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편
<-- Chapter 3.5 : 잠깐의 휴식 -->
◇
밤이 깊자 생각보다 훨씬 추워졌다.
으슬으슬 몸이 떨릴 정도여서, 나는 길게 숨을 내뱉으며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디멘션 커넥터가 시야 구석진 곳에 시간과 온도를 표시해주었다. 둘 다 0에 가까운 수치였던 터라 나는 이를 살짝 깨물었다.
“주인님….”
그리고 넬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자고 있는 거 확인했어?”
“네넬, 피곤하신 모양이네요.”
그녀에게는 여자 방 쪽에 있는 인원들이 완전히 자고 있는지를 확인하도록 부탁했던 터였다. 베디비어가 자고 있던 건 나올 때 확인했으므로 나는 곧바로 프로그램 아이콘을 띄워 아서리안을 실행시켰다.
“네크로맨서 재킷, 기동.”
그리고 도약했다.
거대한 숲이 눈앞에 펼쳐졌다. 눈앞에 각종 팝업창들이 떠오르자 나는 곧바로 퀘스트창을 불러들였다. GPS를 통해 지역을 확인한 마커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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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 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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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산속의 유령 1/2
난이도 : ★☆☆☆☆☆☆☆☆☆
내용 : 여행객을 꾀는 유령을 찾아내세요.
제한 시간 : 해가 진 이후, 동이 틀 때까지.
보상 : 경험치 5,000,000, 기사의 명예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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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찾아내면 되는 걸까.
“넬,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 좀 봐줘.”
“새벽인 데요…?”
“혹시나.”
있으면 그건 그것대로 큰일이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별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숲에 내려섰다. 기둥처럼, 혹은 사람처럼 보이는 나무들이 길게 뻗은 상태로 나뭇가지가 밟혔다.
달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숲, 춥다는 느낌은 재킷을 입으면서 동시에 사라졌지만, 을씨년스럽다는 단어가 이만큼 어울리는 장소가 있을까 싶었다.
“넬.”
그리고 나는 슬쩍 위로 떠올라있던 그녀를 불렀다.
“네네엘~.”
뭔가 좀 귀찮다는 듯한 얼굴인데.
“고맙다.”
“…. 왜, 왜죠.”
“아니 그냥, 고생해줘서.”
나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눈앞에 떠오른 지도를 손으로 가리켰다. 넬이 표시해둔 각종 마커들이 민가와 사람들의 이동 경로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주, 주인님….”
눈물을 글썽거리는 넬.
“…. 왜 그래?”
“아뇨 그냥, 이렇게 가끔 무심한 듯 툭 던지시는 고맙다는 말에서, 뭔가 ‘심쿵’하네요.”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웠냐.”
“헤헤, 넬은 한 번 본 건 잊지 않는다고요?”
그렇게 중얼거린 넬이 빙긋 웃으며 뒤로 따라붙었다. 마커를 따라 걸음을 옮기던 나는 녀석을 슬쩍 돌아보았다. 최근 들어 자각이 별로 없어지긴 했으나, 넬은 말 그대로 한 번 본 건 잊지 않는 존재였지.
그렇게 생각하던 중, 무언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무언가 꿈틀거렸다. 우거진 수풀 사이에서.
“…?”
“주, 주인님?”
넬이 약간 겁을 먹은 듯 등에 붙었고, 나는 귀찮으니 피해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옆으로
몸을 틀었다. 그러자니 그것이 눈을 빛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단단한 엄니, 근육과 지방이 조화된 덩치.
“멧돼지네.”
“메, 메메메메메, 멧…!”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렸으나 정작 뒤에 있는 넬이 난리였다. 콧김을 씩씩 내뿜으며 앞발굽으로 땅을 다지며 이쪽을 위협하는 멧돼지.
그리고 녀석은 곧장 돌진해왔다.
“주인님!”
넬의 외침에, 나는 눈썹을 찌푸리며 땅을 박찼다. 그리고 타이밍을 맞춰 돌진해오는 멧돼지의 머리를 밟고는 힘껏 위로 도약했다.
꾸익, 하는 돼지 멱따는 소리.
경사진 위치였기에 멧돼지는 중심을 잃고 아래로 굴러 떨어져 나무에 처박혔다. 하지만 터프하게도 중심을 잡고는 고개를 들어 날 다시금 찾으려 들었다.
하지만 이미 나뭇가지 위에 올라선 터라 녀석이 날 찾을 일은 아마 없을 터였다.
“넬, 그거 아냐.”
“뭐, 뭘요…?”
“돼지는 하늘을 보지 못한다더라.”
그 말대로 눈앞의 멧돼지는 고개를 흔들어 좌우를 돌아보고 있을 뿐. 위를 보지는 못했다. 잠시 그걸 지켜보던 나는 나뭇가지를 밟으며 마커 위치로 향했다.
우리가 있는 별장은 산맥의 낮은 봉우리 근처에 세워진 곳이었다. 그리고 마커는 봉우리를 넘어 등산로 근처에 위치한 채였던 터라 나는 계단을 오르는 감각으로 나뭇가지를 밟고 계속해서 달려나갔다.
그리고 정상.
“큭…?!”
훌쩍 뛰어오른 나는, 엄청난 빛에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마커가 있는 방면이었다.
“주인님!”
넬의 비명, 제대로 된 나뭇가지를 찾지 못하고 디딘 건지 퍽석, 하는 소리와 함께 부러졌다. 나는 몸의 중심이 흐트러지는 걸 느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바닥과 충돌했다.
충격은 그다지 없었으나, 속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나는 데굴데굴 굴러 산비탈을 내려갔다. 머리가 흔들리는 듯한 감각이 이어졌으나 다시 중심을 잡았다.
“뭐야?!”
그리고 이어지는 빛,
눈앞에 이어진 나무 사이에서 엄청난 빛이 흘러나왔다. 안구를 정면으로 후려갈기는 듯한 통증에 나는 팔을 들어 가리며 눈앞에 있는 나무와 충돌했다.
“…!!”
“괜찮으세요?”
가까이 따라붙은 넬이 그렇게 이야기했다. 엄폐를 하는 것처럼 나무 뒤에 숨은 나는 바닥에 나무의 그림자를 섬세히 만들어내는 강한 빛을 바라보았다.
“여행객을 꾀는 유령을 찾아내라며…?”
“그, 그렇죠?”
“꾀는 게 아니라 실명을 시킬 기센데.”
나는 어이가 없어지는 걸 느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간단한 퀘스트’라고 했던 우정현 씨의 말이 떠올라 순간적으로 어이가 없어졌다.
저곳으로 가야….
“하겠지?”
“음, 아마도요?”
“너는 괜찮은 거냐?”
“헤헤, 전혀 문제없습니다!”
부러울 정도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침착해지려 앞머리를 매만졌다. 어쨌든 상황을 정리해보자면, 저 빛을 향해 다가가야 하는 것 같기는 한데….
일단, 가보도록 할까.
“넬, 정말 괜찮은 거라면 위치를 좀 가르쳐줘.”
“음, 어쩌시려고요?”
“죽이 되던 밥이 되던 해봐야지.”
궁금한 기색을 내비치는 넬을 힐끔 바라본 나는 곧바로 양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그리고 곧장 빛의 근원지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대로 나아가시면 되요.”
넬의 설명을 따라 발밑으로 눈을 내리깐 채 무언가 걸리는 것이 없는지 확인했다. 무릎까지 오는 커다란 나무뿌리를 다리를 뻗어 넘으며 나는 계속 걸었다.
여행자를 꾀는 유령이라고 했나.
그렇다면 등산객을 꾄다는 말이 되려나. 하지만 생각해보면 밤중에만 나타나는 퀘스트에서 어떤 등산객을 꾄다는 걸까. 또 단순히 꾸며주기 위한 헛소리에 가까운 설정이라고 생각하면 되려나.
“바로 앞이에요.”
이것저것 상념에 잠긴 채 있자니 넬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자리에 우뚝 멈춰선 나는 천천히 팔을 뻗었다. 빛이 가까워서 그런 것일까. 이글이글 끓는 듯한 열기가 느껴졌다. 마치 태양에 다가가는 듯한….
그리고 무언가 손에 닿았고,
“큭?!”
순식간에 빛이 잦아들었다.
아니, 그건 마치 내 안으로….
스며드는 듯한….
◇
“하아암….”
트리슈는 길게 하품을 하며 잠에서 깨어났다.
“음냐, 음냐….”
잘 움직이지 않는 입을 풀며 그녀는 기지개를 폈다. 커다란 셔츠 한 장 차림의 그녀는 흐트러진 이불 속에서 다리를 뻗고 일어서려고 했다.
아 참, 조심.
그리고 반대편에 있는 2층 침대를 보자 정신이 들어 고개를 숙이며 빠져나왔다. 양쪽에 2층 침대가 두 개라는 4인용 방. 밤새 수다를 떠느라 제대로 자지는 못했음에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린슬렛 언니, 일어나.”
침대 위쪽을 툭툭 두드리며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반대편을 확인하니 2층의 발렌타인 역시 잠에 빠져든 채였고 그 밑에 있어야할 유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2등인가.
“역시…. 어른스러움의 차이인가.”
그녀는 내심 이겼다는 안도감에 취해서는 위층 침대에서 잠들어있는 린슬렛을 바라보았다. 비록 나이 차이는 한 살이 났으나 영락없는 어린아이였다.
화장도 거의 안하고 말이지.
그렇게 생각한 트리슈는 밤에 놔두었던 파우치를 챙겨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얼굴에 붙어있던 가벼운 마스크팩을 들어내고 그녀는 꼼꼼하게 세수를 했다.
자고로 여자의 아침은 긴 법이다. 그것도 트리슈처럼 외모에 신경을 쓰는 여성일수록. ‘선생님’이 베이스는 있다며 인정해주셨으니, 꾸준히 관리해야지.
가볍게 미스트를 뿌리는 걸 마무리로 하여, ‘적당히 쌩얼처럼 보이는 기초화장’을 마친 트리슈는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 엉덩이에 딱 달라붙는 바지 하나를 입고 곧바로 1층으로 내려갔다.
좋은 냄새가 풍기는 걸로 봐서는, 아마 아침을 만들고 있으려나. 유하 언니가.
“주, 준…? 이게 왜….”
어라, 타나 오빠인가?
“쉿. 아무 말도 하지 마.”
“…?”
“네, 네에?! 저, 저어 너무 가까운 것….”
“난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했어.”
“왜, 왜, 요…?”
“유하가 말을 하면 에너지가 소비되잖아?”
“그, 그렇죠.”
“유하가 조금이라도 세상에서 사라지는 건 싫으니까.”
“….”
이건 무슨 상황이지.
“주, 준….”
부엌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트리슈는 차마 나설 생각을 못한 채 벽에 붙었다. 이 집 지하실에 마약 같은 게 숨겨져 있는 걸까. 아침에 또 집에 뭔가 있나 싶어서 돌아보다가 타나 오빠가 실수로 마약을 흡입했다던가?
“알았으면 얌전히 기다려.”
“네, 네에♡”
분위기가 좋다.
좋아도 너무 좋다.
“그러고 보니, 유하.”
“네, 준!”
“항상 감사하고 있어.”
“뭐, 뭐가요…?”
“유하가 내 곁에 있어주어서.”
“주, 준!”
“유하!”
“준!”
“자, 자자자자자자, 잠깐만!!”
트리슈는 더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섰다.
평화롭게 아침 햇살이 깃들고 있는 부엌, 식탁에 앉아서 벌떡 일어선 유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뒤에 있는 준을 본 트리슈는 몸이 굳어지는 걸 느꼈다.
“아, 트리슈.”
머뭇거리던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
앞치마 차림인 채.
하지만 바지 하나만 입고서.
“…. 타, 타나 오빠?!”
“잘 잤어? 오늘도 눈이 부시네.”
이준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상쾌하게 웃었다. 트리슈는 분명 마약을 했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그 이준이 상쾌하게 웃은 것이었다.
“누, 눈이…?!”
“아침, 먹어야지?”
그렇게 중얼거린 이준은 당황해 굳어진 트리슈의 곁으로 다가왔다. 잘 날이 선 콧날에 멍해져 있자니 트리슈는 어느덧 자신이 벽에 기댄 채라는 걸 깨달았다.
“셔츠도 오버핏이라 예쁘네.”
“뭐, 뭐뭐뭐뭐뭐뭐, 엇?!”
태양빛이 이준의 어깨에 가려졌다. 팔을 들어 트리슈의 머리 위에 비스듬히 댄 그가 웃었다. 트리슈는 당황해 식탁 쪽에 있는 유하를….
“하아♡ 역시 준이 만들어준 토스트라 맛있네요!”
하지만 전혀 이쪽을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갑자기 이상해진 이준의 습격(?)을 받고 완전히 녹아내린 그녀는, 새까맣게 탄 토스트를 아무렇지도 않게 먹었다. 단정한 입가가 새까맣게 물든 채였다.
치, 침착하자.
“저, 타나 오빠?”
“왜, 트리슈?”
“혹시 뭐 이상한 거 주워 먹었어…?”
“지금은 트리슈의 입술이 먹고 싶은데.”
“아니, 왜 갑자기 그쪽으로….”
“안 돼?”
트리슈가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 시선을 피하자, 이준은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트리슈는 순간적으로 거기에 넘어갈 뻔했으나, 도리어 정신이 번쩍 드는 걸 느꼈다.
귀여운 표정이라고.
귀여운 표정.
그럴 리가 없잖아!
“으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