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편
<-- Chapter 4 : 파륜의 기사 -->
◇
“저, 주인님.”
어두운 공간, 넬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보니 그녀는 머뭇거리는 기색이었다. 뭔가를 어려워한다는 느낌에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아니 그, 음…. 제가 해도 될 말일지 모르겠는데요.”
“어떤 게?”
“해석된 데이터가 조금 이상해서요.”
그렇게 중얼거린 그녀는 인상을 찌푸린 채 무언가를 눈앞에 표시했다. 각종 코드와 데이터들이 악보처럼 검은 화면에 흰 글씨로 표시된 것을 보며 나는 이해가 되질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어떤 의미에서?”
“보통 이런 부분을 해석하라며 넘기시나 싶어서요.”
거기에 내가 다시금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건 어떻게 보면 모디님이 만든 갑옷인데요….”
넬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키보드를 띄워 가볍게 데이터를 매만졌다. 구축된 식에 값을 입력하자 어떤 결과 값을 산출해내는 걸 보며…. 나는 여전히 이해를 못했다.
“보통 이런 걸 가상 세계에서 함부로 내보이지는 않거든요. 그래서 무슨 이유가 있으신 건가….”
“갑옷이라는 게, 방화벽 같은 거야?”
“네, 그런 셈이죠. 가상 세계는 문자 그대로 0과 1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만큼 해킹에 무력화되기 쉬우니까 이런 식으로 방화벽을 만드는 게 보편적이거든요.”
“그리고 모드레드는 그걸 직접 만들었다?”
“그런 거죠. 코드가 무척 복잡하고 정교해서 시험 삼아 해봤는데 넬도 뚫는데 10여분 정도 걸렸어요.”
“…. 그게 복잡하고 정교한 거냐?”
“넬은 생각보다 똑똑하다고요? 주인님.”
전혀 안 그래 보이는데.
하지만 말과는 달리, 나는 눈앞에 서있는 조그마한 여자애한테 약간 경외감을 느꼈다. 새하얀 머리를 하나로 땋아 묶어서, 순수하게 웃고 있는 얼굴의 뒤에 얼마나 많은 지식이 축적되어있는 것일까.
“대단하죠오~?”
전혀 믿기지 않았지만.
“아무튼 그래서, 모드레드가 너한테 왜 이걸 해석하라면서 준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야?”
“네넬! 왜냐면 넬은 이제 주인님이 말씀만 하시면 모드레드님의 디멘션 커넥터와 가상 세계에서의 아이덴티티를 멋대로 조작할 수 있으니까요.”
“흐음.”
그러고 보니 그건 좀 이상하군.
나는 턱을 괸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모드레드의 행동은 확실히 어딘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 그냥 넬에게만 건넨 거면 몰라도 그녀는 이 데이터를 건네줄 때, 분명히 나에게도 소양이 있느냐며 물었다. 말인즉슨 처음에는 나에게 넘기려고 했다는 건데.
무슨 이유로?
그녀는, 내가 자신의 디멘션 커넥터를 조작할 만한 일이 생길 거라는 예감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맞습니다.”
바로 그 순간,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모디님!”
거기에 고개를 돌린 나는, 뒤를 이어 환하게 웃은 넬이 모드레드를 향해 다가가는 걸 발견했다. 데이터를 해석한 일로 인해 뭔가 친근감을 갖게 된 걸까.
“이제 넬 씨는 제 모든 부분을 통제할 수 있죠.”
“히잉!”
모드레드는 아무렇지도 않게 넬의 얼굴을 잡고 밀어냈다. 그냥 놔둘 줄 알았더니 선을 딱 긋는군.
“…. 그럼 생각보다 별 거 아닌 거 아니야?”
“아뇨, 사람이나 평범한 인공지능이 뚫기에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녀석이 검정 판초를 가볍게 흩날리며 중얼거렸다.
“넬이니까 가능한 거죠!”
“…. 그래?”
“네! 하지만 주인님이 명령하시더라도 확실히 법치와 도덕에 의거하여 수행할지 말지를 정하겠습니다!”
넬은 신이 나서 떠들고 있다.
특기(?)가 발휘되어 그러는 것일까. 나는 눈을 반짝이며 신이 나 모드레드의 주변을 떠도는 녀석을 조용히 웃으며 바라보았다.
“주인님이 가상 세계의 모디님한테 야한 옷을 입히라고 지시를 해도 절대 들어주지 않을 거니까요!”
“….”
곧장 굳어졌지만.
“음, 그래도 수영복까지는…. 어떠세요?”
“모드레드가 듣고 있잖아.”
“아니, 괜찮습니다만.”
이 여자도 이상해.
“아, 그러시다면~.”
“네, 넬?!”
내가 당황해 소리쳤으나 넬은 개의치 않고 눈앞에 띄운 데이터를 다시 조작했다. 잠깐의 과정이 자나가고 이내 모드레드의 몸에서 새하얀 빛이 일어나더니,
“일단은 수영복부터?”
“….”
감색의 원피스 수영복으로 뒤바뀌었다.
“좀 더 시대상에 맞추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쪽이 걱정인 거냐고.”
나는 당황해 시선을 둘 곳을 못 찾은 채 중얼거렸다. 모드레드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몸을 확인하고 있다. 발육이라고는 거의 없는 몸, 가녀리고 창백하게 뻗은 팔과 다리가 눈앞에서 한 바퀴 빙글 돌았다.
“그럼 이건 어떠세요?”
나는 이제 말릴 기운도 없었다.
“괜찮은 것 같습니다. 빅토리아 시대의 메이드복 정도면, 유저들 간에서는 인기가 많은 옷이니까요.”
뭘 그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품평하고 있는 건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뒤바뀐 옷을 확인하는 모드레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무감정한 얼굴인 채, 검은 원피스와 프릴이 달린 앞치마를 살펴보았다.
“사실 좋아하는 거 아니냐. 그런 옷.”
“….”
그러자 곧바로 반응이 돌아왔다.
이쪽을 가만히,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는 모드레드의 모습에 나는 약간 놀라움을 느꼈다. 평소에 그녀가 내 말에 이런 식으로 반응을 보인 적이 있었던가.
“그럴 리 없잖습니까.”
“그, 그래?”
“네, 이렇게 분위기에 맞춰야 다른 NPC나 사람들 사이에 몸을 숨기기에 편하니.”
효율의 문제다.
모드레드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니 옆에서 비슷한 옷을 입은 넬이 가볍게 그녀에게 안기…. 지 못하고 얼굴이 밀쳐졌다.
“모디님…! 히잉!”
“조금 있으면 발렌타인님도 오실 겁니다. 그때까지 잠시 기다리는 걸로 하죠.”
“그,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니 다시금 그녀는, 자신의 세계에 빠져들어 눈앞에 팝업창을 띄우고 무언가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
뭘 저렇게 하는 거지.
“주인님, 주인님.”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옆에서 다시 넬이 말을 걸어왔다. 모드레드와 같은 차림인 채로.
“…?”
“주인님은 어떤 옷이 좋으세요?”
“지난번 그거면 됐어.”
“그래도 같이 다닐 거면 좀 어울리는 편이?”
“아무도 신경 안 쓸 텐데.”
“그래서 그 시대에 맞춘 신사 정장을 준비했습니다!”
안 듣고 있군.
“마음 대로 해.”
“헤헤, 정 부탁하신다면.”
웃으며 이야기한 넬이 가볍게 내 옷을 변형시켰다. 정장에 보타이, 무릎까지 오는 코트와 중절모
그리고 콧수염까지.
“….”
“진짜 귀족 나리 같으세요!”
“그렇군.”
내 감상은 그것이었다.
“아 주인님, 이것도.”
그리고 넬은 조신하게 지팡이를 건네주었다. 잠깐 고민하다 그것을 받아든 나는 이내,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모드레드와 시선이 마주쳤다.
뭐지?
무어라 말을 걸어볼까. 했으나 그녀는 다시금 눈앞에 떠오른 화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킥킥거리며 넬이 발꿈치를 들어 귓속말을 속삭였다.
“분며~엉, 멋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그럴 리가 있냐.”
나는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 세 분 다 옷차림이.”
그러자니 옆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분홍색 머리의 여성.
발렌타인이었다.
“와아, 발렌타인님!”
그러자 뒤를 이어, 넬이 다시금 그녀를 향해 훌쩍 달려들어 안겼다. 모드레드와는 달리 발렌타인은 피하지 않았지만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건 무슨 주인 반기는 강아지도 아니고.
“왔어?”
“어, 음. 수염 기르셨네요?”
“…. 옷의 일부더라고.”
“어떠세요? 어떠세요? 잘 어울리시죠? 잘생기셨죠?”
“그러게요오.”
봐봐 이런 반응이잖아.
킥킥 웃으며 시선을 피하는 발렌타인의 모습에 나는 수염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뒤를 이어 모드레드가 우리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럼, 출발하시죠.”
“아, 그 전에 발렌타인님도 옷을!”
“마음대로 하시면 됩니다.”
신이 나 소리치는 넬을 반쯤 무시한 채 모드레드는 다시금 디멘션 커넥터를 조작했다. 대기실을 빠져나가 역사 기록관이 있는 왕국에 들어가려는 것이었다.
“헤헤, 발렌타인님! 이 옷으로 갈아입으시죠!”
“네, 넬?! 후끼약?!”
저쪽은 잘 놀고 있는 듯 보이고.
“퀘스트는 지난번처럼 진행하면 되는 거야?”
“그렇습니다. 다만 저희가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니 마지막 건달을 쓰러뜨릴 때 신호를 주십시오.”
건달이라….
“알았어.”
“네, 그럼.”
그리고 다시금 왕국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굳이 한 단어로 정의를 내리자면 역시나 대영 제국이었다. 산업화가 촉진되어 하늘에 스모그가 마구잡이로 껴있는, 을씨년스러운 대영 제국의 밤.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군.”
“이것이 현실과 같기 때문입니까?”
“그럴지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앞에서 점차 변해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멀리 있는 종탑에서 종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가로등이 비추는 거리가 나타났다.
노틀담의 꼽추라도 있을 분위기로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
“크, 윽…. 또….”
뻐억, 하는 소리와 함께 코뿔소의 머리를 단 수인이 쓰러졌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목에 거치적거리는 보타이를 당겨 풀고는 바 테이블 앞에 기대어 섰다.
젠장, 역시 아슬아슬하단 말이지.
뭐 심하게 얻어맞거나 한 건 아니었으나 체력적인 소모가 꽤나 심했다. 오늘은 술집에 들어서자마자 예고도 하지 않고는 주먹을 날려 얼마나 당황했던지.
“너희는, 헉…. 괜찮냐?”
나는 땀을 쓱 닦아내며 물었다. 그러자 옆에서 코트와 재킷을 챙겨두고 있던 넬이 웃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고생하셨어요! 주인님!”
“…. 그래.”
어쩐지 진짜 메이드한테서 받는 것 같군.
나는 그런 기색을 숨기고는 가볍게 조끼를 여미며 대답했다. 그 너머에서는 발렌타인이 신기하다는 듯 쓰러진 코뿔소 수인의 코를 매만지는 모습이 보였다.
“안쪽으로 들어오십시오.”
그리고 가게 안쪽에서 모드레드의 목소리가.
“넬, 발렌타인.”
“아, 네!”
나는 기절해 추욱 늘어진 고양이 주인을 짐짝처럼 들며 중얼거렸다. 발렌타인과 넬이 꽁꽁 얼어붙은 참치를 챙겨드는 걸 확인한 나는 그대로 바 테이블을 넘어 안쪽으로 들어섰다. 입구에 드리운 발을 헤치며 들어서자 모드레드의 모습이 보였다.
“먼저 들어가십시오.”
주방 한 구석에 바닥 문이 뚫린 채였다.
“이건, 뭐야…?”
“고양이 주인이 마약 단속반으로부터 몸을 숨기기 위해 만들어둔 임시 대피처, 라는 설정입니다.”
그런 설정이 있었군.
“오오오오오옹….”
머리에 혹이 난 고양이 주인이 애처롭게 울어댔다. 살이 쪄서 뚱뚱한 꼬리가 이리저리 움직이자 뒤쪽의 넬이 그걸 잡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
아니 어쨌든,
“그럼 먼저.”
고개를 끄덕인 나는 주인을 어깨에 비스듬히 걸친 채 바닥 문 아래로 떨어졌다. 차가운 바람이 휑하니 목을 감싸고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보다 깊은데….
“윽?!”
혹시나 싶어 위를 올려다본 나는, 바닥 문으로부터 들어올 빛이 없는 것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바닥이 깊은 것이 아니었다. 공간이 변화한 것이었다.
그리고 고양이 주인의 몸이 반짝이는 모습에 휩싸여 사라졌다. 나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 스파다를 뽑아 손에 쥐었다. 그리고 떨어지는 속도가 점차 빨라지며 이내,
쿠웅, 바닥에 착지했다.
“어머나, 벌써 뽑아드셨네에?”
“….”
여자의 목소리다.
퇴폐적인 냄새를 맡으며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앗…. 아아앙…. 하으극….
씨발, 아…. 허억…. 으극….
수십, 수백이 되는 남녀가 뒤섞인 채,
“싸울 마음은 없는데 말이죠오.”
여자는 그 육욕의 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였다.
우민들을 내려다보는 여왕처럼, 고고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