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크로맨서 재킷-144화 (144/321)

144편

<-- Chapter 3 : 선율의 기사 -->

검은 액체 속에서 나는 정신을 차렸다.

이곳이 현실인지 가상인지 인지하는 데에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이내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워 욕조 속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일어나셨군요.”

한 남자가 자리에 앉아 나를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눈웃음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뒤를 이어 녀석의 오른팔을 바라보고는 가볍게 눈썹을 찌푸렸다.

회색빛의, 기계적인 형태의 의수가 보였다. 각종 피스톤과 와이어 같은 선, 내부에서 빛이 일어났다.

“너….”

“아, 이거 그냥 입기만 한 거니까요.”

“뭐?”

“베디비어가 되며 얻게 된 새로운 무기인 셈이죠.”

“….”

“네, 그렇게 되었습니다.”

녀석이 쓰게 웃으며 팔을 들어 가볍게 움직이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내게 보여주었다. 기계적인 움직임에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머릿속이 몽롱했다.

“얼마나 지난 거지?”

“3일이요.”

“….”

“그, 괜찮습니다. 누나 분께는 우정현 회장님께서 직접 이야기를 하셨다니까요.”

“무슨 이야기를…?”

“아르바이트 삼아 모델 촬영에 참가하게 되었다고 했던가…? 그래서 괌에 다녀오게 되었다고.”

뭐 그런 변명이 다 있어.

“음성 합성으로 모드레드님이 타나토스님의 목소리를 흉내내는데 정말로 즐거웠습니다.”

부드럽게 웃으며 중얼거리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어쩐지 괴리감 하나를 느꼈다. 잠시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녀석은 그 상태에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녀석, 이 아니겠지.

“베디비어.”

“네, 타나토스님.”

“그 이름은…. 네 선택인 거겠지?”

“물론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한 베디비어가 환하게 웃었다. 내가 지금껏 ‘준우’라고 불렀던 걸 녀석도 마찬가지로 알고 있었다는 감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럼 너도 좀 편하게 불러.”

“네…?”

“타나토스님은 너무 길잖아.”

“나토라고 부를까요?”

“뭐야 그 일본 콩 같은 이름은.”

“아, 콩이라고 부르는 건 어떨까요?”

킥킥 거리며 녀석이 웃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져 욕조에 몸을 기대고 검은 액체 속에 몸을 뉘였다. 그리고 뒤를 이어 다른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걸 느꼈다.

“다른 애들은 어떻게 됐어.”

“일단 좀 쉬시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 지금 당장.”

그렇게 이야기하자 녀석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가웨인에게 당해 쓰러진 이후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싶어 나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일단 트리슈는….”

그리고 녀석은,

“오늘부터 모델 워킹을 배운다고 하더군요.”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

뭐라고?

“이, 일단 좀 가봐….”

뭐가 뭐지 싶어 나는 몽롱한 와중에도 몸을 일으켜 세웠다. 촤악, 물이 튀며 욕조 끝을 디디려던 나는 이내 중심을 잡지 못하고 앞으로 몸이 기우는 걸 느꼈다.

“타, 타나?!”

그렇게 날 부른 베디비어가 순간적으로 몸을 움직여 쓰러지려는 몸을 지탱했다. 하지만 버텨내지 못하고 뒤로 기울어져 나는 녀석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쿵, 하는 소리.

“으윽….”

신음과 함께 고개를 들자 베디비어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다.

“미, 미안하다.”

“아닙니다. 좀 어지러우시겠죠. 그렇게 피를 흘렸는데.”

“이펙트잖냐…?”

“현실이라고 하지 않으셨던가요.”

“하아.”

한숨을 내쉰 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반쯤 몸을 일으켜 세운 채 베디비어와 나는 한동안 그렇게 되었다.

끼익, 하고 문이 열리기 전까지.

“…!!”

뭔가 싶어 고개를 돌린 나는, 문앞에 발렌타인이 서있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의 모습을 본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아 그러고 보니, 나 지금 알몸이었….

걷는 게 이렇게 힘이 들 줄이야.

“서, 선생님…. 조, 조금만 쉬….”

“안 돼~. 앞으로 다섯 번 더!”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 트리슈가 애걸하며 빌었으나 눈앞의 여성은 가차 없었다. 엉덩이에 타이트하게 달라붙는 청바지와 가벼운 셔츠,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여성은 가까이 다가와 트리슈를 일으켜 세웠다.

“하, 하지만 힐은 오래 신으면 힘들어서어어…?!”

“여자의 아름다움을 익혀야지? 안 그래도 좋은 원석인데…. 우후후, 귀엽구나아.”

이런 사람이 한국 패션 모델계를 주름 잡는다니!

“아, 아니 그보다 저는 노래를….”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사랑스러운 게 필요하다고? 처음에 정현 언니가 부탁했을 때는 뭔가 싶었는데, 역시 이 정도 원석이면 후후후….”

음산하게 웃는 패션계의 제왕.

“자자, 사랑하는 남자라도 떠올리면서, 응?”

“….”

“아, 얼굴 빨개졌네, 시우. 귀여워!”

이럴 바에야 아서리안에서 실컷 싸우는 편이 낫겠어.

힐을 신고 비틀거리며 일어선 트리슈는 우는 얼굴을 한 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자연스럽게 며칠 전에 있었던 싸움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 남자가 쓰러졌을 때를.

“오! 표정이 좋아졌는데.”

베디비어가 된 오빠가 나서 구하지 않았더라면 분명히 끌려갔을 터였다. 트리슈는 그렇게 생각하자 그 남자의 무모함에 분노를 느꼈다. 하지만 이내 그 화살은 지금까지 비참하게 멈춰서 있던 자신에게 돌아왔다.

트리슈는 분노를 느꼈다.

멈춰서 혐오 받으려고 했던 자신에게.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눈앞에 있는 여성을 향해 천천히 힘을 주어 걸음을 옮겼다. 서연은 그런 트리슈를 보며 빙긋 웃어 보였다.

‘…. 멈춰 서서는 안 돼.’

트리슈는 마음을 다잡았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용기를, 전해 받았으니까. 그리고 그로서 오래 되어 굳어진 관계가 다시금 삐걱거리면서도 흘러가기 시작했으니까.

이제는 자신이 돌려줄 차례였다.

늦은 오후, 가웨인은 훈련을 마치고 돌아와 사무실의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오랜만에 몸을 움직여 이런저런 퀘스트를 수행했더니 몸이 뻐근했다.

“….”

반대편에서 보고서를 작성 중이던 라이오넬은, 사무실 안으로 들어선 그를 보고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때의 싸움 이후로 쭉 이런 식이었던 터라 가웨인은 슬슬 지치는 것을 느꼈다.

물론 입장이 있기에 말은 못하는 거겠지만.

죽일 듯한 얼굴로 노려봤었지.

신성한 전사의 전투를 방해받아서 화난 것일까. 하지만 가웨인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그대로 두었다면 소중한 기사 전력, 아니 이 게임에서 단순히 전투력만으로는 최강인 남자를 잃을 뻔 했으니까.

하지만 타나토스는 그런 그에게 승리했다.

운이 좋았던 걸까. 아니면 강해진 걸까.

모르겠군.

“라이오넬.”

그래서 가웨인은 입을 열었다. 거기에 대해 신경을 안 쓰게 보이려는 심산일까. 펜 대신 사용하는 얇은 대를 돌리며 그는 고개를 들었다.

“타나토스는 강했나?”

“…. 않다. 너의 성향.”

라이오넬의 대답은 단순했다.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일까. 가웨인은 확실히 틀린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방금 전의 이야기는, 확실히 가웨인으로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백시호로서 할 이야기였지.

타나토스에게 내면과 자신의 행동을 위선이라고 부정 받아, 열등감을 느끼고 있는 남자인 백시호로서의.

“기사는…. 강한 걸까.”

그렇기에 무뚝뚝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강하다.”

“하지만 너 졌잖아.”

“….”

“거기에 우아랑도 패배했지. 비참하게.”

그리고 식음을 전폐하고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 패배에 마치 정의가 꺾인 것처럼.

“우리를 ‘진짜’ 군인이나 경찰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닐까? 그 녀석.”

전혀 아닌데.

모두가 엘레노어의 손에서 놀아나고 있는 가운데, 필사적으로 그걸 감추고 있을 뿐인 것을.

“그럼, 다음 주도 잊지 말고 와야 해요?”

“가, 감사합니다!”

바깥까지 배웅을 받을 줄은 몰랐는데.

고개를 꾸벅 숙인 트리슈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끼며 건물을 빠져나왔다. 4층짜리 건물은 충무로에 위치해서 그야말로 휘황찬란하다는 기분이었다.

그런 곳의 대표가 개인 교습까지 해준 데다가 심지어는 배웅까지 해주다니…. 무슨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일에 트리슈는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 걸 느꼈다.

그렇게 치자면 우정현 회장과 독대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그 남자가 훨씬 더 대단했지만.

이것저것, 갑자기 일이 몰려드는 듯한 기분에 트리슈는 입을 다물고 밤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저녁은 안에서 먹었으므로(근처에서 백반을 시켜먹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오늘은 일어났을까.

진한 녹색의 머리가 가볍게 어깨 부근에서 찰랑거렸다. 조금 어깨에 힘이 빠져 오늘은 단정한 원피스를 골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남자들의 시선을 독점한 채 트리슈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었다.

그리고 이내, 마주쳤다.

“….”

발렌타인과.

“가끔 생각하는 건데 말이야.”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여중생의 교복 차림에 트리슈는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발렌타인은 머뭇거리며 거기에 대답하지 않고 어색하게 눈을 마주쳤다.

“범죄 같단 말이지.”

“뭐, 뭐가…. 요.”

‘요’는 무척이나 작았다.

“네가 교복 입은 거. 너 아무리 봐도 20대 이상으로 보이거든.”

“….”

“그리고 사실이잖아? 발렌타인.”

그렇게 선언하듯 이야기하자 조그마한 여중생은 금세 재즈바의 사장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그녀가 알고 있는 발렌타인의 모습이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는데.”

“…. 좋은 소식부터.”

“타나토스님이 깨어났대.”

트리슈는 얼굴이 빨개졌다.

“나쁜 소식은?”

“둘이서…. 끌어안고 있더라고.”

발렌타인의 얼굴이 다른 의미에서 붉어졌다.

“…?”

뭔가 그림이 그려지는데.

“가, 가자…!”

당황해 달려간 트리슈는 저도 모르게 발렌타인의 손을 꽉 쥐었다.

========== 작품 후기 ==========

챕터 3.5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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