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편
<-- Chapter 3.5 : 잠깐의 휴식 -->
◇
“하아…. 저 바보.”
린슬렛은 피곤한 기색을 느꼈다.
이마가 지끈지끈대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어둑어둑한 산길을 걸었다. 하지만 걱정스러운 기분을 감추지 못한 채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뭐해? 빨리 와.”
먼저 앞장서 나가던 트리슈가 뒤를 돌아보았다. 머플러에 가면, 모자까지. 완전히 게임 속으로 들어선 그녀를 보며 린슬렛은 이마를 짚었다.
“하아.”
도자기 같은 재질의 고양이 가면을 만져지자 그녀 역시 게임 속으로 들어왔음을 실감했다.
“왜 그래? 린 언니.”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건가 싶어서.”
“결국 데이트 못한 건 나와 유하 언닌데?”
“나, 나도 제대로 한 건 아니잖아.”
“흐응~ 사실은 좋았으면서.”
“정말로 아니거든.”
슬쩍 걸음을 재촉해 바로 옆에 선 린슬렛이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트리슈가 쿡쿡 웃으며 가볍게 윙크를 했다.
“알아. 린 언니 생각쯤은.”
“그럼 대체 왜….”
“글쎄? 타나 오빠가 생각보다 능숙했다는 게 걸려서.”
“뭐?”
“자기가 하는 행동을 의식하고 있다고 했잖아? 근데도 중간에 막 괴로워하거나 그러질 않아서.”
“….”
확실히 그건 좀 이상했다.
유령(게임 속의 존재라고는 했지만)에 씌였다고 해서 이준이 과연 순순히 저럴까 싶었던 것이다. 디멘션 커넥터에 뇌의 일정 부분을 컨트롤 당하고 있었음에도.
과연 이준이 그 말을 순순히 들을까?
“그래서 좀 걸린다는 거야.”
“…. 티티가 일부러 저런다는?”
“가능성의 하나지만.”
그럴 리가.
순간적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려던 린슬렛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굳이 거기에 대답을 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녀 역시 비슷한 예감을 했기 때문이었다.
어처구니가 없는 방향이었지만.
“일단은 퀘스트에 집중하자.”
“린 언니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또 뭐.”
“내 이야기에 굉장히 복잡한 얼굴이 되었으니까.”
“….”
“생각이 깊은 건 좋지만, 거기에 쉽게 휘말린다 말이지~. 그쪽은 타나 오빠랑 되게 비슷한?”
“그, 그러는 너도…!”
“트리슈야 뭐~ 재미있으면 다 좋다 싶어서.”
요염한 미소가 날아들었다.
“그러다 언젠가 큰코 다쳐.”
“괜찮아~ 타나 오빠가 있으니까.”
“끄응, 너무 어리광 부리는 거 아니야?”
“그렇게 해주겠다는데 안 부리는 것도 이상하지? 린 언니야말로 좀 어깨에 힘을 풀어보는 게?”
“….”
린슬렛은 약간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조금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과 완전히 반대의 면모를 보이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이해하고 있는 트리슈가 어쩐지….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그런 거 싫은데.”
“그래서 부끄러워하는 거잖아.”
“너도 부끄러워하면서.”
“내가 부리고 싶지 않은 어리광을 타나 오빠가 들어줬을 때는 그렇지.”
의외로 순순하게 인정한다.
그런 느낌이었다. 기본적으로 트리슈는 남과 거리를 두는 사이였으나 이준의 앞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이준에게도 감추고 있는 부분이 있다.
소위 말해 자존심이라는 것이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넘어선, 같은 인간으로서 지니고 싶은 자존감. 혹시 그가 자신을 완전히 어린애 취급하게 될까 싶을 정도의 저열한 감정.
물론 린슬렛도 그걸 감추는 쪽에 속했다.
그가 짊어지고 있는 짐이, 겉으로는 보이지 않아도 행동이나 표정에서 다 드러나기 때문일까. 린슬렛 역시 트리슈와 마찬가지로 꾹 참고 있는 편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다른 여성들과의 관계를 묵인하고, 일부러 좀 그와 거리를 두는 거겠지.
하지만 역시 그건 다른 감정을 낳기도 했다.
속내를 알 수 없다는.
하지만 그게…. 지금에 와서, 우습지도 않은 퀘스트 하나로 인해 훤히 드러났다면 그건 그것 또한 어이가 없을 터였다. 그렇기에 린슬렛은 그걸 부정했다.
“하아.”
“어머, 아까부터 계속 한숨이네.”
“몰라, 일단 가보자.”
결국 결론은 그것이었다.
이준은 다시금 묶여 발렌타인과 베디비어가 번갈아가며 감시를 하기로 했다. 그리고 린슬렛과 트리슈는 일종의 유격대로서 퀘스트를 클리어하기로 했다.
“넬, 들려?”
[네넬! 잘 들려요!]
이준에게 귓속말을 하자 반대편에 있던 넬이 대신 거기에 응답했다. 트리슈와 눈길을 주고받은 트리슈는 곧바로 속도를 높여 나무 위로 뛰어올랐다.
어둠에 잠긴 산 숲을 내달렸다.
[퀘스트, 바로 보내드릴게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목소리와 함께 눈앞에 팝업창이 하나 떠올랐다. 시야 구석의 지도에 표시되는 마커를 확인한 린슬렛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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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 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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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산속의 유령 2/2
난이도 : 알 수 없음
내용 : 정신을 혼란시키는 유령을 퇴치하세요.
제한 시간 : 해가 진 이후, 동이 틀 때까지.
보상 : 경험치 8,000,000, 기사의 명예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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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어. 무슨 일 있으면 또 연락할게.”
[네넬! 잘 부탁드려요!]
목소리가 조금 다급했다.
“넬~ 무슨 일 있어~?”
사뿐히 나뭇가지를 디딘 트리슈가 그 감정을 캐치해내고는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곧장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베디비어의 비명 소리가 이어졌다.
[꺄악?!]
“무슨 일 있어?!”
[주, 주인님이 화장실 가고 싶다면서 풀어달라고 하시더니…. 남자인 친구와 놀고 싶으시다고…!!]
“뭐해! 빨리 안 떼어내고!”
[어머, 어머, 어머.]
거기에 대답한 건 발렌타인이었다.
“하아…. 남자들끼리의 위험한 우정에 로망을 가진 건 여자의 본성이려나?”
“그, 그런 게 어디 있어?!”
린슬렛이 얼굴이 빨개져 소리쳤다. 그런 반응에 트리슈는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가, 갑자기 옷을 벗으시는데요?!]
[어머, 어머, 어머.]
“아니, 안 돼! 그것만큼은!!”
린슬렛, 트리슈, 유하 중 하나가 아니라 베디비어가 이준의 최종 선택을 받는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바로 다음 순간,
[아, 치셨네요.]
뻐억, 하고 뭔가 둔탁한 소리가.
[완전히 본능적인 영역에서 내지른 라이트훅인데요? 베디비어님. 그리고 주인님은 기절하셨네요.]
“….”
“….”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침묵했다.
“제길.”
린슬렛은 인상을 쓰며 욕지기를 내뱉었다. 퀘스트에나 집중하자.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마커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산을 타고 올랐다. 어둑어둑한 가운데 약간 서늘한 한기가 목에 감기는 듯했다.
그리고 거기에 좀 기분이 나빠졌다. 결국 또 혼자 싸우려고 했던 건가 싶기도 해서. 자신들에게는 완전히 평범한 여행으로 포장해서 이야기를 하더니.
그의 시선은 이번에도 역시 그곳을 향한 채였다.
갤러해드가 된다. 이 게임을 끝낸다는 목표에.
“끄응….”
좀처럼 마음이 정돈되지 않는 걸 느끼며 린슬렛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런 부분에 좋지 못한 기분이 들었으나, 그것을 말해보았자 어리광을 부리게 될까봐 일부러 언급을 피했다.
자신들은 결국, 이 게임을 끝낸다는 그의 의지와 그 과정 속에서 큰 도움을 받아 모였으니까.
아마 죽었겠지. 그가 없었더라면.
아직도 가끔 탄환에 실제로 맞은 부분이 시큰거리는 듯했다. 분명 상처는 그 신비한 마법 같은 아서리안의 힘으로 회복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저기, 린 언니….”
대체 나는,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은 걸까.
“린 언니!”
“아, 응?!”
트리슈의 목소리에 버럭 정신을 차린 린슬렛이 고개를 들었다. 어느덧 퀘스트 마커의 위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주변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린 린슬렛은, 이내 무언가 길게 뻗은 나무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걸 발견했다. 훤칠하게 큰 키. 검정색 가죽 재킷.
그리고 해골 무늬가 새겨진 마스크.
“…. 티티?”
저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래, 린슬렛.”
하지만 그는 너무도 진지한 얼굴로 눈을 마주쳤다. 뒤쪽에 있는 트리슈는 이준과 한 번 눈을 마주치고 이내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이준은 적개심이 서린 눈을 한 채 두 사람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물러서지도, 뭔가 요령을 부리지도 않았다.
대체 무슨 상황….
“린 언니, 그거 가짜야.”
그리고 이어진 트리슈의 말에, 린슬렛은 대충 상황을 이해했다. 그러니까 눈앞의 이준은, 정신을 꾀어낸 유령이 형태를 갖추고 있는 모습이라는 건가.
“결투는 어떤 식으로?”
린슬렛은 눈앞에 팝업창을 띄우며 중얼거렸다. 다 년간의 에스콰이어, 한 달 남짓의 기사 생활 끝에 얻은 각종 방패들이 전리품 상자처럼 놓인 아이템창이었다.
그리고 이준…. 아니 타나토스는,
“둘 다 덤벼.”
무뚝뚝한 얼굴로 중얼거리며 스파다를 뽑았다.
사람의 의지를 형상화한 듯한 뼛조각 검의 모습에 린슬렛은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 마치 실제로 타나토스와 싸움을 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그는 싸워야할 이유가 있다면 마다하지 않으니.
이렇게 다수와의 싸움 역시.
“…. 아론다이트.”
뭔가 조금 미묘한 기분이었다. 어이가 없는 동시에 린슬렛은 어쩐지 기묘하게 비틀린 즐거움을 느꼈다. 다시 말해 그것은,
대리만족이라고 해야 옳겠지.
“바보에게는 약도 없다더니.”
마치 진짜 타나토스를 대하듯 중얼거린 트리슈가 린슬렛의 옆에 섰다. 그녀 역시 같은 생각을 하는 듯 활짝 웃으며 오른손에 빛을 발하게 했다.
페일노트.
절대로 빗나가지 않는 환상의 마궁(魔弓).
랜슬롯과 트리스탄.
두 기사는 그렇게 망자의 앞에 섰다.
언제나 진지하고 고집스러운 얼굴을 확 망가뜨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