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편
<-- Chapter 4 : 파륜의 기사 -->
“….”
넬이 놀란 듯 입을 다물었다. 그런 반응에 모드레드는 곧이어 데이터 차트로 보이는 무언가를 정리하고 곧바로 무언가를 품안에서 꺼내들었다.
주사기였다.
“혈액을 좀 채취하겠습니다.”
“자, 잠깐.”
나는 놀라 엉덩이를 떼며 뒤로 물러섰다. 가까이 다가오던 모드레드와 시선이 맞닿은 채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뭘 하려는 거야?”
“단순한 신체검사입니다.”
“…? 아니, 왜?”
“헥터의 약물이 신체에 침투했는지 검사하는 겁니다.”
“아니, 그….”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되지?
“그건 가상에서 있었던 일이잖아?”
“하지만 헥터의 스킬은 진짜였죠.”
“그게 현실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거야?”
“물론입니다. 재킷을 입은 상태로 한정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신체에 계속해서 영향을 끼치죠.”
“…. 어쩌지.”
“해독약도 없고, 들어가지 않기만을 바래야죠.”
남의 일처럼 이야기한다.
물론 남의 일이 맞기는 하지만, 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더없이 당황스러운 걸 느끼며 재킷을 벗고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러자 그걸 모드레드의 작은 손이 쥐었다.
일단 가볍게 팔을 쓸어 피를 모은는가 싶은데.
“….”
“모드레드?”
“아, 아닙니다.”
팔을 쥔 채로 굳어져 있던 모드레드가 다시금 동작을 이어나갔다. 그녀는 품에서 고무줄을 꺼내 내 팔에 묶고 조심스럽게 주사기를 꽂아 넣었다.
투명한 원통에 조금씩 혈액이 담기기 시작했다.
“…. 다, 됐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혈액을 반쯤 담은 주사기를 뽑은 그녀가 뒤로 돌아섰다. 약간 찝찝했지만 휴지나 알코올 솜 같은 게 있어보이진 않아 나는 그냥 옷을 입었다.
“이걸로 끝인가?”
“아뇨, 한 가지 작업이 더 남아있습니다.”
그렇게 중얼거린 그녀가 몸을 돌렸다. 하지만 뒤를 이어, 한 번 크게 비틀거리고는 중심을 잃고 쓰러지려 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다가갔다.
“아….”
뒤쪽에서 받쳐 드니 조그마한 몸집이 느껴졌다. 50kg도 안 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큼지막한 마름모꼴의 판초가 차라리 더 무겁겠다 싶을 정도로.
“괜찮냐?”
“아, 음….”
볼이 창백하게 물든 와중, 모드레드의 이마에 땀이 맺힌 것이 보였다. 어딘가 아프기라도 한 걸까.
“아니, 괜찮습니다.”
“정말로?”
“…. 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중얼거린 그녀가 나를 휙 쳐내듯 일어서려다, 이번에는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야, 너?!”
나는 당황해 몸을 쓱 내밀어 바닥과 정면으로 충돌하려는 모드레드를 받아냈다. 그녀는 제대로 목도 가누지 못하고 내 가슴에 고개를 파묻은 채였다.
뭔가 명백히 이상하다.
“왜 그래…?”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눈빛이 반쯤 맛이 간 채였다.
숨소리가 거칠어, 나는 얼굴을 파묻은 상태에서 조금 드러난 모드레드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뜨겁….
“정, 액….”
하지만 그녀는 내 손을 쳐냈다.
“네?”
그리고 이상한 소리를 했다.
“정액을, 채취해야 합니다.”
“….”
나는 몸이 굳어지는 걸 느끼며 모드레드를 바라보았다. 멍하니 올라타있던 그녀가 갑자기 내 허벅지 쪽을 손으로 더듬기 시작했다.
“도와, 드릴 테니….”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깜짝 놀란 나는 모드레드의 손을 휙 잡아서 들었다.
“아흑?!”
하지만 갑자기 팔이 들리자 그녀는 통증을 느낀 듯 신음소리를 냈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모습에 나는 몸살 기운이 있다는 확신을 했다.
“하아….”
아니 일단, 이럴 때가 아니다.
“넬.”
“네, 넬?”
“근처에 병원으로….”
나는 모드레드를 팔로 받친 채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뒤를 이어 그녀가 고개를 내저었다.
“안, 됩니다….”
“어 그럼, 고양이 진료소 같은 곳으로?”
“그곳, 도….”
“아니 그럼 뭐 어쩌자는 거야?!”
“으음…. 하룻밤 주무시면 좀 낫지 않을까요?”
가까이 다가온 넬이 모드레드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안색은 창백하고, 몸은 불덩이 같으며 식은땀이 흐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일단 단순한 감기는 아니신 것 같아서요.”
“이게…?”
“네에,”
“끄응.”
나는 절로 그런 소리가 나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내 모드레드를 안아든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
그녀는 반쯤 정신을 놓은 듯했다. 나는 완전히 새하얗게 물든 주변을 둘러보았다.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 이런 곳에 산다면 없던 병도 다 걸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가자, 넬.”
“어디로요?”
“집이지 어디긴 어디야.”
그렇게 이야기한 나는 곧바로 방을 나섰다.
풍경이 죽은 방을.
◇
“…. 준?”
그런 목소리에 나는 몸이 쩌적 굳는 걸 느꼈다.
부스럭 대는 소리에 잠이 깬 걸까. 갑작스레 불이 휙 켜지더니 유하가 방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모드레드를 막 침대에 눕힌 참이었던 나는 삐걱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졸린 눈의 그녀가 모드레드를 손으로 가리켰다.
“…. 그 분은?”
“모, 모드레드…. 인데.”
그렇게 밖에 설명할 수가 없었다.
“왜, 저희 집에?”
“아니 그, 음….”
식은땀이 뻘뻘 흐른다.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하지? 지금의 상황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모드레드와 유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 사이에 있는 넬은 남의 일이라는 듯 한숨을 내쉬며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어서.
“저랑 잠깐 이야기 좀 하죠.”
“네.”
싸늘한 목소리에 나는 포기하고 그녀를 따라나섰…. 아니 그러려다 다시 돌아서 모드레드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아까보다는 조금 안정된 상태였으나 그녀는 아직도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채 잠에 빠져있었다.
“넬, 미안하지만 이 녀석 좀 봐주고 있어줘.”
“네넬, 주인님도 힘내세요.”
힘내라는 말에 어쩐지 더 긴장이 되는 이유는 뭘까.
“….”
“준?”
“지, 지금 갈게.”
머릿속이 복잡한 와중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와, 나는 앞서 나간 유하를 따라 1층으로 내려갔다.
“커피 드실래요?”
“어, 음…. 한 잔?”
“저도 마셔야겠네요.”
목소리가 차갑다.
가게에 불을 켜고, 유하는 에스프레소 머신을 예열하기 시작했다. 맞은편의 높은 의자에 앉자 안으로 들어선 유하가 앞치마를 두르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 무슨 이야기?”
“커피 마시면서 이야기해요.”
“네.”
나는 얌전히 대답했다.
머신이 예열을 마치고, 그녀는 에스프레소를 뽑아 나에게, 자신은 카푸치노를 타서 자리에 앉았다. 진한 커피의 향이 올라와 피곤한 뇌가 깨어나는 듯했다.
“일단, 준?”
그리고 유하가 말을 꺼냈다.
“응.”
“이유를 설명해주겠어요?”
“…. 저 녀석 몸이 좀 안 좋은 것 같아서.”
거짓말을 할 수는 없겠다 싶어 나는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어 컨테이너 박스나 다름없던 방과 거기에서 쓰러진 모드레드에 대해서.
근데 거기에 그냥 두고 나오는 건….
“이불 한 장 제대로 없는 곳이었거든. 그래서….”
조금 마음이 걸렸던 것이다.
“역시 그랬군요.”
역시?
“준이라면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의아해 바라보자, 유하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는 카푸치노를 한 모금 마셨다. 입술에 맺힌 크림을 부끄럽다는 듯 닦아낸 그녀가 이내 약간 멍해져 있는 내손을 잡았다.
“준이 나쁜 의도로 여자아이를 데려오는 사람은, 절대 아닐 거라고 믿고 있으니까요.”
“유, 유하….”
나는 눈물이 핑 고이는 걸 느끼며 중얼거렸다. 오해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눈앞의 여성이, 다짜고짜 화를 내는 성급한 성격이….
“그건 그렇고, 집에는 왜 찾아간 거죠?”
“네?”
맞았다.
“이 한 밤 중에, 이 누나에게 아무 말도 없이 이 집을 빠져나가서 저 집으로? 혼자 사는?”
“아니 혼자 산다고는 한 마디도….”
꽈아아악.
“유, 유하?! 조, 좀 아픈데에에…?!”
“그럼 여러 명과 사는 건가요?”
“아,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럼 혼자 사는 여성의 집에, 준은 새벽에 혼자서 찾아갔다는 거네요?”
꽈아아아아아악.
“으, 으윽…!”
굉장한 악력이다.
거의 프레스로 짓누르는 듯한 악력이 느껴졌다. 하지만 반대편의 유하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이 그저 생글생글 웃고 있을 뿐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건가요?”
“죄, 죄송합니다….”
그렇게 대답하자 힘이 누그러졌다. 손이 지릿지릿 저리는 걸 느끼며 고개를 드니 유하가 눈썹을 찌푸린 채 나무라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준도 어른이니까. 알아서 잘 할 거라고 믿지만.”
“으, 음.”
“그래도 너무 걱정시키지는 말아줘요.”
“…. 미안해.”
나는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스스로는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하의 불안한 감정을 모르지는 않았다.
외면한다는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다.
“조금만 기다려줘.”
이번에는 반대로 내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준?”
“누나한테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
유하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하지만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그녀를 보며 말을 이었다.
“언제나 감사하고 있어.”
“비, 비겁해요, 준은.”
“…. 응?”
약간 예상외의 대답이 돌아오자 나는 놀라 되물었다. 무릎 위에 올려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그녀가 조금 엉덩이를 당겨 앉았다.
무릎이 맞닿았다.
“그, 그런 믿을 수밖에 없는 얼굴로 이야기하면….”
“내, 내 얼굴이 그랬어?”
“네, 음…. 저도 뭐라고 말은 잘 못하겠지만….”
조금 얼굴이 가까워지지 않았나.
“….”
아니 근데 좀,
“유하….”
뭐 어떠랴 싶기도 해서.
“주인님…?”
바로 그 순간,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으, 으음?”
흠칫 놀라 유하와 나는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애써 침착하게 고개를 돌린 나는,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넬을 보고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왜, 왜?”
“갑자기 생각난 게 있어서 그런데…. 호, 혹시 넬이 방해했나요?”
“아니야.”
“그, 그래요! 넬!”
내 말에 뒤를 잇듯 유하가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거기에 넬은 안심한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