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편
<-- Chapter 4 : 파륜의 기사 -->
“….”
공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나는 통로로부터 막 빠져나오려던 넬과 발렌타인을 가로막듯이 섰다.
“함정 같은 거 없는데도 빙글빙글 돌아오기나 하고…. 너무 발버둥치는 거 아니야? 모드레드 양.”
헥터는 우리의 곁으로 다가오며 비릿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이힐이 대리석을 뭉개는 소리가 또각, 또각. 울려졌다. 그것 이외의 소리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거기에서 알아차렸다.
“필터…!”
그렇게 중얼거리고, 순식간에 몸이 움직였다. 나는 품안에서 튕겨져 나오는 마스크를 얼굴에 쓰고는 곧바로 뒤를 돌아보았다.
“넬! 커넥터 안으로!”
“네, 네넬?!”
“빨리!”
버럭 소리를 지르자 넬은 반쯤 압도된 상태에서 모습이 사라졌다. 나는 모드레드와 발렌타인이 가면을 쓴 모습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고개를 들었다.
“행동이 빠르시군요.”
“이미 겪어본 적이 있어서 말이지.”
나는 어이가 없어지는 걸 느끼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행동을 벌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왕궁 전체에 가스를 살포하다니.
“아, 지난번과 같은 종류는 아니라고요? 아무리 그래도 수간(獸姦) 같은 걸 보고 싶지는 않으니까. 단순히 잠재우는 정도에서 그쳤죠.”
그래서 이렇게 고요한 거였군.
“모드레드….”
나는 옆에서 무표정하게 서있는 그녀를 향해 물었다. 왕궁의 모든 사람이 잠들어있다면 퀘스트의 진행은 어떻게 되는 걸지 싶었던 것이다.
“발렌타인 씨…. 정보의 수집은.”
그렇게 잠깐 상황을 살피자니 이어서 모드레드가 뒤를 돌아보았다. 긴장한듯 어깨를 움츠리고 있던 발렌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해보고 올게요.”
“그렇다면 제가 시간을 끌겠습니다. 당신께서는 발렌타인 씨의 에스코트를.”
“뭐…?”
당황해 되묻자 모드레드는 품안에서 단검을 두 자루 꺼내들었다. 그녀는 우리를 비웃듯 서있는 헥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뭔가 생각이 있는 걸까.
“알았어. 금방 돌아올게.”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런 순간까지도 그녀는 냉정했다.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지며, 모드레드는 다음 순간 헥터의 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헥터는 웃고 있었다.
“흐응, 그렇게 나오기야? 모드레드.”
“…!”
목을 노리고 휘둘러진 검을 헥터는 가볍게 피해냈다. 뒤를 이어 무언가가 뱀처럼 단검의 날을 휘감았다.
채찍이다.
그것을 쥔 헥터가 팔을 휘두르자 모드레드의 손에서 단검이 빠져나왔다. 하지만 뒤를 이어 모드레드는 반대편에 쥐고 있던 단검을 투척했다.
푸른 궤적과 함께 그것이 헥터의 얼굴을 스쳤다. 하지만 그녀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씨익 웃었다.
두 기사의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자, 발렌타인.”
나는 거기서 시선을 돌리며 발렌타인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는 곧장 아까 봐둔 문으로 향해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보여?”
“자, 잠시만요.”
내부는 도서관이었다.
어둠에 잠긴 가운데, 높게 솟은 책장 사이사이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발렌타인은 팝업창을 두드려 뭔가를 확인했고 이내 안쪽으로 들어섰다.
그 뒤를 따르려던 나는 다시 바깥을 내다보았다.
전투는 누구 하나 밀리지 않고 팽팽했다. 모드레드는 단검을 날리거나 순식간에 안으로 파고들었고 헥터는 원거리에서 채찍을 휘둘러 그것을 봉쇄했다.
“타나님…!”
바로 그때,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이럴 때가 아니다.
나는 고개를 휘휘 내젓고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모드레드가 걱정이었지만 그걸 위해서라도 최대한 빨리 갤러해드에 대한 정보를 찾아내야만 했다.
발렌타인은 책장 사이에 서있었다.
“보여?”
“아, 아뇨! 죄송해요…. 보이질 않아요!”
그녀는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잠깐 입을 다물고 있던 나는 이내 앞머리를 매만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뭘 미안해. 같이 생각해보자.”
일단은 잠깐 진정을.
채찍이 휘둘러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몇 번이고 울려퍼졌다. 하지만 나는 애써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그리고는 일단 책장의 책을 한 권 뽑아들었다.
날짜가 적힌 채다.
2039년 4월 27일.
“날짜별로 모든 데이터를 저장해둔다는 건가…?”
아니 그렇게 되면 단순히 사서는 도서 검색기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라는 걸까.
“발렌타인, 책장 끝에 가서 같은 줄에 있는 책의 날짜를 확인해줘.”
내 지시에 고개를 끄덕인 발렌타인이 책장 끝으로 향했다. 나 역시 그녀의 반대편 끝으로 향해 책을 뽑았다.
4월 27일.
“4월 27일이요!”
“그 아랫줄은?”
“이건…. 28일이요!”
내 쪽에 있는 책도 28일이다.
말인즉슨 한 줄은 하루의 기록을.
책장 하나는 한 달의 기록이 모여있다는 걸까.
생각을 확인하기 위해 나는 반대편의 책장에서 책을 뽑아들었다. 39년 3월 28일이라고 적혀져 있었다.
“…. 발렌타인, 이 쪽으로.”
잠깐의 생각 후, 나는 곧바로 책장을 지나쳐 달렸다. 지금으로부터 4년 전인 36년으로 숫자를 세며 향했다.
날짜는 5월.
내가 갤러해드를 만났던 때로.
“….”
그리고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그것이 전투에 돌입한 모드레드에 대한 생각으로 뒤덮여 나는 곧바로 책을 한 권 뽑아들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팔을 넣어 후려치듯이 책들을 땅으로 떨어뜨렸다.
“타, 타나님?! 아…?!”
놀라 소리치는 듯싶던 발렌타인이 이윽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책장 사이에 떨어진 수십 권의 책들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보여?”
“네, 네! 보여요!”
“어디쯤이야?”
“저기…!”
그녀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책을 가리켰다. 나는 그곳을 기점으로 위와 아래의 책들을 뽑아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양장본이 둔탁하게 부딪치며 이내 펼쳐졌다.
“네! 조금만 더요!”
이어진 지시에, 나는 책장 사이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리고 곧바로 스킬을 시전 했다. 날개처럼 왼쪽 어깻죽지에 피어오른 뼈가 원형의 방패로 뒤바뀌었다.
반대편의 책장에 발을 걸치고,
“…!!”
나는 앞으로 튕겨져 날아갔다.
탄환처럼 쏘아져 날아간 몸이 책장들을 박살냈다. 그 사이에서 튕겨져 날아오른 책들이 땅에 떨어졌다. 그리고 그 충격을 이겨내지 못한 책장들이 움찔거리며 쓰러지기 시작했다.
“윽…!!”
바로 그 순간, 발렌타인의 신음이.
아주 미약한 소리였으나 나는 그것을 분명히 잡아냈다. 몸을 회전시켜 착지한 나는 곧장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발렌타인!”
발렌타인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였다. 나는 괴롭다는 듯 숨을 몰아쉬고 있는 그녀를 부축했다.
“괘, 괜찮아요! 잠깐 어지러워져서….”
고개를 휘휘 내저은 발렌타인이 이내 내게 기대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더니 이내 의아한 얼굴로 몇 번이고 눈앞의 무언가를 응시했다.
내게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저, 타나님…?”
잠시 후, 그녀는 의아한 기색으로 날 불렀다.
“퀘스트가 뜨질 않는데요?”
“뭐?”
“아니, 이만큼의 정보를 모았는데도…?”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아예 팝업창을 띄우고 조작을 거듭했다. 나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퀘스트가 아예 안 뜬다고?”
“네! 조건은 분명히 충족되었는데…!”
바로 그 순간, 폭음이 들려왔다.
놀라 고개를 돌린 나는 벽을 박살내고 날아드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돌의 파편이 마구잡이로 튀어 나는 발렌타인을 안아든 채 옆으로 몸을 날렸다.
“꺅?!”
“큭!”
그녀를 바닥에 눕힌 채 나는 몸으로 날아드는 파편을 견뎌냈다. 불똥이 튀는 것처럼 짧은 통증이 몇 번이고 스치고 나는 이내 고개를 들었다.
“…! 모드레드!”
무너진 책 더미 사이에 깔린 모드레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정신 차려! 모드레드!”
“아흑…. 윽…!”
그녀의 팔은 심할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설마 약에…?!
상처는 없었는데도, 온몸은 식은땀으로 범벅이었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단검을 쥐려고 했으나 이내 버텨내지 못하고 떨어뜨렸다.
“하아, 웬일로 버티나 했는데.”
그리고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유로운 음색에 나는 분노로 몸을 물들인 채 뒤를 돌아보았다. 빛이 쏘아져 들어오는 구멍 너머에서 헥터가 모습을 드러낸 채였다.
“헥터!”
“어머나, 헬레나라는 좋은 이름도 있는데….”
킥킥 웃으며 중얼거린 그녀가 이내 안으로 들어섰다. 무너진 돌의 잔해를 해치며 헥터는 뭔가를 손에 쥐고서는 이쪽으로 휙 던졌다.
그리고 그게 폭발했다.
“큭!”
그 충격에 남아있던 책장들이 도미노처럼 쓰러지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모드레드를 안아들고 옆으로 몸을 피했다.
“젠장…!”
하지만 그 충격에 바닥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발렌타인의 위치를 확인하고는 그 곁으로 다가갔다. 비틀거리던 그녀는 내 팔을 잡고서 버텨냈다.
어떻게 하지?
일단은 탈출을 해야 하나?
하지만…! 목적도 이루지 못했는데…!
“도망치지 말아요. 타나토스. 당신에게 이야기해줄 아주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고요?”
“윽…. 크흣…!”
내 품안에 있던 모드레드가 괴로운 듯 발버둥 쳤다. 조그마한 몸이 가누어지지 못하고 고통에 몸부림치자 나는 이를 악물고 헥터를 노려보았다.
“모드레드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오늘은 딱히. 단순히 약물 후유증일 뿐인데요.”
“개소리 지껄이지 마!”
“어머나, 진실은 안 믿으시네.”
킥킥 웃는 그녀가 이내 내 쪽으로 무언가를 집어던졌다. 뭐지 싶으면서도 뒤로 물러서려던 나는 이내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정말이에요.”
모드레드가 손을 뻗었던 것이다.
우리의 발밑으로 굴러들어온 주사기를 향해.
“…. 모드레드?”
조심스럽게 이름을 불렀으나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는 대신 이를 악물며 그렇게 뻗은 자신의 손을 다른 손으로 세게 잡아냈다.
그리고 보기 싫다는 듯 내 품속으로 얼굴을 묻었다.
“허억, 허억….”
모드레드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몸을 파르르 떨며 공허한 눈동자가 위험할 정도로 진동했다. 꽉 깨문 입술에서 피가 방울지며 흘러내렸다.
“그녀는 단골이었어요. 저희 가게의.”
“그, 건….”
“네, 섹스 앤 드러그.”
한순간 시간이 정지한 기분이었다.
모든 퍼즐이 끼워 맞춰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쥬브나일 포르노에서 만났을 때 손을 떤 것.
그리고 내가 헥터에게 납치를 당하자 곧바로 위치를 파악한 것….
내가 주사기에 찔리자 몹시도 당황했으며,
뭔가로 인해서 계속 고통스러워 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는 재킷을 언제나 입고 있기 때문에.
“아니, 제 가게라는 사실은 몰랐겠죠. 그걸 알고서도 그랬다면 냉장고 이하의 지능이니까.”
헥터는 미소를 지으며 우리의 곁으로 다가왔다.
더없이 여유로운 태도로.
그 쾌락을 파는 악마의 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