든!”
“헤에, 했구나아.”
가볍게 티격 대는 사이 두 사람은 긴 통로를 지나 문 앞에 도착했다. 린슬렛을 힐끔 돌아본 트리슈는 아무렇지도 않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샹들리에가 높이 드리워진 화려한 로비. 왕궁의 사람과 경비원들이 돌아다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트리슈는 아무렇지도 않게 옆으로 돌아섰다.
“근데, 너 묘하게 익숙하다?”
의문이 들어 린슬렛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애시 당초 퀘스트란 게, 공략이 있으면 쉽잖아?”
“그건 그렇지….”
아서리안은 그 특성상 정보의 공유는 그다지 이루어지지 않는 편이었으나, 그녀의 경우에는 발렌타인이 가르쳐준 듯했다.
“그걸 주변의 정보와 배합해 최적의 결과를 낸다.”
“대단하네.”
린슬렛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확실히 정보전 쪽에서 트리슈는 스페셜리스트라 부를 만한 솜씨였다.
“잠깐.”
바로 그때, 누군가 두 사람을 막아섰다.
검은 제복을 입고 있는, 왕궁의 경비병들이었다. 개의 머리를 한 그는 창을 든 채, 트리슈를 힐끔 보았다.
“어디로 데려가는 거지?”
“얼마 전에 기록실에서 뭔가 훔친 친구인데, 현장 검증을 해보려고 데려가는 중이야.”
트리슈의 말솜씨는 탁월했다.
“흐음…. 알겠다. 지나가라.”
“고마워, 오빠.”
가볍게 윙크를 하자 개의 머리를 단 수인이 헥헥 거리는 소리를 냈다. 빙긋 웃은 트리슈가 그 둥근 코를 슥슥 쓰다듬었다. 그러자 수인이 큰 꼬리를 흔들어,
“…. 너 대담하구나.”
린슬렛은 약간 질리는 걸 느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트리슈는 아무렇지도 않게 앞장서 나아가기 시작했다.
“원래 거짓말은 담대하게 해야 하는 법.”
“아무리 그래도 만지는 발상은 처음 봤어.”
“후후, 트리슈는 언제 어느 순간에나 대처법을 생각하고 있거든.”
부드럽게 웃은 트리슈가 굳게 닫혀져 있던 문을 열고 어둠 속으로 들어섰다. 책장 사이에 희미하게 불이 밝혀진 신비로운 공간. 검은 로브 차림의 사서들이 분주하게 그 안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멈춰섰다.
“…. 이건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리고 트리슈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눈앞에 서있는 ‘사람’을 보고 그녀는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는 듯 입술을 핥았다.
그리고 검은 코트를 입은 여성이, 그 목소리를 듣고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
이런 곳에서 만나자고 할 줄은 몰랐는데.
“와아…. 사람이 정말 많네요!”
앞서 나간 넬이 신기하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뒤를 조금 느긋하게 따르며 넬과는 달리 나는 수많은 인파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커다란 쇼핑몰이었다.
층을 완전히 구분해두지 않은 개방형 구조로, 1층에서 고개를 돌면 천장과 각 층의 난간이 훤히 보였다. 그 층마다 사람들이 난간에 가득했다.
그게 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왜 굳이 이런 곳에서 만나자고 한 걸까.
스톰은.
“넬, 너무 멀리 가지는 마라.”
“넵! 알겠습니다!”
멀리 가겠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로비 중간의 분수대 앞으로 가 벤치에 걸터앉았다. 일방적으로 약속 장소를 잡은 스톰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일단 모드레드에 대해 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또한 그녀가 ‘만나보라’고 했기 때문에 오기는 했지만.
뭔가 꺼림칙하다.
사실 녀석을 믿는가의 문제를 둘째치고서라도, 그 목소리에서 뭔가 불길한 감각을 느꼈던 것이다.
“….”
잠깐 그 상태에서, 주변의 사람들을 살폈다.
가족이나 연인,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내 앞을 지나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내 그 불길한 감각이, 아주 정확하게 맞아떨어졌음을 깨달았다.
그 너머,
사람들의 틈으로….
붉은 머리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