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편
<-- Chapter 4 : 파륜의 기사 -->
◇
가상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기분은 언제나 각별했다.
뜨겁게 달아오른 뇌가 서서히 식어가는 듯한 감각이었다. 마치 뇌가 하나의 컴퓨터라면 거대한 쿨러를 작동시킨 듯했다. 헥터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옆에 두었던 얼음이 녹은 보드카를 한 모금 마셨다.
물이 섞여 부드러운 맛이 느껴졌으나 취향은 아니었다. 이런 점은 가상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마시고 원하는 맛과 향을 상상하면 자연스럽게 뇌가 동작하니까.
“하지만 뭐, 이것도 나름대로 풍미가 있네.”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웃었다. 넓은 호텔방, 연노란색의 미등이 그 얼굴을 희미하게 비추었다. 그녀는 반짝거리며 잔의 안에서 부유하는 액체를 들여다보다 이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약속을 하긴 했는데…. 그게 언제였더라?
그렇게 생각하자 뒤를 이어 디멘션 커넥터가 1시간이 지났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녀는 ‘지났다.’라는 말에 자신이 모르는 다른 용법이 있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일단 가슴이 푹 패인 실크 재질의 드레스 위에 숄을 걸치고 방을 나섰다.
바닥에 깔린 카펫으로 인해, 높은 힐이 땅을 디디는 소리는 묻혀서 들리지 않았다. 긴 복도를 걸어 엘리베이터로 향하며 그녀는 위로 올라가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감정을 디멘션 커넥터가 캐치해, 호텔에 있는 서버에 통신을 보내 엘리베이터를 호출했다.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 기다림 없이 문이 열렸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잘생긴 보이가 그녀를 반겼다. 명백히 가상의 인물, 그녀는 싱긋 웃으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서비스가 역시 초일류 호텔답단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말을 않고 기다리자 엘리베이터는 자연스럽게 최상층으로 향했다. 부드러운 음악이 들려오기 시작하고 그녀는 이내 문이 열리는 걸 확인했다.
천장이 훤히 뚫린 것처럼 연출을 해두어, 서울 시내의 야경을 즐길 수 있는 바. 마찬가지로 가상의 존재가 맞이해 헥터는 자리에 멈춰 섰다.
“예약을 해두었는데.”
“…. 아 헬레나님. 일행 분들은 먼저 와계십니다.”
이쪽으로. 라고 짧게 중얼거린 남자가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발소리까지 충실하게 재현되는 모습에 헥터는 그 뒤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섰다.
칸막이로 구분된 개인실.
“…. 오셨습니까.”
그 안쪽에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안쪽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무쇠로 단단하게 만들어진 흉상 같은 사내. 그리고 바깥쪽에는 마찬가지로 팔짱을 끼고 있는 여성이.
“미안, 일이 좀 있어서.”
“어차피 또 가상에서 계셨던 거 아닙니까?”
“후후, 미안해. 대신 술은 내가 낼 테니까.”
“괜찮습니다.”
붙임성도 없어라.
헥터는 그렇게 생각하며 여성을 바라보았다. 딱딱한 목쇨, 길게 길러 하나로 묶은 머리. 검은 코트에 스스로 한 자루의 검인 것처럼 꼿꼿한 자세.
재미없는 사람이라는 느낌이다.
“본론을 바로 말씀해주시죠.”
“음~ 아니 그 전에, 이쪽의 오빠는 왜?”
헥터는 단호하게 중얼거리는 우아랑의 말을 피하듯 그 옆의 라이오넬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는 그는 마찬가지로 코트 차림이었다.
어둠에 묻혀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는데.
입밖으로 절대 낼 수 없는 생각을 하며 그녀는 라이오넬이 거대한 팔을 움직이는 걸 보았다.
“….”
그리고 그는 서비스로 나온 조그마한 초코볼을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마치 새 모이를 집는 모습이다. 병사들에게 가져다주고 싶은 거겠지.
“음, 뭐 좀 테이크아웃 해 갈래요? 애들 주고 싶으면.”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물었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함께 따라온 이유를 묻는다 하더라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충 예상은 가지만.
“우 대위님을 이렇게 모시게 된 이유는….”
그녀는 살짝 메뉴판을 열어 마시고 싶은 술을 주문하며 뜸을 들였다. 반대편의 우아랑이 눈썹을 찌푸렸다.
“물론 갤러해드 퀘스트와 관련이 되어서죠.”
“어떤 관련이 말입니까?”
목소리가 날카롭다.
“회장님 쪽에서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거든요.”
“…?”
“타나토스가 갤러해드가 된다는 뜻이죠.”
우아랑은 어이가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뒤를 이어 표정에 깊은 혐오감이 깃들었다.
“역시 그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의 모친께서?”
“우정현 회장이 말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우아랑의 눈빛에 살기가 깃들었다. 마치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가족으로도 생각하지 않는 듯한 대답에, 헥터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항상 그런 식이었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짓만 계속해서….”
자신의 모친이, 말했던 것과는 달리 뒤에서는 여전히 다른 꿍꿍이를 내비치고 있다. 그런 사실에 적잖이 혐오감이 든 모양이었다.
물론 겉으로는 말했지.
적당한 때가 되면 자신이 지니고 있는 모든 기술의 양도를 약속하고, 향후 할 킬러즈의 정세 안정화 계획에 있어서 전면적으로 협조할 마음이 있다고.
하지만 그걸 그대로 믿는 바보가 실존할 줄이야.
“아니 뭐.”
‘정세 안정화 계획’을 있는 그대로 믿는 것부터가 이미 바보임을 증명한 셈인가.
“네?”
“아, 아뇨. 그래서 뭐 좀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
우아랑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헥터는 황급히 웃어보였다. 그리고 뒤를 이어 바깥에서 실례한다는 목소리와 함께 종업원이 술과 과일을 가지고 들어왔다.
“어머, 좀 드시면서 얘기할까요?”
“….”
“아이, 그렇게 인상 찌푸리고 있으면 예쁜 얼굴 다 버린다고요?”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질 않았다.
헥터로서는 알코올을 인간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보기에 가장 좋은 재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시킨 것이지만…. 아무래도 보기는 요원하지 싶었다.
“왜 굳이 갤러해드가 되시려는지?”
때문에 다시 본론으로.
“그거야 물론 안정화 계획의 중추에 참여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그게 전부에요?”
“….”
우아랑의 표정이 비뚤어졌다.
이렇게 가볍게 운을 떠봐도 강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역시 놀리는 맛이 있단 말이지.
“소문에 의하면, 랜슬롯에게 꽤나 깨졌던 모양인데.”
“그것과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차갑게 말을 내뱉은 우아랑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옆에 있던 라이오넬 역시 그 뒤를 따랐다.
“그런 이야기를 하시려는 거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타나토스에 관해서 흥미로운 정보가 있으면 또 알려줄게요오.”
“….”
혐오가 담긴 시선.
두 사람이 이내 바에서 모습을 감췄다.
재미없어.
그런 생각을 하며 헥터는 가볍게 잔에 술을 따랐다. 하지만 조그마한 딸기를 입에 물며 그녀는 저도 모르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 남자는 좀 재미있겠지 싶어서.
◇
“주, 주인니임….”
넬이 어깨에 들러붙은 채였다.
공중에 떠오른 채, 그녀는 겁에 질려 내게 꼭 붙었다. 재킷이 자동으로 꾹 조여지며 팔이 잡힌 듯한 감각을 선사했고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봐도 사람이 살만한 곳은 아닌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볼을 벅벅 긁었다. 집에서부터 꽤나 멀리 떨어진 시 외곽의 쓰레기 처리장. 일단 오라고 해서 오기는 했는데 놀림당하는 기분이다 .
상식적으로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살 리가 없잖아.
각종 생활 쓰레기들이 조그마한 동산만큼이나 쌓인 채였다. 그게 여기저기에 몇 덩이나. 썰매를 타고 놀아도 되겠다 싶을 정도였다. 중간에 나온 냉장고에 가랑이를 부딪치거나 할 것 같았지만.
“모, 모디님은 이상한 것 같아요!”
“이제 알았냐.”
“뭘 이제 알았냐는 겁니까?”
내 대답에 뒤를 이어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나는 높은 쓰레기 더미 위에 져있는 자그마한 그림자를 보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씀하신대로, 왔는데.”
“이쪽으로.”
무뚝뚝하게 중얼거린 모드레드가 뒤로 돌아섰다. 잠깐 눈앞의 쓰레기를 발로 밟아본 나는, 생각보다 단단하다는 생각에 그대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유, 유령이라도 나올 것 같아요오….”
“어떻게 보면 네가 유령이잖냐.”
“아! 너무해요!”
“….”
무시하자.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계속해서 모드레드의 뒤를 따랐다. 판초 위에 후드를 뒤집어쓴 검은 인영이 경사를 타고 내려가 쓰레기의 진원지로 보이는 장소로 향했다.
그리고 그 주변을 가볍게 헤쳤다. 재킷을 입고 있기 때문인지 냉장고를 휙 걷어차자 무슨 만화처럼 회전하며 옆으로 넘어갔다.
“….”
그 밑에는 바닥 문이 있었다.
“여기서 사시는 겁니까?”
“네.”
무뚝뚝하게 중얼거린 모드레드가 문을 열고 아래로 훌쩍 들어갔다. 희미하게 빛이 들어와 나는 넬과 함께 아래쪽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꽤나 깊군.
“또 헥터가 있는 곳으로 가는 건 아니겠지…?”
“주인님…. 현실과 가
상의 구분이 불가능해지셨군요.”
“그건 원래 그랬고.”
나는 옆에서 놀리듯 바라보는 넬을 무시한 채 구멍 안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사다리 같은 게 보이지 않아 에스콰이어만이 오르내릴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가볍게 착지.
고개를 들자,
“음….”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보였다.
살풍경하다 못해 풍경이 태어나지도 않은 것 같았다. 온통 새하얀 가운데 문고리만이 휑하니 벽에 그려진 듯한, 그런 괴상한 구조의 방이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그리고 그 가운데, 그녀만이 검정색이었다.
“여기서 먹고 자고 한다고…?”
“? 그렇습니다만.”
“….”
사람이 사는 곳이 맞나.
“일단 자리에 앉아주시겠습니까?”
“어딜, 요?”
“아무 대나 적당히 앉아주시면 됩니다. 그렇게 크 장비가 들어가는 검사도 아니기 때문에.”
끄응.
나는 별 수 없이 적당히 중간쯤에 앉았다. 진짜 거짓말이 아니고 전기 코드 하나 보이지 않는 황폐한 방이었다. 어떻게 이런 곳에 산다는 건지.
아니 그 전에,
“…. 회장님은 여기 사는 거 알아?”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뭐라고 안 해?”
“….”
모드레드는 시선을 피한 채 디멘션 커넥터의 창을 띄우고 두드렸다. 괜히 머쓱해져 나는 옆에서 마찬가지로 무릎을 꿇고 앉은 넬을 돌아보았다.
“이곳은, 정보량 송신 합금으로 만들어진 곳이군요…?”
그녀가 신기하다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말에 나도 다시 한 번 주변의 벽을 살펴보았다.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