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편
<-- Chapter 3.5 : 잠깐의 휴식 -->
뭔가 이상한 기분이었다.
몸이 끓어오르고, 뭔가를 주체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떨어지는 잎새에 눈물이 날 것 같은 감각. 나는 린슬렛이 너무 귀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사랑스러워서.
거기에 유하도. 트리슈도.
너무 예뻐서.
뭔가 부글부글 거리며 끓어오르는 듯한 감각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유령이 꾀인 듯한 감각. 나는 필사적으로 그런 감정을 견뎌내려고 했다.
하지만 디멘션 커넥터가 내 뇌에 계속…. 그런 충동을 불어넣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해서 견뎌내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되 뇌이듯 말했다.
[잠깐 탈의실로 좀 와봐. 안으로.]
바로 그 순간, 린슬렛으로부터 메시지가.
“….”
좋아, 시험해보자.
조금 진정했다. 아무리 그래도 린슬렛에게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뭐랄까…. 놀린다고 생각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침에 둘이 한옥 마을에 가자고 했을 때는 그녀와 함께라는 사실이 좋아서 나오긴 했지만.
“후우, 후우.”
가볍게 심호흡.
바깥에서 웃으며 기다리던 점원들을 지나쳐,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한 평 남짓한 좁은 탈의실 안에는 린슬렛이….
“이, 이 뒤에 지퍼 좀 올려줘 봐.”
속치마 차림으로 서있었다.
크게 불투명한 라인을 그리며, 무릎까지 뻗은 속치마. 머리는 또 언제 저렇게 예쁘게 땋아 올려 묶은 걸까 싶을 정도였다. 잘록한 허리선, 긴 다리와 허벅지. 꽉 조여든 복근과 가녀린 어깨까지.
“….”
“응? 티티.”
중얼거린 그녀가 뒤로 돌아섰다.
나는 이성이….
씨발.
와락 뒤에서 끌어안는다.
“?!”
“린…. 린…. 린….”
그녀를 안고 귓불을 깨물었다. 내 손바닥만 한 허리를 꽉 쥐고 당겨 딱딱해진 그것을 느끼며 엉덩이에 가져다댔다. 그녀는 몸이 굳어졌다. 하지만 살짝 입술을 내밀어 목에 입을 맞추자 이내 내게 기대어왔다.
“역시 이상해….”
그녀가 무어라 중얼거린 것 같았으나 나는 무시했다.
“너를, 내 것으로 만들겠어.”
반쯤 무의식에 젖어 중얼거리고 다음 순간,
“이상하다고!!”
정신을 차리려는 듯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나는 턱에 맹렬한 충격을 느꼈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린슬렛의 얼굴에서 천장으로 향하며….
나는 기절했다.
◇
희미하게 정신이 들었다.
“…. 그 영향이라는 거야?”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와 여러 의미에서 벌떡 일어서려던 나는, 몸이 부자유스럽다는 걸 깨달았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자 가까이에 쪼그려 앉아, 이쪽을 관찰하듯이 바라보고있는 넬이 보였다.
“안녕, 넬.”
“….”
나는 상쾌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언제 돌아온 건지 다시금 별장이었다. 나는 중간의 큰 기둥에 묶인 채였다.
“으, 으으으…. 일어나셨어요!”
“오늘도 네 새하얀 머리는 눈 같아서 예뻐.”
“히이이이이.”
가볍게 윙크를 하며 이야기했으나 넬은 안색이 창백해져 뒤로 물러섰다. 그런 반응에 고개를 든 나는, 그 뒤쪽에 서있던 세 사람을 발견하고 다시금 웃었다.
“다들 무슨 일이야? 이렇게 모여서.”
“퀘스트 때문에 이렇게 됐다는 거지?”
린슬렛이 슬쩍 옆을 돌아보며 이야기했다. 나는 유하 역시 듣고 있다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 떨었으나, 이내 뭐 어떠랴 싶어 고개를 내저었다.
“너희를…. 꽃다발이라고 불러도 될까?”
“어머, 준…. 어디서 그런 예쁜 말을….”
“유하 언니. 넘어가면 안돼요. 지금 타나 오빠는 약간 술 취해있는 거랑 비슷한 상황이니까.”
“네? 하지만 술 취했을 때는 좀 다른 느낌인데….”
“응? 그건 또 뭐에요?”
“하아, 일단 집중하자고.”
유하의 말에 흥미를 느낀 트리슈와는 달리, 린슬렛은 한숨을 내쉬며 내게 다가왔다. 쪼그려 앉은 그녀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티티, 지금 기분이 어때?”
그리고 나는 입을 맞췄다.
얼굴을 가까이 한 그녀에게, 턱을 내밀어,
“?! 무, 무슨 짓이야!”
부드러운 촉감을 채 느끼기도 전 그녀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나는 얼굴이 붉게 물든 린슬렛을 향해 웃으며 다시금 윙크를 했다.
“이런 기분.”
“주, 준이 불량 소년이…. 하지만 저것도 멋져….”
“유하 언니는 타나 오빠가 뭘 해도 좋은가봐요.”
“하, 하지만 이런 것도 뭔가 색다르지 않나요?!”
“뭐, 뭐어. 그건 그렇지만….”
의견의 일치를 확인한 두 사람이 흥미로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넬은 고개를 내저었다.
“네, 넬은 싫어요! 이런 주인님 뭔가 이상해요!”
“하지만 뭐…. 하루 정돈데 괜찮지 않겠어?”
“전혀 안 괜찮아.”
그렇게 말하며 일어선 것은 린슬렛이었다.
“오늘 나머지 계획은 전면 취소. 밤까지 교대로 티티를 지키는 걸로 하자. 행여나 이상한 짓 할지도 모르니.”
“너, 너무해요!”
“어쩔 수 없잖아요. 사람 상태가 이런데.”
그렇게 중얼거린 린슬렛이 눈썹을 찌푸린 채 날 돌아보았다. 한순간 거기에 반발했던 유하가 고개를 숙이며 물러섰다.
“유령에 씌인…. 거라고 했지? 넬.”
“네넬, 퀘스트 로그 상으로는 그런 식이었어요.”
“다른 사람의 의식이 티티를 조종하고 있다는 거잖아? 난 그런 거 티티라고 생각 안 해.”
“저어…. 무슨 말씀이신지….”
여전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유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걸 딱히 설명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린슬렛과 트리슈, 넬의 얼굴에 곤란한 기색이 감돌았다.
“근데, 린 언니.”
그리고 트리슈가 손을 들었다. 한순간 싸늘해진 눈초리에 모두가 눈을 동그랗데 떴다.
“언니 혼자만 재미 볼 거 다 보고서 그 시간이 지나니까 갑자기 이러는 건…. 너무하지 않아?”
“뭐, 뭣?!”
“왜 그렇지 않아? 탈의실로 끌어들였던데.”
“아니 너는 대체 어떻게 거기까지 미행을…?!”
“잊었어? 정보전의 트리스탄을.”
하고 중얼거린 트리슈가 후후, 하고 웃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면서도 유하는 트리슈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서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치이? 타나 오빠. 말 잘 들을 거지?”
“너희가 하는 말이라면 뭐든지.”
나는 상쾌하게 대답했다.
“주, 준…. 그러면 혹시.”
“아, 아아! 희망사항은 이따가 자기 시간에.”
“유, 유하 씨의 시간은 큰일이라고?! 티티가 저런 상태에서 자기 자신을 절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 그, 그 부분은 확실히 협의를 해두죠.”
“맞아~ 우리, 서로를 인정하는 건 아니잖아?”
그렇게 이야기하며 미소를 짓는 트리슈. 눈썹을 찌푸린 트리슈. 마지막으로 표정이 굳어진 린슬렛까지.
“주, 주인님?”
“응, 넬.”
“어떻게 하시고 싶으세요…?”
“나는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되어도 좋아. 설령 솔로몬 왕의 판결이 나오더라도.”
“…. 세 부위를 공평하게 나눌 수 있을까 모르겠네요.”
넬이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지만 나는 각오를 끝마친 상태였다. 어떤 판결이 나오더라도 거기에 군말하지 않고 따르기로.
숙덕숙덕, 나에게서 조금 떨어진 채 선 세 여성이 말을 주고받았다. 약간 얼굴이 빨개지기도, 상황에 따라 뭔가 마음이 맞는듯 고개를 끄덕이거나 린슬렛이 그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손을 내젓기도 했다.
“어라, 타나?”
바로 그 순간,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 베디비어.”
“뭐 잘못했어요? 왜 묶여있어요.”
가볍게 장난을 치듯 웃은 녀석이 내 팔을 묶고 있는 단단한 밧줄을 풀어주었다. 세 여성은 이미 반쯤 몸을 돌리고 있는 상황. 나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디 갔다왔어?”
“아 저희는…. 발렌타인님이 호숫가에 서식하는 수상 생물이 좀 보고 싶다고 하셔서요.”
“그래서 거기를?”
“네….”
“잘 다녀왔어? 발렌타인.”
나는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러자 뒤쪽에 있던 발렌타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좀 의아하다는 듯한 눈초리를 지닌 채 그녀는 입을 열었다.
“타나토스님은…. 왜 여기에?”
“아, 내가 좀 정신이 이상해져서.”
“네?”
“그보다 베디비어.”
눈을 동그랗게 뜨는 발렌타인을 무시한 채, 나는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던 베디비어를 바라보았다. 듬직한 멋이 있는 녀석이라는 생각을 했다.
“왜 나는 안 데려간 거야.”
그래서 살짝 놀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네, 네?”
“난 말이야. 동성친구라는 걸 동경했단 말이다.”
“…. 타, 타나?!”
녀석이 당황해 중얼거렸으나 나는 무시하고 엉덩이를 살랑거리며 어깨 위로 손을 뻗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베디비어 역시 린슬렛처럼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왜, 왜왜, 왜 갑자기!”
“뭐 이 정도야 가벼운 인사인데. 서양에서는.”
“아 그러고 보니 미국 쪽에 계셨다고…. 아, 아니 잠깐 그래도 좀 얼굴이 너무 가깝지 않나요?!”
“츄를 포함하니까.”
“츄?! 아니, 윽?! 발렌타인!!”
“어머, 어머, 어머.”
“…?! 자, 잠깐! 티티!”
소란스러운 걸 들었는지 린슬렛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리고 목덜미를 잡혀 나는 뒤로 당겨졌다. 고개를 드니 눈을 동그랗게 뜬 린슬렛이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보고 있었다. 그 뒤로 유하와 트리슈까지.
“아야…. 아프잖아. 아기 고양이.”
“히익?!”
귀엽다.
“저, 여러분 대체 이게 무슨?!”
“그, 게임 퀘스트의 영향인데…!! 티, 티티! 이거 빨리 놓고 떨어져! 너 지금 정상이 아니라고!”
“맞아. 네 앞에서는 언제나 그래.”
“히이이이….”
“주, 준! 제 앞에서는! 제 앞에서는요!”
“유하의 앞에서는 그렇지 않아.”
“그럴 수가…!!”
“왜냐면 이미 내 인생은 유하로 인해 그게 정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지.”
“아, 아아! 준!”
“유하!”
“…. 적당히들 하세요. 정말.”
“왜 린슬렛, 나는 진심이야.”
“그렇게 진지한 얼굴로 그런 느끼~한 소리를 해대는데 믿겠어?! 트리슈! 너도 좀 뭐라고!”
“협의에 의하자면, 생(삐이-)기 접촉을 제외하고는 모두 허용된다고 결론이 나지 않았던가?”
“아, 아니 그래도 지금 이 상황은…! 으으!”
혼란스럽다는 듯 중얼거린 린슬렛이 이내 머리를 감싸 쥐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그녀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다들 제발 정신 좀 차려어어어어!!”
린슬렛은 예쁘다.
너무 예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