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편
<-- Chapter 4 : 파륜의 기사 -->
“수도…?”
눈앞의 풍경이 뒤바뀌는 걸 보며 나는 숨을 삼켰다.
데이터가 얼기설기 이어지며 형태가 변화하고 합쳐져, 인식할 수 있는 풍경으로 변화해갔다. 정돈된 포장도로가 아래에서부터 피어오르며 어둠 속에서 자그마한 빛과 함께 낡은 가스 가로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그것을 약간 경외감을 지닌 채 바라보았다. 이런 풍경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니건만, 어쩐지 익숙해질 것 같지가 않았다.
바닥에서 솟아오르고,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윤곽이 그려지며 건물이 나타났다. 산업화시대의 영국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벽돌로 만들어진 2, 3층짜리 건물에는 이끼가 가득 낀 채였다.
마지막으로 달이 허공에 걸렸다.
“…. 모드레드?”
나는 희미한 빛으로 물든 거리를 둘러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다그닥거리며 마차가 바로 옆을 스쳐지나갔다. 모드레드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네.”
“여기가 수도라고…?”
“그렇습니다.”
“가상 세계란 의외로, 발전이 덜 된 곳이었군.”
“일종의 연출입니다만.”
“….”
그냥 해본 말이었는데.
하지만 그런 모드레드의 반응에,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짓이었다는 자각이 들었다 조금 이상한 기분이어서 당황한 모양이었다. 눈앞의 풍경은 실제와 완전히 똑같아 구분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정말로 그 시대로 돌아온 듯했다.
“일정 주기마다 분위기나 시대가 변화하는 시스템입니다. 딱히 문제는 없으므로 안심하십시오.”
“그, 그렇군.”
역시 어울리지도 않는 짓은 하는 게 아니란 말이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앞장서 걷는 모드레드를 따라 골목을 빠져나갔다. 약간 당황해 입을 다물고 있던 중, 누군가 뒤쪽에서 등을 툭툭 두드렸다.
“어떠세요?”
넬이었다.
…. 넬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 등을 두드리는 것도 뭔가 좀 이상한 기분이 드는군.
“의외로 평범한데.”
나는 애써 그런 감정을 숨기며 대답했다. 확실히 여러모로 좀 현실과 동떨어진 구석이 있었으나, 좋게 생각하면 받아들이지 못할 것도 없었다.
“헤헤, 이제 더 놀라실 거예요!”
“….”
하지만 녀석은 그런 날 다시 불안하게 했다. 자리에 우뚝 멈춰선 나는 옆에서 즐겁다는 듯 웃고 있는 넬을 힐난하는 듯한 눈으로 잠깐 바라보았다.
“빨리 오시죠.”
하지만 모드레드가 재촉했다. 골목길 어귀에 서있는 그 모습을 보고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옷이 좀 바뀌었다.
평소에 입고 있는 무릎까지 오던 판초가 아니라, 당시의 우아한 귀족 부인이나 입었을 법한 블라우스와 스커트였다. 거기에 조그마한 모자와 양산까지 펼쳐들고.
“즐기고 있구나, 너.”
“고정화된 복식을 착용하는 편이 정체를 숨기기에 편하니까. 그런 이유로 입었을 뿐 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아, 그런 식인가.”
나는 대충 상황을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이쪽 세계에서는, 정해진 규격에 맞추어서 NPC들도 비슷한 복식을 착용하고는 하는 모양이었다.
“헤헤, 선택만 하면 체형이나 모습에 맞추어 자동으로 코디를 해줘서 무척이나 간편하다고요?”
그렇게 이야기하며 넬은 바닥에 내려와 내 옆으로 다가왔다. 허리춤에 손을 올린 녀석의 몸이 한순간 밝게 빛나며 메이드복으로 변했다.
새하얀 카츄사와 앞치마, 검은 원피스.
“어때요, 잘 어울리나요?”
“…. 그래.”
이게 뭐하자는 건지 싶긴 했지만.
“주인님도 입어보세요!”
“아니 난 별로….”
내키지 않는데, 라고 중얼거리려던 찰나, 내 재킷이 넬이 그랬던 것처럼 빛을 발했다. 역시나 이럴 거라고 예상하기는 했지만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지는 걸 느꼈다.
빵모자와 구질구질한 셔츠, 바지.
거기에 멜빵까지.
“와아, 주인님 항만 노동자시군요!”
“….”
움직이기에 불편하진 않아서 다행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모자를 적당히 편할 정도로 올려서 썼다 단추가 풀어진 셔츠를 매만지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모드레드는 어쩐지 굳어진 채였다.
“…? 가자.”
“아, 네.”
내가 말을 걸자 정신을 차리고 걷기 시작했지만.
골목을 빠져나가자 마차가 다니도록 넓게 벌어진 도로가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 평범한 사람부터 시작해…. 개의 얼굴을 한 수인이나 눈이 하나만 있는 덩치가 아무렇지도 않게 도로를 돌아다녔다.
“제가 놀란다고 하셨죠?”
“…. 그러게.”
넬의 말에 나는 어이가 없어지는 걸 느끼며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이곳은…. 현실에 영향을 끼치는 아서리안의 주민들이 살고 있는 장소라는 걸까?
NPC라던가. 그런 걸 포함해, 린슬렛과 트리슈와 함께 했을 때 만났던 너구리나 다람쥐까지.
“그런데 모드레드.”
“네.”
“가상세계라는 건 역시 아서리안의?”
“그것만은 아니지만, 아마 당신이 활동할 수 있는 영역에서는 대부분 그 영향이 깔려있을 겁니다.”
무슨 소리야.
“…. 현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 역시 엘레노어의 영향을 받았다는 겁니다. 현실과 다른 점이라면 데이터가 융합되면서 아예 새로운 세계가 탄생했다는 것이지만.”
약간 한심하다는 듯 나를 보는 모드레드. 잠깐 침묵을 지키고 있던 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의 엘레노어는 정말로 신이겠군.”
“그렇겠죠. 엘레노어가 등장하기 이전에 가상 세계의 주민들은, 인간이 지정한 것 이외의 지식을 습득하지 못하고 있었던 상태였으니까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으음…. 가상 세계에서 가장 큰 산업을 예로 들어보죠. 섹슈얼 컨텐츠가 있지 않습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소리를 한다.
“그 사업에 동원되는 인공 지능 같은 경우에는 말 그대로 손님을 즐겁게 해주는 지식 이외에는 습득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엘레노어가 등장해 그런 제약을 풀어버린 것입니다.”
“그럼 지금 그들은?”
“현실과 거의 흡사한 형태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상 세계는 완벽히 엘레노어의 통제에 놓여있기에.”
물론 다른 부분은 있다.
인공지능은 성적인 부분에서 수치심을 인간보다 덜 느낀다. 그리고 그런 일에 대한 편견도 없다고 한다. 아이를 낳거나 하는 동물적인 본능이 없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는 모양이었다.
“조금 어려운 이야기로군.”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것을 과연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물론 나는 그렇게 하자고 마음속으로 결심을 했다. 가상과 현실은 같은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무분별하게 파괴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그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
내가 돌아보자 넬은 빙그레 웃어보였다. 허공에 떠있던 때와는 달리 함께 걷자 어쩐지 실감이 났다. 그 실감이 어떤 거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어렵겠지만.
키는 170이 조금 안 되려나.
린슬렛이나 모드레드보다는 크고, 유하나 우아랑보다는 작으며 트리슈와 비슷하지 싶었다.
그걸 자각한다는 느낌이었다.
거기에 새하얀 머리칼을 하나로 묶고, 만화에서 나올 법한 메이드복을 훌륭하게 소화하고 있다. 항상 웃는 얼굴에 부드러워 보이는 볼은 귀엽다는 인상.
“당신은 예전에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뭐?”
바로 그때, 모드레드가 내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현실과 가상을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고.”
“그랬었지.”
“하지만 이건 어떻습니까.”
흰색의 양산 아래에서, 모드레드의 얼굴이 반쯤 가려졌다. 여자라기보다는 소녀에 가까운 동안의 얼굴이 내게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
“이 세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인공 지능으로 이루어진, 데이터망을 통해 구축된 0과 1의 세계. 이곳 또한 이준이라는 남자에게 있어서 현실과 동등한 것이라면….
“당신은 이들을 위해서 싸울 마음이 있습니까?”
“….”
나는 대답을 미루고 옆에 있던 넬을 돌아보았다. 옆을 지나치는 거대한 코뿔소 머리의 남자를 신기하다는 듯 순수하게 바라보고 있는 녀석을.
“뭔가 한 가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어떤 부분에서?”
“나는 모두의 대변자 같은 대단한 게 아니야.”
그렇다.
“이 옆에 있는 멍청이를 위해서라면 싸우겠지만.”
그 외에는 뭐 어찌되었든 내 알 바 아니다.
“그렇습니까.”
무뚝뚝하게 중얼거린 모드레드가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앞장서 계속 나아가 건물 중 하나로 들어섰다. 나는 그 옆의 꽃가게에 정신이 팔려있던 넬의 팔을 잡아끌고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서자,
“어서 오시라옹.”
고양이 주인이 인사를 했다.
“….”
아예 이런 걸 업으로 삼아 살아가는 종족인 걸까.
약간 살이 두툼하게 찐 고양이 주인이 갸르릉 거리는 소리를 내며 손에 든 접시를 수건으로 닦아냈다.
평범한 술집으로 보이는 풍경이었다. 앉아있는 대부분이 너구리나 다람쥐, 코뿔소나 이상한 공룡이라는 것이 좀 달랐으나 사람의 옷을 입은 게 그럴싸했다.
근데 코뿔소가 저렇게 두툼한 발로 포커를 어떻게 치고 있는 거지.
“모드레드, 여기는 왜…?”
“간단한 퀘스트 과정을 거쳐야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별 건 아닙니다만….”
중얼거린 모드레드가 양산을 접고 앉았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고양이 주인을 보며 입을 열었다.
“기록열람실에 침입하고 싶습니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그 말에,
“뭐라고옹…?”
빠직, 하고 고양이 주인의 손에 있던 접시가 박살이 났다. 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어, 나는 얼굴을 향해 날아드는 접시의 파편을 피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감히 너희들이, 왕실의 가장 깊숙한 곳에…!!”
뭐야 대체 무슨 상황이야.
“이들의 경우에는 엘레노어가 건국한 왕국을 광적으로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설정이죠.”
“너, 너 방금 설정이라고 했지?”
“네, 그렇습니다만.”
분위기가 흉흉했다.
코뿔소가 콧김을 스윽 내뿜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람쥐들이 총을 꺼내고 너구리가 시가를 입에 물었다. 아니 너구리는 왜 그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
“그렇게 놔둘 수는 없다옹!”
마지막으로 고양이 주인이 흉악한 냉동 참치를.
잠깐, 참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