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편
<-- Chapter 3.5 : 잠깐의 휴식 -->
◇
그러는 한편,
“….”
“….”
“….”
테이블에는 전운이 감도는 중이었다.
카페에 모이자마자 세 여성은 깨달은 것이다.
서로가 적임을.
그것은 마치 위촉오, 고구려, 백제, 신라와도 같은 상황. 누구 먼저 말을 꺼내는 사람은 없었으나 팽팽하게 신경전이 거듭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는 한편, 약간의 동질감도 피어올랐다.
그럼 그렇지,
저 남자가 그런 멋진(?) 생각을 할 리가.
세 사람의 눈길이 카페 입구 쪽에 앉아있는 준에게 향했다. 눈썹을 찌푸린 채 원망하는 유하, 눈을 이글이글 빛내는 린슬렛, 마지막으로 어떻게 죽이면 좋을까아? 하고 즐거운 상상을 하는 트리슈까지.
“저, 여러분…?”
그리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유하였다.
유하는 비교적 최근 들어, 이준을 곤란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꾹꾹 참는 중이었다. 그래서 지난번 카페에서 모였을 때도, 당황해 하는 이준을 배려해 일부러 두 사람을 주방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거기에서도 두 사람은 신경전을 벌였지만….
어쨌든 그로 인해 알 수 있었다.
눈앞의 두 사람은 이준에게 평범함 그 이상의…. 꽤나 구체적인 형태의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준’에게는 여자 친구를 만들어왔으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하는 그녀였으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물론 여러모로 고민을 하는 한창 나이의 여성이었다.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가끔씩 듬직한 모습을 보이는 준을 아무에게도 넘겨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직까지는.
그리고 그게 언제까지인지는 모른 채.
“네, 유하 씨.”
어른스러운 유하의 목소리에, 린슬렛은 애써 ‘씨’라는 칭호를 붙여가며 대답했다. 최대한 감정을 내보이지 않으려 하는 그녀였으나 마음속에서는 이미 저 남자, 다시 말해 타나토스에 대한 분노로 들끓는 중이었다.
그녀로 말할 것 같으면 타나토스에게, 동년배의 소년에게서 처음 느끼는 감정을 갖는 중이었다. 소위 말해 첫사…. (그 뒤는 부끄러워 스스로도 절대 상상할 수 없는 단어였다.)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만큼 혼란에 빠져 뭐가 옳고 그른 건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어쨌든 정적(?)에게 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어른스러운 시늉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알고 있다. 눈앞의 두 여자는 분명히 자신에 비해 어른스러운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 갈래에서 청순하냐 요염하냐로 갈리는 상황이었지만, 어쨌든 간에 그녀는 그렇기 때문에 타나토스의 앞에서 안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유하 ‘씨’라니.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린슬렛.”
물론 트리슈가 이렇게 시비를 걸어올 때면, 그 결심은 순식간에 바람에 날려 사라져 버리지만.
“너, 너야말로…. 현실에서는 좀 현실의 부르는 게 어떨까? 김시우 ‘양.’”
분노로 반쯤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 일부러 상대의 어린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 그렇게 불렀지만.
“하, 주다연 아줌마라고 불러드리면 되나?”
한방에 명치를 얻어맞았다.
“트리, 슈우우우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린슬렛이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쳤다. 조금 짙어진 화장 밑에서 원래의 소년 같은 천진함이 올라와 트리슈는 빙긋 웃었다.
“너, 너랑 나랑 한 살 차이밖에 안 나지 않나?”
그리고 그런 웃음에 정신을 차린 린슬렛은 침착해지려 애를 쓰며 자리에 앉았다. 어쨌든 상대의 저열한(?) 술수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도 어린 건 어린 거잖아?”
“야! 갈 때는 순서 없어!”
버럭 소리를 지른 린슬렛은 뒤를 이어 트리슈가 다른 곳을 보고 있자 고개를 틀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미소를 짓고 있는 유하를 보고 몸이 굳어졌다.
“….”
아니 그것은, 유하가 아닌 유하의 얼굴을 한 무언가에 가까운 것이었다.
“두 분 다, 좀 진정하세요.”
“네, 네!”
“유, 유하 언니한테 한 말이 아니라….”
“일단 앉아요.”
두 사람은 식은땀을 흘리며 그 말을 들었다. 생긋생긋 웃고 있는 유하의 모습에서 묘한 포스를 느낀 트리슈는 시선을 피하다 이내 넓은 어깨를 발견했다.
저 바보를 어떻게 할까.
턱을 괸 채 웃은 트리슈는, 도리어 이런 상황에 약간 즐거움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했다. 솔직히 말해 화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음에도.
어려운 것은 생각하기 싫었다. 트리슈는 현재를 조금 즐기고자 하는 편에 가까웠다. 가끔씩 눈앞의 남자를 생각할 때면, 무척이나 복잡하고 어려운 감정의 파도가 몰아닥쳤으나 그럼에도 그녀는 그조차 즐기는 편이었다.
왜냐면 같이 있으면 즐거우니까.
무뚝뚝하고 진지하고, 무모한 일면이 귀여우니까.
가끔 곤란하게 하는 부분도 멋지니까.
“저어, 유하 언니. 린슬렛 씨.”
흥미로운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린 트리슈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쩐지 게임 속이었다면 악마의 뿔과 꼬리 같은 게 슬며시 나오지 않았을까.
“일단 저는, 질 생각은 없거든요?”
그리고 그녀는 선언했다.
두 사람의 앞에서.
“….”
침묵이 맴돌았다. 옆에 있던 넬이 눈을 동그랗게 뜰 뿐이었다. 즉, 남은 두 사람은 반응도 제대로 못한 채 굳어져있을 뿐이었다. 이런 걸 롤링스톤…. 다시 말해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냈다고 했던가.
“잘생기기도 했으니…. 확 가져버리려고요.”
그런 시시한 농담을 생각하며 트리슈는 요염하게 웃었다. 아찔한 색기가 풍겨져 나왔다. 그런 식으로 행동하며 그녀는 스스로의 마음을 숨겼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린슬렛이 그러는 것과 마찬가지로.
같은 여자이기 때문일까. 세 사람은 준에 대한 행동에 어느 정도 공통점이 있는 상태였다. 그가 너무도 무언가에 몰두한 상태기에 오히려 더 거리를 벌린다는 점이었다. 귀찮게 생각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 마음속에 있는 무언가를 알지 못했기에.
“헤에, 그래놓고 화장 예쁘게 하고 왔구나?”
“펴, 평소랑 똑같거든?”
“들어올 때도 완전…. 여자 같던데?”
“여자 맞거든!”
“평소에는 순 남자애면서.”
“그, 그러는 너도…. 아버지가 엽총 사러 갔다면서!”
“?!”
트리슈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 어떻게 그걸?!”
완전히 여유를 잃어 한방 먹일 틈이 생긴 모습에, 반대로 린슬렛이 사악하게 웃었다.
“히히이, 너랑은 상관없는 다른 ‘친구’가 말해줬거든.”
이 바보 같은 오빠가…!!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 채 트리슈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베디비어를 휙 노려보았다. 그러자 린슬렛은 계속해서
“안 사귄다고 했다며어~?”
“아, 아니거든! 바보야! 너야말로 극구 부인하면서!”
“호오, 근데 지금은 그런 소리를?”
“힉?!”
“말해버릴까아아…?”
“아, 안 돼! 이건 걸즈 토크잖아?!”
“우리가 그런 협의를 했던가아? 유하 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트리슈가 말하는 걸즈 토크.”
“네, 네? 저, 저는 무슨 소린지 잘….”
“아아, 무슨 헛소리를 하시냐는데?”
“그, 그런 소리가 아니잖아!”
거의 울상이 된 트리슈가 애원하듯 유하를 바라보았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함에도 간절한 트리슈의 모습을 보자 유하는 마음이 약해졌다.
“그, 그만하죠? 다연…. 씨.”
“하아, 정말 못 맞춰주네. 역시 세대 차이가….”
린슬렛이 김이 샜다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대 차이’라는 말에 우뚝, 멈춰선 유하는 이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다른 얼굴이 되어서 고개를 들었다.
“준은 어른 여자를 좋아한다고요?”
“그래도 가족 같은 사람은 좀 아니지 않을까요?”
“법적으로는 ‘어린애’보다는 낫죠?”
빠직.
“누, 누가 어린애라는 거야!”
“이렇게 흥분하는 점에서요오?”
“크윽!”
굴욕이다.
“흐음 유하 언니.”
“네, 시우 양?”
“그래서 타나 오빠랑은…. 어디까지 갔어요?”
“?!”
예기치 못한 공격에 유하의 몸이 굳어졌다.
“그런 야한 몸을 오빠가 가만히 놔뒀을까…?”
“주, 준은 순수한 아이에요!”
“하아, 그럴 리가 있나요.”
“?!”
그 발언이 시사하는 바는 무척이나 컸다. 하지만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혼란스러워 하는 유하를 보며 트리슈는 요염하게 다리를 꼬며 치명타를 날렸다.
“제가 아는데에.”
“주, 준이 그럴 리가 없어요오오오?!”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어 유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트리슈는 여유롭게 킥킥거리며 그런 유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때까지 가만히 세 사람을 지켜보던 넬은 물고 물리는 관계에 감탄했다.
“…. 무슨 일 있어?”
바로 그 순간, 뒤쪽에 앉아있던 그가 다가왔다.
세 사람은 동시에 이준을 돌아보았다. 저마다 각기 알 수 없는 감정을 담은 모습에 이준은 어쩐지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끼는 듯했다.
“더, 더 이야기 나누….”
“준?”
“으, 으응?”
“좀 앉아볼래요?”
“아, 그건 좀 이따가 해요. 트리슈의 말이 아직 안 끝났으니까.”
“티, 티티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단순한 일에조차 의견이 갈렸다. 잠시 트리슈와 알 수 없는 기 싸움을 벌이던 유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약간 무뚝뚝한 얼굴로 이준을 돌아보았다.
“이따가 부를게요.”
“…. 넵.”
그리고 이준이 돌아갔다.
“그래서 시우 양, 하고 싶은 말이라는 건?”
“보아하니 모두들…. 같은 마음일 것 같아서.”
“뭐?”
린슬렛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트리슈가 손을 들었다. 그리고 휙 펼치자 디멘션 커넥터가 테이블 위에 섬세히 표시된 지도를 생성해냈다.
“여기가 여행지에요.”
“그, 그런데요?”
“각자 세 지점이 있죠.”
뾰롱, 뾰롱, 뾰롱, 하며 세 개의 하트 표시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위에 각각 ‘한옥 마을’ ‘명당 온천’ 마지막으로 ‘올레길 도보 산책’이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오는 동안 조사해본 데이트 명소입니다.”
“…!!”
대단해. 정말로 대단해.
“그리고 여기에는, 무려 우정현 회장님이 ‘마음대로 쓰라’면서 주신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트리플 블랙 카드가 있죠. 참고로 한도 무제한입니다.”
휙, 카드가 떠올랐다.
“저희에게 주어진 시간은 2박 3일…. 별장은 산속에 있습니다만. 얼마든지 빠져나올 틈은 있겠죠. 저기에 있는 바보를 어떻게 꾀느냐가 문제겠지만. 그건 뭐 서로가 알아서 잘 해보는 걸로, 어떠신지요?”
후후후후, 하고 트리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저, 저는 한옥…!”
“아아, 유하 언니. 너무 성급하신데요.”
유하가 하트를 손에 쥐려고 하자 트리슈가 휙 빼냈다. 남은 두 코스를 본 린슬렛이 눈썹을 찌푸렸다.
“하, 하지만 온천이랑 올레길은 너무 그렇잖아! 온천은 어차피 따로 들어가야 하고…!”
“후, 후흐흐…. 후흐흐흐흐흐흐….”
“?!”
“가족을 위해 마련된 혼욕 서비스도 있다고요?”
“그, 그건 너무 음란해요!”
“아니 뭐 가상에서는 물고 빨고 다 하셨으면서….”
“?! 그, 그게 아니라! 아, 아무튼 선을 넘어서는 안돼요! 아직 그런 사이도 아닌데!”
“그럼 협약을 하는 걸로 할까요? 절대로. 타나 오빠로부터 먼저 ‘사귀자.’ ‘사랑한다.’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없는 걸로.”
“…. 나, 나는 뭐 그런 말 안 들어도 되거든!”
“린슬렛 씨. 츤데레도 적당히 좀 해요.”
“츤데레?”
유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신병 걸린 여자를 귀엽게 표현하는 일본 말이에요.”
“저, 정신…! 아니거든!”
“그래서 어쩔 건가요? 두 분은 어떤?”
“저는 물론 혼욕. 최악은 올레길.”
트리슈가 고개를 끄덕이며 린슬렛을 돌아보았다.
“호, 혼욕은 너무 야해! 하, 으…. 한옥 마을에는 무슨 코스가 있는데?”
“뭐어, 한복 입고 전통 가옥 구경하는 거겠지? 간단하게 막걸리 먹고 그러는 것도 있을 걸?”
“저는 한옥으로 하겠습니다.”
유하가 순식간에 결정했다.
“아, 아니 그건 좀 투표로….”
“아뇨 전 한옥.”
“…. 하아, 그럼 난 올레길로 할래. 한복 같은 거 어울리지도 않고. 차라리 그냥 재킷 입고서 달리는 게.”
“하지만 그렇게 하면 재미가 없겠죠?”
“…?”
트리슈가 빙긋 웃으며 프로그램을 실행시켰다.
사다리 타기를.
“결과에는 의문을 재기하지 말 것!”
그리고 룰렛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이 분들도 지난번 분들처럼 카페에 놔두면 열 몇 시간이고 떠드실 수 있을 것 같군요..
늦어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