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편
<-- Chapter 3.5 : 잠깐의 휴식 -->
“…. 무슨 얘기?”
“그냥 이것저것? 그냥 들어가기 좀 아쉬워서.”
트리슈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후미진 골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가만히 서서 안내라도 하려는 듯 린슬렛을 가만히 돌아보았다.
조금 늦겠는데.
린슬렛은 그렇게 생각하며 슬쩍 고개를 들어, 달과 시선을 마주쳤다. 확실히 뭔가, 이대로 들어갔다가는 밤에 몸이 근질거려서 다시 나올 것 같기는 한데.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걸까.
약간 꺼림칙한 것과는 달리 린슬렛은 트리슈를 따라 골목길 사이로 들어섰다. 그리고 이내,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던 두 사람은 빌딩 위로 뛰어올랐다.
깃에 털이 달린 재킷이 몸에 휘감기는 감각이었다. 힘이 끓어오르며 집중력이 고도로 상승했다.
“어디로 가는 건데?”
“뭐 일단, 사람이 적은 곳으로 갈까?”
의아함에 묻자 트리슈가 별 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단순히 정말 이야기가 하고 싶었을 뿐인 건가 싶어 린슬렛은 그녀를 계속해서 쫓아갔다.
밤의 도시를 두 궤적이 날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하게 요리 재료로 고민을 하던 두 여성은 게임 속의 기사가 되어 빌딩 위를 질주했다. 아니, 현실에 덧씌워진 듯한 게임 속의 세계를.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이쯤이면 괜찮겠지?”
트리슈가 멈춰선 곳은 마트로부터 꽤나 멀리 떨어진, 그러면서 굉장히 평범한 아파트 위였다. 굳이 이유가 있나 싶어 트리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굳이 여기로 택한 이유가 있어?”
“아, 응? 여기 우리 집이거든.”
“….”
“트리슈, 늦으면 엄마가 걱정하신단 말이야.”
“누군 엄마 없는 줄 아나 이게….”
린슬렛은 눈썹을 찌푸리며 복잡한 기분이 되어서 대답했다. 이렇게 간단하게 집을 가르쳐주는 행동으로 보자면, 역시 신뢰를 하는 건가 싶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음…. 뭐부터 시작할까. 사실 트리슈도 뭐라고 이야기하면 좋을지 잘 모르겠거든?”
어려운 기색을 감추듯 트리슈는 반대로 여유를 부렸으나 린슬렛은 그런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서로 이런 식으로 단 둘이 있는 건 처음이라는 이야기였으나, 트리슈는 적당히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서 말인데, 린슬렛 언니….”
“그 전에, 왜 갑자기 언니라고 부르는 건데?”
“친하고 싶어서?”
“….”
뭐라고 하는 거야.
린슬렛은 눈썹을 찌푸리며 입을 다물고 트리슈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그녀의 표정에서 악의라고는 느껴지지 않았으나 그것이 도리어 경계하게 했다.
“왜애, 어떻게 보면 자매잖아?”
“자매…?”
“자매님.”
훌쩍 뛰어 가까이 다가온 트리슈가 새끼손가락을 들어 내밀었다. 뭔가 약속을 하자는 뉘앙스인 것 같았으나 린슬렛은 불쾌해지는 걸 느꼈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그래? 트리슈는 싫지만도 않은데.”
“뭐…?”
“이렇게라도 해서 확인시키고 싶거든. 그 남자에게.”
그 남자라면, 타나토스를 말하는 걸까.
“자기 역시 가상의 세계를 비겁하게 이용하고 있다고.”
“….”
“이건 진짜가 아니니까 괜찮아. 하고 말이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언니, 타나 오빠랑 했지?”
그리고 트리슈는 직설적으로 말했다.
“섹스.”
“…. 아, 아니, 하지 않았어.”
가상에서는, 물론 했지만.
그건 현실이 아니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 식으로 회피할 거야? 또?”
“아니, 그게, 하지만….”
“그 사람은 현실과 가상을 똑같이 보잖아. 근데 이건 가짜라고 치부하면서 넘어가는 걸까?”
린슬렛은 대답하지 못했다.
“결국 편승하게 된 거잖아. 세상의 흐름에.”
세간에 떠도는, 해외 스트리밍을 통한 사이버 섹스.
그 남자 또한, 자신들과의 섹스가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여기는 걸까. 하룻밤 만나고, 불편함 없이 쾌감을 느끼고 가상에서의 모습을 변화시키고.
“그렇게 치자면 이 게임도 결국, 그런 세상의 흐름이 아닐까 싶어서 말이지. 타나 오빠와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기에 따라가지 못하는 것뿐일 테고.”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린슬렛은 분노해 일갈했다.
눈앞의 여자가 갑자기 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며 팔을 휘둘렀다.
“우리와의 관계가 가짜라고 치부해버리면, 그 남자의 신념 또한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는 말이야.”
“하지만 이건…. 현실에 직접적인 악영향을…!!”
“뭐, 사이버 섹스도 그렇잖아?”
“뭐…?”
“보고서가 있던데. 여기서의 섹스에 빠져들면 결국 현실에서는 제대로 된 쾌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늘어서 보조제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고.”
“그게 그거랑….”
“실제로 처음에 사이버 섹스가 나왔을 때도 그랬거든. 사람들이 실제로 신체에 악영향을 받아 하루 종일 발기가 풀리질 않는다던가. 여자의 경우에는 쾌감이 너무 강해서 실신, 혼절한다던가 했잖아?”
“….”
“가끔 그런 생각을 해. 인간이 ‘엘레노어’라는 존재를 받아들이지 못해 그렇게 규정이 된 게 아닐까.”
“궤변이야.”
“그렇다면 우리의 관계도 그렇게 되는 셈이야.”
그리고 결국 트리슈는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그 남자는 이 현실에 침범한 게임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지. 악으로 생각하고 부숴 버려야할 것이라고 규정했어. 아마 에스콰이어로서 최초가 아닐까?”
그는 현실과 가상의 구분을 포기해버렸다.
“아마 엘레노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일 거야.”
트리슈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사실, 눈앞의 여자 또한 같은 감정을 느끼는지 알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 그럼 넌 어떻게 하고 싶다는 거야?”
입술을 비튼 린슬렛이 말을 이었다.
“저렇게 매번…. 갤러해든지 뭔지에 정신이 팔려있는 남자한테, 확실히 정하라고 할 셈이야?”
“아니야. 갤러해든지 뭔지는 과정이고 결국에 이 아서리안을 끝내고 싶다고 했잖아? 그걸 위해서 국가 기관과 대립하고, 기업 회장하고 손잡고서.”
거기에 트리슈가 받아쳤다.
“정신이 나갔어. 진짜.”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타나토스, 다시 말해 이준이란 남자는 확실히 정상이 아니라고. 정상적인 사람의 사고관이 결여되어 있다고.
“하지만 우리의 관계는 가짜로 규정했단 말이지.”
“그건…. 내가….”
곤란하다는 듯 린슬렛이 다시금 눈썹을 찌푸렸다. 역시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구나 싶어 트리슈는 웃었다.
“알아, 우리가 이용해먹고 있다는 걸.”
“뭐…?”
“그 사람이 이용해먹는 게 아니잖아.”
트리슈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했다. 스스로 비참한 기분에 휩싸였음에도 능숙하게 숨겨버렸다. 실제로 그 사람이 먼저 그런 걸 요구했던 기억은 없었다.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자신들은, 그 남자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있을 뿐이 아닌 건지하고 말이다.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라, 단지 받을 뿐인 관계.
“트리슈는 그런 거 싫어.”
“나, 나도…. 나도 마찬가지야!”
그리고 린슬렛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하지만 뭘 어쩌자는 건데! 항상 걔는…. 어려운 길만 택하고 혼자 싸우고! 뼈가 박살날 정도로 다치기만 하고! 거기에 내가 어떻게…!”
“하아, 진짜. 언니도 너무 진지한 성격인 거 알아?”
하지만 트리슈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내저었다. 린슬렛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책임지라고 하지 뭐.”
“어, 어떻게 그렇게 해!”
“어쨌든 했잖아? 그럼 책임져야지. 남자답게.”
“그, 그게 무슨 소리야!”
“간단하게 말해서…. 이번 여행에서 진지하게 묻자는 거야. 그 남자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건지.”
트리슈는 요염하게 웃으며 린슬렛의 허리에 손을 휘감았다. 그리고 그녀가 당황해 굳어져 있는 사이 가볍게 입술을 맞추고 빙긋 웃었다.
“그걸 위해서 협력하자는 거지.”
“너, 너어 무슨 짓이야?!”
“아, 응? 트리슈는 여자도 괜찮아서.”
“?!”
“장난이야. 예쁘다고 생각하지만, 린슬렛 언니.”
“아니, 그게 무슨….”
“자매님?”
“크윽?!”
린슬렛은 얼굴이 빨개져서는 트리슈를 쳐냈다. 그리고 그녀는 귀여운 척 눈썹을 찌푸린 그녀를 보며 참았던 감정을 마구 토해내기 시작했다.
“너 말이야! 갑자기 휙 어디선가 나타나서 티티에 대해 다 아는 척 말하지 말란 말이야…!! 너 이거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내는 거라는 거 알아! 몰라!”
“어머, 그걸로 치면 린 언니도 그렇잖아?”
하지만 트리슈는 귀엽게 입술에 손을 올리며 곤란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린 언니는 또 무슨…. 아니, 내가 뭘?!”
“유하 언니 꺼 빼앗았으면서.”
“빼, 빼앗다니! 나, 나는 그냥!”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인 거지이~.”
“아아, 몰라! 몰라! 나는, 나는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행동했을 뿐인데! 그, 아니 그 전에! 정말로 티티랑 유하 씨랑 그런 관계인지도 모르는 거잖아!”
“뭐…. 둘이 볼 때마다 깨가 쏟아지던데 당연하지 않을까? 요새 그런 거 쉽게 쉽게 잘하니. 보통 그런 얌전한 언니둘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가는 법이기도 하고.”
“근데 왜 그 멍청이는 자기 쪽에서는 가만히 있냐고!!”
“고자니까?”
“뭐…?”
“아, 그 생리적으로 그렇다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
확실히 그런 일면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보통 선생님하고 제자면 남자들 좋아서 죽지 않나?”
“너, 너 평소에 대체 뭘 하는 거야?!”
“아, 그건 같이 할 때 알려줄게.”
“…?! 아, 안 해! 안한다고!”
“반응 보고 싶지 않아? 트리슈는 보고 싶은데.”
“조금 보고 싶긴 하…. 아, 아니야! 그건 진짜 아니라고! 생리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뭐, 같은 남자 좋아하게 됐으면 그 정도 각오는 미리 해둬야 하는 법이 아니겠….”
“좋아하는 거 아니라니까아아아아!!”
길게 이어지는 비명에 트리슈는 즐거운 듯 웃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